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수 감독의 ‘한국 현대사 3부작’ 완결편 …시대의 중심에 선 허약한 남자들이 여성의 정원에 숨어들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임상수는 시대를 다루지만, 시대 속으로 몰입하지 않는다. 대부분 오늘의 입장에서 그때의 상황을 본다. 그래서 그는 그때를 편들지 않고, 그때의 인물들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쉽사리 그들을 조롱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 시대의 남자들이 조금 철이 없었다고,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서 말한다. 이것은 임상수 감독이 스스로 “한국 현대사 3부작”이라고 부르는 , , 을 관통하는 일종의 태도다.
아파하는 남자, 안타까워하는 여자
임상수 감독의 은 황석영의 소설을 영화로 옮겼다.
1980년대, 민주투사인 남자는 ‘도발이’를 치고 있다. 여자는 경찰에 쫓기는 남자를 숨겨준다. 여자는 스스로 “운동권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어쩌면 무료한 일상에 세상이 침입하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여자가 기다렸던 세상이다. 이렇게 사랑에 빠진 그들은 6개월 동안 아름다운 이상향, ‘오래된 정원’인 갈뫼에서 불안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남자는 시대의 부름을 외면하지 못하고 세상에 나갔다 구속되고, 법정에서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해 17년 동안 감옥에 갇힌다. 그리하여 ‘6개월의 사랑, 17년의 이별’이 시작된다. 여자는 남자의 아이를 낳았지만 하염없이 남자를 기다리는 인생을 살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의 선택으로 아이를 낳은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남자가 마침내 감옥에서 나오지만, 여자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세상도 더 이상 그 세상이 아니다. 어쨌든 바뀐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남자는 그들의 갈뫼에 돌아가 세월을 돌이키고 희망을 모색한다.
“그거 하지 마. 조직인지, 지랄인지”
이렇게 은 아파하는 남자와 안타까워하는 여자로 시작한다. 시골 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염정아)는 시대를 아파하는 오현우(지진희)를 지켜보면서 아파한다. 80년 광주에서 빠져나온 현우에게 윤희는 “쉬세요. 이제 푹 쉬세요”라고 말하지만 현우의 휴식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을 떠나서 시대로 향해 떠나는 현우를 보면서 윤희는 “숨겨줘, 재워줘, 먹여줘… 몸 줘… 왜 가니? 니가”라고 처연하게 되뇐다. 여기까지 은 능동적인 남성, 수동적인 여성의 성 역할을 재현하는 통속적인 멜로처럼 보인다. 더구나 무릉도원 같은 갈뫼에서 선남선녀가 노니는 화면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스크린 너머의 처절한 시대는 그들의 순연한 모습을 더욱 빛나게 만든다. 하지만 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제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현우가 잡혀가고, 교수가 된 윤희는 현우를 품었듯 현우 같은 시대를, 현우 같은 학생들을 품으면서 세월을 살아간다. 윤희는 현우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비혼모지만, 윤희에게 희생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것은 단지 자발적인 선택으로 보일 뿐이다. 윤희의 곁으로 시대가 스쳐가고, 윤희는 시대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시대를 품는다. 윤희가 조직으로부터 선도투쟁에 나설 것을 권유받은 제자 영작(윤희석)을 붙잡으며 말한다(의 주인공 주영작!). “인생 길어. 역사는 더 길어. 우리 제발 겸손하자. 너 그거 하지 마. 조직인지, 지랄인지”. 윤희의 말은 감독의 태도이며, 오늘이 어제에게 하는 충고다. 이렇게 은 여성의 목소리로 지나온 과거를 말한다. 시대의 중심에 남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대를 견뎌낸 사람들은 여성이었다고, 은 말한다. 그렇다고 남성을 조롱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우를 통해서 그들의 결단을 연민한다. 그렇지만 역시나 남자들은 언제나 철부지들이다. 그래서 영화 속 사진에서 남자들은 언제나 ‘학생복’ 차림으로 등장한다. 일제시대 독립투사였던 윤희의 아버지도, 80년대 운동가인 현우도 사진 속에서 청춘에 머물러 있다. 어쩌면 그들의 정신이 거기서 멈추었다는 시각적 표현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여자들은 나이든 모습으로 그들의 곁을 지킨다. 이렇게 성숙한 여인들이 그래도 철들지 않는 “당신을 사랑했다고 느낀다”고 말하는 것이 이다. 이러한 임상수식 여성주의는 그의 현대사 3부작을 관통하는 태도다. 그의 관점은 때때로 편한 결론처럼 보이지만, 달리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어 보인다.
은 때때로 양식화된 비판에 머문다. 17년 만에 출옥한 현우가 만나는 어제의 동지들은 이제는 더 이상 서로에게 동지들이 아니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다치고, 누구는 미치고, 누구는 출세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쓰면서 싸운다. 2000년대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자” “유물론” 운운하는 사람들, 자신의 출세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을 통해 지나온 시대의 가치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영악한 존재인지를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더 이상 새롭지 않고, 이제는 양식화된 비판에 머문다.
아름다운 영상 속 양식화된 비판
무엇보다 은 영상이 아름다운 영화다. 86년 ‘건대 사태’를 재연한 시위 장면을 유사 다큐멘터리처럼 잡아내고, 갈뫼를 동경하게 만드는 김우형의 카메라는 에 이어서 또다시 전진한다. 임상수 감독도 끝까지 눈물을 짜내는 멜로로 흐르지 않은 미덕을 발휘한다. 염정아의 또박또박한 연기는 한윤희와 염정아의 경계를 지울 만큼 단호하다. 1월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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