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눈을 잃고 재담을 얻다

등록 2006-12-21 00:00 수정 2020-05-03 04:24

수술 대신 무대를 택한 시각장애 재담소리꾼 백영춘씨 허봉사와 심봉사에 혼을 싣는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그것은 웃음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개그의 추억’이라 할 만했다. 한 남자가 “옛날에 점을 보라고 행상하는 장님이 있었는데 이런 모양을 했것다”라고 말한 뒤 뒤로 돌아 시각장애인 흉내를 내며 “무이수레, 에이 수레~ 복점이나 병점 보세요”라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여인네가 “그나저나 댁은 몇이유”라고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초가삼간 한 칸뿐이오”라고 하더니 “나이가 얼마냐구요”라는 말에는 “한 500냥쯤이지라고 되받아친다. 오래된 개그를 떠올리는 순간 사설은 소리로 이어지면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끌어올린다. 전통의 재담소리에 흠뻑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막힘 없이 터져나오는 익살에 멋들어진 소리가 어우러진 드라마였다. 서울 지역 재담소리의 올바른 전승과 보존을 위해 마련한 재담소리 토론회에서 공연할 의 한 대목이었다. 재담소리꾼 백영춘(서울재담소리보존회 회장)씨가 공연을 앞두고 막바지 리허설에서 부인인 최영숙(경서도창악회 이사장)씨와 함께 소리를 맞추었다. 백씨가 연습실 바닥에 세워놓은 징을 치려고 나무채를 잡는 데 애를 먹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다른 소리꾼의 연습 장면과 다를 게 없었다. 마치 소리와 연기로 객석의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한 무대 동작 같았다. 소리 인생 40여 년이 동작 하나하나에 배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각장애와 신장 투석의 고통

놀랍게도 백영춘씨는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다. 겨우 사물의 형체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백씨가 전맹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일주일에 세 번씩은 꼬박꼬박 병원에서 신장 투석을 해야 하는 환자이기 때문이다. 백씨의 소리에 대한 열정은 신체적 고통을 씻고도 남을 듯했다. “10여 년 전부터 당뇨를 앓았어요. 막 재담소리에 빠져들다 보니 소리꾼으로서 해야 할 일이 수두룩했어요. 그러다가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3년쯤 전부터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고 신장도 망가졌어요. 그런 장애도 소리꾼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지요.”

실제로 백영춘씨의 소리 인생에서 시각장애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때론 서울소리의 뿌리를 찾아 세우고자 하는 몸부림에 시력이 희미하게나마 되살아나기도 했다. 2002년에 경서도창악회를 설립한 백씨는 이듬해 창립 1주년을 맞아 기획공연 를 국립국악원 우면당 무대에 올렸다. 그 뒤 시력을 잃어가면서 2004년에 을, 거의 전맹에 가까웠던 지난해에는 를 공연했다. 경서도창으로 일가를 이룬 소리꾼이 사라져가는 서울 재담을 되살려 재담꾼으로 중심을 옮기려는 것이었다.

“처음 시력을 잃어갈 때 주위에서 수술을 권유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수술 효과를 장담하기 어려운데다 1, 2년을 쉬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소리꾼이 한창 때에 한 해라도 쉰다면 흐름을 이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소리꾼으로 무대를 오르려고 했어요.” 다행스럽게도 재담의 매력은 깊이 빠져들수록 장애의 고통이 사라지는 듯했다. 재담을 바탕으로 한 경서도 창무극 을 직접 만들어 무대에 올렸던 창작열이 솟구치기까지 했다. 무대에 오를 힘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은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누군가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은총’이라고 했던 것처럼.

대상 찾기도 어려웠던 재담소리 복원

도대체 재담소리가 무엇이기에 백영춘씨가 시력 회복 치료제로 삼았던 것일까. 재담소리는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익살과 해학으로 풀어가면서 소리와 연기로 관객과 호흡하는 민속극이다. 단순한 말장난을 주고받는 만담(漫談)과 비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재담에는 코믹한 촌극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말이다. 일부에서는 판소리가 재담소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문화재 전문위원 손태도씨는 “일정한 서사적 내용을 말과 노래로 교대하며 연희적으로 부른다. 이런 재담소리가 조선 후기에 생긴 광대소리 가운데 하나인 판소리의 성립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재담소리는 판소리가 정착되면서 전통 소리로서 자리가 흔들렸다. 여기엔 광대소리가 꼭두각시·줄타기 등과 같은 연행적 성격의 놀이와 묘기 중심으로 흐른 탓도 있었다.

다만 19세기 말 경기소리의 대가로서 탁월한 재담꾼이던 박춘재 선생이 과 등을 만들어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이 가운데 재담이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어 전승의 싹을 틔운 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물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자취를 감춘 재담소리는 복원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전통예술로서 재담소리가 로만 전승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영춘씨는 재담소리의 복원과 전승에 나섰다. 일제강점기까지 대중과 함께하며 인기몰이를 했던 소리극 형태의 공연물을 되살리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복원의 대상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백씨는 유성기판에 남아 있는 토막 소리를 모으고, ‘박춘재제’를 떠올리는 원로들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잊혀진 소리극을 재구성했다. 백씨의 숙성된 소리와 자연스러운 연기를 통해 전통적인 서울의 소리극을 대표하는 이 오랜 공백을 접고 되살아났다. 백씨가 재구성한 은 재담소리의 한 갈래인 이은관 선생의 과는 구별되는 모습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소리극을 하고 싶었어요. 경서도창에 담아내지 못했던 나만의 것을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우리식 ‘아니리’가 있는 재담소리를 무대에 올리는 기쁨을 어찌 잊겠습니까. 앞으로도 관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싶습니다.” 이는 경서도창 사범의 대표주자 반열에 오른 백영춘씨가 재담소리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30년 넘게 소리로 수련을 한 것도 재담소리를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재담소리의 기본을 소리에서 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씨는 1960년대 중반 한국방송 에서 심사위원으로 만난 경기소리 명창 이창배 선생에게 사사받았다.

복원 넘어 창작으로 솟구치다

지금도 복원을 기다리는 재담소리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문헌에 드러나지 않고 기억에서 사라진 재담소리를 복원하기는 어렵다. 백영춘씨가 새로운 재담소리를 창작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때론 시각장애가 도움이 되기도 한다. 눈으로 보지 못하는 무대를 꿰뚫는 안목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재담소리 을 공연할 때 허봉사 역할을 많이 맡아 시력을 잃었다고 우스갯소리도 합니다. 앞으로 심봉사가 나오는 을 새롭게 해석해 재담소리로 엮으려고 합니다. 시력은 잃었지만 기력은 오히려 예전보다 나아요. 오래오래 재담소리꾼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