<font color="darkblue">기계적인 작업으로 서구와 자본주의 따라잡기에 급급했던 디자인의 역사… 삶의 양식을 창조하는 ‘디자인의 정치’로 텅 빈 현실 정치를 채워볼까</font>
▣ 이정혜 베가스튜디오 대표·디자이너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디자이너들은 흔히 명함에 ‘크리에이터’라는 직명을 쓰곤 한다. 의미상으로 보면 디자이너는 ‘설계가’지만 크리에이터는 ‘창조자’이니 두 개의 말은 일견 비슷하면서도 강조점이 다르다. 재미있는 한 가지 차이는, 보통 디자이너라고 할 때는 매체의 분류가 앞에 표기되고, 크리에이터라고 할 때는 더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활동을 앞에 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래픽 디자이너나 패션 디자이너라는 명칭과 스타일 크리에이터나 라이프 크리에이터라는 명칭이 함께 쓰인다.
한편, 디자이너들이 즐겨쓰는 수사 중에 “나는 세상을 바꾼다”는 표현이 있다. 디자이너는 세상을 바꾸는 자, 이노베이터, 즉 혁신가라는 설명이다. 이것 역시 디자인이 할 수 있는 일의 가능성과 포부를 드러낸다. 성공한 디자이너들은 상업적으로 매출 신장을 기록한 사람이기 이전에 기존의 통념을 타파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되기를 요구받는다. 따라서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개인의 개성과 집단의 목표라는 두 점에 줄을 놓는 데 비유할 수 있는데, 그 사이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이다. 사실 처음부터 ‘창조’라는 목표 자체가 허상이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은 공중에서 걸어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기계적이고 정치적인 디자인의 비밀
이 세계는 어떻게 창조되고 있을까. 디자이너들에게 세계는 ‘인공물의 환경’을 뜻한다. 그들은 물질의 외양을 믿게 마련이다. 그러나 세계는 물질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문제를 아주 단순화해 생각해보더라도, 지극히 작은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는 공정에서조차 생산에 필요한 여러 요소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여러 결정 요인들을 내포한다. 디자이너가 어떤 형태를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제작 의도와 생산 요건, 규격 등이 거의 규정되어 있다. 게다가 디자인을 통해 가시적인 결과물에 대한 구상이 완료되더라도 생산설비를 거치면서 기술자들의 판단에 따라 물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생산품은 디자이너만의 피조물이 아니라 생산에 관련된 제반 요소들의 복합적인 산물이다. 그리고 세계는 이 복합적인 산물들을 ‘사용’해 여러 활동을 벌이게 마련이다. 여기에는 전쟁이나 소비, 사랑이나 체험까지도 포함된다. 그 각각의 결과는 또다른 산물들의 필요를 낳고 또 폐기시키고는 한다. 따라서 디자이너들의 ‘창조자 신화’는 디자이너 자신들의 복음에 불과하며, 실제 세계를 창조하는 힘은 그 누구에게도 완전히 집중되어 있지 않다. 누구나 그 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이뿐이랴. 창조자를 자임하는 디자이너들의 특수한 노동은 두 가지 사실을 은폐한다. 한 가지는 생산 과정에서 ‘형태’를 하나의 직능으로 떼어냄으로써 분업화된 노동의 대부분 영역을 더욱 기계적인 공정에 위치시킨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누구나 정도는 다르지만 디자이너와 마찬가지로 창조에 참여하고 있는데 그 과정은 디자인의 원형, 즉 결과의 목표로 제시되는, 디자이너가 머릿속에 그린 형태에 근접해가는 방향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
또한 디자이너는 ‘새로운 형태’가 창조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숨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물의 형식은 생산 양식과 이데올로기 양식 그 자체를 대변한다. 디자이너가 ‘개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는 자기 자신을 상품화해 특정한 가치를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이다. 오히려 창조는 조형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현실 정치 세력의 활동이 정책적인 차원에서 사회의 문화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누구나 자신의 삶의 여러 과정에서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며 생산 또는 생활에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사물은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마찬가지로 의미는 반드시 외적인 양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형태는 의미와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한국에서 디자인은 정치적인 이유로 산업에 이바지했다. 정부와 언론이 디자인을 세계화의 도구로 육성한 결과다다. 그리고 내적으로는 서구적 근대성의 외양을 갖추는 데 바빴다. 지난 40년간 한국 디자인은 세계의 자본주의와 그 양식을 학습했고 전파했다. 이제 우리는 표면적으로 그들과 같은 도시, 그들과 같은 음식, 그들과 같은 문화를 공유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과 질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는 동시대성을 확보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디자인에 대한 판단 기준·변화의 근거들은 언제나 그 문제가 앞선 국가들의 사례에서 빌어오기 일쑤였다. 그로 인한 결과는 국내에서 새로움의 권력으로 통용되었다.
여기에 어떤 종류의 창조가 있었을까. 한국 정치는 민주주의의 양식을 아직 자발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국 디자인은 근대성의 양식을 발현하지 못했다. 이식은 모방일 뿐이며,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 했지만 모방은 그저 편리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의 과정은 구성원들 사이의 내적인 필요와 문제 제기, 협의와 진통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출현하게 될 때 그 이유를 분명히 만들어내지 못하고 바깥에서 따온 미봉책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면 결국 일부 주체들은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문제는 곪기 마련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갈수록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잊게 마련이다. 결국 자율성과 주체의 힘을 얼마나 자각할 수 있느냐에 따라 창조의 가능성이 열리며,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의 힘으로 창조해낸 질서는 다시금 그 다음의 흐름을 터놓게 된다.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그보다는 우리 사회의 텅 빈 민주주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하다. 겉모습은 그럴듯하지만 실제 우리 삶에 내재한 수많은 문제들을 들여다보고 속까지 든든하게 채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작업은 정치가의 일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일상에서 다시 발견되어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힘, 이데올로기의 마취에서 풀려나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한 판단을 취하려는, 내 안의 힘을 일깨우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 자신을 삶의 주체, 정치적 주체로 인식하는 것 말이다.
형태를 넘어 삶의 양식을 창조하기
디자인의 정치는 현실 정치, 또는 정치 디자인보다 광범위한 일상의 영역에서 디자이너들과 보통 사람들, 대중의 자각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 힘으로 만들어 사용하려는 창조의 욕구가 많은 이에게 자라날 수 있다면 디자인의 정치는 정치의 공백을 메우게 될 것이다. 특히 이런 점에서 디자이너들은 ‘형태’를 창조하는 자신의 힘이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됐을 때야말로 ‘창조’가 메아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디자인은 세상을 바꿀 수도 있고 디자이너는 창조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그것은 디자인이 더욱 나은 삶의 선택을 위해 쓰였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일이다. 모든 이에게 창조의 기쁨을 누리게 하자. 새로운 사회와 삶의 형태를 함께 만들어가는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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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성기가 필요 없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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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요즘 대기업의 화두는 ‘디자인 경영’이다. 삼성만 해도 세계 일류기업으로 올라서려면 디자인 경쟁력 강화가 필수적이라며 디자인 분야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여기에서 디자인의 의미는 상품의 겉모습을 매력적으로 포장하는 데 머물게 마련이다. 그런 상식적인 디자인의 개념을 떠올리며 ‘정치 디자인, 디자인의 정치’전이 열리는 서울 대학로 국민대 제로원디자인센터 전시장에 들어서면 순간 당혹스러움을 느낄 게 틀림없다. 어디에서도 멋들어진 상품의 포장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디자인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뒤집는 전시장에는 현란한 첨단의 이미지가 떠올라지지 않는다. 대신 벽면을 가득 메운 줄글이나 신문기사, 병원 링거병 꽂이대에 줄줄이 걸린 알전구와 형광등, 평양에서 열린 아리랑 집체극 카드놀이 사진, 대검찰청 대회의실 모습 등이 눈길을 붙잡을 뿐이다. 우리가 디자인의 개념에 포함하지 않았던 일상적인 풍경을 통해 ‘디자인의 정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디자인이 세상에 대해 발언하는 양식은 화려한 상품을 통해서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덤으로 디자이너의 정치에 대한 냉소적 속내를 엿볼 수도 있으리라.
사실 디자인이 일상에 개입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디자인 경영’이 아닌 ‘디자인 정치’라고 해서 생경한 구호가 전시장을 도배하지는 않는다. 국가 권력이 디자인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요란하지 않다. 사진평론가 이영준이 해석한 는 디자인의 정치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위풍당당한 의자는 상대방이 앉아 있을 때 디자인 요소를 촘촘하게 드러낸다. 누가 앉더라도 용무늬 장식과 자잘한 디자인 요소로 앉은 이의 권위를 위압적으로 보여준다. 디자인과 정치의 교묘한 만남이라 하겠다.
그런 양상은 국내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고현주의 은 권력기구에 대한 주권자의 관점이 인테리어에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일상과 정치가 한 몸으로 움직이는 셈이다. 김미영이 시각 이미지로 드러낸 남쪽의 새마을운동과 북쪽의 천리마운동은 전체주의적 상황이 투영된 쌍생아로 보인다. 때로는 김영철의 처럼 권력자가 부드러운 이미지로 표현되지만 거기에도 미세한 정치적 장치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디자인의 시각적 요소는 정치적 선동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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