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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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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팜므파탈을 연기하고 싶다

등록 2006-12-07 00:00 수정 2020-05-03 04:24

당당하게 Mr.로빈 꼬시기에 나선 상냥한 정화씨와의 솔직토크…가수의 무대엔 ‘환상’을 담고 영화 캐릭터에는 ‘나’를 드러낸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마침내 엄정화를 만났다. ‘댄싱퀸’을 알현하려 나름대로 삼고초려했다. 지난해 영화 , 올해 9집 음반 (Prestige)가 나왔을 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엄정화는 너무나 바빴다. 그래도 583호(2005년 11월08일치)에 ‘엄정화여, 더 도발하라’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으니, 인터뷰는 엄정화 시리즈의 속편인 셈이다. “Mr.로빈 꼬시기”(상자기사 참고)에서 로빈(대니얼 헤니)을 ‘꼬시는’ 민준 역을 맡은 엄정화를 만났다. 그리하여 상냥한 정화씨의 솔직한 대답을 비로소 전한다.

"꿈꾸던 사랑이 꿈만은 아닐 거야"

“Mr.로빈 꼬시기”라는 시나리오에 끌린 이유는?

=일에서 성공하고 가족의 사랑도 받지만, 정작 자신이 원하는 사랑에서 실패하는 여성의 얘기고, 어쩌면 나도 그러니까. (웃음) (관객에게) 꿈꾸던 사랑이 꿈만은 아닐 거야, 희망을 주고 싶었다.

민준은 연애 상대에게 주기만 하는 캐릭터다. 민준이 실제 엄정화씨와 비슷한가. 여우가 되려고 꾸준히 노력은 하는데, 완전히 여우가 되지는 못하는 사람.

=내 속에 곰이 있다는 건가? (웃음)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 공감하는 민준의 대사가 많았다.

의 동미, ()의 혜진, “Mr.로빈 꼬시기”의 민준까지 일관되게 가수 이미지와 다른 ‘푼수기’가 있다.

= 나 같은 시나리오를 고르는 건 아니지만, 섹시하기만 하기보다는 사람 냄새 나는 캐릭터가 좋다. 그런 취향이 있는 것 같다.

“Mr.로빈 꼬시기”에는 “니가 내 엄마냐?”라는 대사도 나온다. 헌신적인 민준이 오히려 애인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이다. 엄정화는 ‘뜻밖에’ 누군가를 보살피는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다. 에서는 친구를, 에서는 아이를 보살폈다. 이렇게 섹시한 가수 이미지는 영화에서 거두고 돌보며 당당한 여성의 이미지로 변주된다. 예전의 기사에 이렇게 썼다. “엄정화는 두 개의 얼굴을 지녔다. 가수 엄정화가 ‘팜므파탈’에 가깝다면, 배우 엄정화는 ‘자립 여성’에 어울린다. 어쩌면 엄정화의 얼굴은 세 개다. 영화배우 엄정화는 발랄한 독신 여성이지만, 탤런트 엄정화는 조신한 여성에 가깝다.” 엄정화에게 듣는 엄정화의 이미지.

배우, 가수로 이미지가 다르다.

=절대로 같길 원하지 않는다. 가수 엄정화는 색깔이 분명하다. 그 색깔을 지키면서 발전시키고 싶다.

가수로서 이미지가 퍼포먼스에 가깝다면, 영화 속 캐릭터는 당신의 취향에 가까운가?

=가수로서 퍼포먼스는 나의 환상이 많이 들어간, 말 그대로 퍼포먼스다. 영화는 캐릭터 속에서 내가 표현된 것이고.

섹시함과 귀여움의 황금비율

그가 주연한 ‘본격’ 로맨틱 코미디는 과 “Mr.로빈 꼬시기” 두 편이다. 제목에 공히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들어간다. 하지만 에서 홍반장을 ‘짠’ 하고 나타나게 만드는 ‘누군가’가 중요하다. 그것이 엄정화의 혜진이다. 그리고 “Mr.로빈 꼬시기”에서도 로빈을 ‘꼬시는’ 주체는 민준이다. 이렇게 제목은 배우 엄정화의 능동성을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고 있다. “Mr.로빈 꼬시기”의 또 다른 공통점은 섹시함과 귀여움이 황금비율에 가깝게 캐릭터에 녹아 있다는 것. 예쁘지만 너무 예쁘진 않고, 섹시하지만 야하지는 않은 자연인 엄정화는 캐릭터에 현실감을 더한다.

배우로서 30대 커리어우먼 이미지가 강하다.

=고집한 것은 아니지만, 주어진 것 안에서 고른 것이 그렇게 됐다. 내 취향이 반영된 거겠지.

“Mr.로빈 꼬시기”에서도 민준이 연하의 남자친구와 헤어지면서 ‘이제 누나라고 불러’라고 하는 대사가 나온다. 민준뿐 아니라 동미, 혜진 캐릭터도 연인과 관계(나이든, 직업이든, 정서든)에서 우위에 있거나 최소한 평등하다.

=그 대사는 통쾌했다. ‘밥값도 니가 내’라는 대사는 애드리브였다. 당당한 30대의 삶을 연기하는 것이 좋다.

예전에 “그는 90년대 한국 공중파 방송이 허용하는 최대치의 팜므파탈이었다”고 썼다. 그는 1993년 로 데뷔해서 2006년 까지, 9장의 정규음반을 발표한 관록의 가수다. 하지만 한국에서 섹시한 댄스 여자가수로 나이 들어가기만큼 ‘미션 임파서블’도 드물다. 엄정화는 “음반을 낸다면 주변에서도 ‘이번엔 발라드겠지’ 한다”며 “시사회 때도 ‘아직은 괜찮아요’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말했다. “내가 참 뭐랬나, 노~장, 그런 게 힘들다”고 덧붙이는 얼굴에는 답답함이 묻어 있다. 2004년 음악적 모험을 시도한 8집 음반 (Self Control)이 히트를 ‘치지는’ 못했지만, 2006년 꿋꿋이 로 돌아왔다. 여전히 섹시한 퍼포먼스와 함께.

서른 넘은 섹시 여가수, 와이 낫?

섹시한 여가수의 최전선이면서 최장수다. 나이듦에 대한 불안은 없나

=인터뷰하면서 나이, 불안감 물어보니까 생각하게 되는 거지. 보통 때는 생각 안 한다. 그런 질문에 기운도 빠지고. 그렇다면 여기서 서른을 넘은 여가수들은 표현 방식을 조신하게 맞추거나 없어져버려야 되는 건지.

30대 여성들이 섹시한 엄정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자신의 좌절된 욕망을 대신해주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너무 신난다. 와이 낫?(Why not?). 이건 정말 쇼다, 쇼. 그냥 즐겼으면 좋겠다. 왜 자꾸 같아지라고, 맞추라고 하는지.

이번 음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냥 소문이었다. 그런 말한 적 없다. 다음 음반이 참 막연하기는 하다, 사실은.

한국 대중음악의 딜레마가 있다. 음반시장 불황도 문제지만, 음악 수준도 갈수록 세계 시장과 멀어진다는 느낌이다. 8집, 9집은 팝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지만, 대중은 어려워한다.

=아쉽기도, 어렵기도 하다. 사실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은 이것이다, 딱 (정해져) 있다. 답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지 않나. 다시 이런 음악도 있어요, 이런 무대도 있어요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이제는 어차피 가수활동은 즐기면서 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예전에는 인기를 의식했다. 이제는 많이 놓았다. 내가 즐기고, 사람들이 신났으면 좋겠다. 그런데 가끔은 신나지 않는다. 음악적 시도보다 의상 논란, 이런 것이 중심이 되니까. 콘서트도 했으면 좋겠는데….

예전에 작곡가 주영훈이 엄정화의 콧소리가 최고라고 했다. 애착이 가는 곡은?

=(Poison). 처음 전주를 들을 때, 너무 트로트 같은 거 아냐 했다. 딴따라따라따라딴따다~ 지금 들어도 에지(edge)가 있다. 도 좋다.

한국의 마돈나로 불리기도 한다.

=마돈나는 너무나 좋아하는 가수다. 하지만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환경도, 시장도 너무나 다르니까. 내게는 따라갈 선배가 없다. 내가 뭔가 길이 됐으면, 그래서 후배들에게 역할모델이 됐으면 싶다. 여기서 위축되고 포기하면 또 엄정화란 가수는 없어질 테고, 서른 넘은 여가수들은 또 나 같은 문제에 부딪힐 테고, 결국은 20대 가수밖에 없을 테고.

‘게이 아이콘’과 게이의 로맨스

엄정화는 한국의 ‘게이 아이콘’이다. 다시 예전의 기사 리플레이. “가수 엄정화의 전성기는 한국에서 게이클럽이 막 생겨났던 시기와 겹쳤다. 당시 게이클럽에서 엄정화는 가장 자주 플레이되는 가수였다. 그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그의 춤동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군무’가 펼쳐졌다.” 그렇게 1990년대가 흘렀다. 21세기에는 게이들의 엄정화에 대한 짝사랑에서, 엄정화와 게이들의 로맨스로 바뀌었다. 엄정화는 9집 음반을 내고 가장 먼저 게이클럽에서 공연을 했다. 엄정화는 전부터 게이클럽에 나타나곤 했다.

한국의 게이 아이콘인 줄 알고 있었나.

=예전엔 몰랐다. 이태원 (게이클럽) 출입을 하면서 알게 됐다. 가면 너무 반가워하고, 내 음반을 너무너무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났다. 기분 좋았다. 원래 굉장히 트렌디하고 스타일리시한 사람들 아닌가. 그래서 이들이 좋아하면 괜찮은 음반이 아닐까 싶어서 거기서 첫선을 보였다.

혹시 필요하면 그들에 대해 지지 발언을 할 생각도?

=도움이 되고, 할 수 있다면. 그건 내추럴한 거 아닌가.

가수 엄정화가 가지고 있는 팜므파탈의 이미지,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무섭도록 섹시한 역할도 해보고 싶다. 그런데 너무 귀여워서 될지 모르겠다. (일동 웃음) 정말 걱정이다. 자꾸 귀여운 게 나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하면서도 섹시한 팜므파탈 역할, 어떤 느낌일까 너무 궁금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떤 생각을 할까. 너무 기대된다.

운이 좋다는 생각도 든다. 90년대 중·후반 가요가 전성기일 때 가수로서 전성기를 보냈고, 한국 영화가 잘되기 시작하면서 영화계에 자리 잡았다.

=어떤 분은 교묘하게 옮겨갔다고도 한다. 정말 그때그때 주어졌을 뿐이다. 진짜 행운이다.

다른 30대 비혼 여성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에게 알맞은 시간, 알맞은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가끔은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오늘을 산다. (정말로?) 어떨 때는, 그렇게 논다. (일동 웃음) 외롭지만 또 기대한다. 이놈~ 언제 나타날지 보자!

원래 쾌활하고 낙천적인가?

=원래는 내성적이고 우울한 편이었다. 밝게 변했다.

성공이 그렇게 만들었나?

=열망했던 것이 결국은 왔으니까. 생각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느꼈다. 가끔씩 힘들어~ 하다가, 어머~ 죄송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 아싸~ 라고 해야지!



“어디 나부터 한번 꼬셔보시지?”

헤니가 있어 용서되고, 엄정화가 있어 웃는 “Mr.로빈 꼬시기 ”


“Mr.로빈 꼬시기 ”는 제목을 보면, ‘로빈 헤이든’을 맡은 대니얼 헤니의, 대니얼 헤니를 위한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끌어가는 힘은 헤니 못지않게 엄정화에게서 나온다. 엄정화가 연기하는 민준은 외국계 인수·합병(M&A) 회사에 다니는 30대 여성이다. 직장 번듯하고 스타일 좋지만, 연애만은 젬병. 보도자료에 따르면, “매력은 A+, 연애실력은 F”. 민준은 홍콩에서 애인에게 바람을 맞고 돌아와 첫 출근을 하던 날, 자동차 접촉사고를 낸다. 하필 상대는 그가 다니는 회사에 새로 온 사장님(CEO) 로빈. 로빈은 “스펙이 화려하다”. 하버드 출신에 5개 국어 능통, 다국적 기업의 차세대 CEO감. 로빈을 8등신 미남에 왕자 근육의 헤니가 연기하니 당연히 ‘섹시 가이, 쿨 가이, 로맨틱 가이, 퍼펙트 가이’가 나올 수밖에. 로빈은 민준을 추진 중인 M&A 사업의 어시스턴트로 낙점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관계는 시작된다. 민준은 로빈에게 일보다는 연애를 배운다. 로빈은 진심이 연애의 전부라고 믿는 민준에게 연애는 권력의 게임이라고 가르친다. 로빈의 강의에도 민준의 연애술은 여전히 낙제다. 핀잔을 주던 로빈은 “어디 나부터 한번 꼬셔보시지?”라고 말하고, 민준의 로빈 꼬이기는 시작된다. 민준이 로빈을 꼬이기 위해 벌이는 좌충우돌인 뻣뻣한 로봇춤 추기, 도시락 쏟으며 자빠지기 등은 영화를 끌어가는 힘이자 재미다. 엄정화는 말 한마디에 상처를 새기고, 눈빛 한 번에 귀여움을 담는 연기를 선보인다.
“Mr.로빈 꼬시기 ”는 동화 같은 이야기에 백마 탄 왕자님이 나오는 현실감 떨어지는 로맨틱 코미디다. 이야기 구조도 탄탄하지 못하다. 그래도 헤니가 있어서 용서되고, 엄정화가 있어서 웃는다. 몇 가지 발견도 있다. 외국인과의 사랑을 그린 첫 로맨틱 코미디, 민준의 엄마로 나오는 오미연의 재발견, 한강 유람선이 이토록 로맨틱했던가 하는 서울의 재발견. 12월7일 개봉.
엄정화 필모그래피: (2006), (2006), (2005), (2004), (2003), (2001),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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