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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열등감’을 전시하는가

등록 2006-11-18 00:00 수정 2020-05-03 04:24

광주·부산·베이징·싱가포르에서 동시 진행되는 아시아 비엔날레…서구식으로 채색된 ‘아시아적 사유’와 관료들의 몰이해로 빛 잃어

▣ 오현미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사

지금 아시아는 비엔날레로 시끌벅적하다.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비엔날레만 해도 광주와 부산, 중국 상하이, 싱가포르 이렇게 4개이다. 비엔날레는 원래 2년을 뜻하는 단어지만, 1895년 베네치아시에서 이탈리아 국왕의 결혼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하기 시작했던 미술전시회의 공식 명칭으로 ‘베니스 비엔날레’가 채택되면서부터 그 이후 생겨난 격년제 국제 미술전시회에 거의 자동적으로 따라붙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비엔날레가 국제적인 미술행사를 뜻하는 대명사처럼 사용된 것인데, 그 비엔날레가 대한민국 광주 땅에서 열리면 ‘광주비엔날레’, 부산 땅에서 열리면 ‘부산비엔날레’가 된다.

이 아시아 대륙에서 거의 ‘열풍’처럼 일고 있는 비엔날레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것인가? 최소한 아시아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는 미술작품을 통해 아시아 사람들이 서로 연대하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구체성을 더하기 위해서는 광주와 부산에서 열리고 있는 비엔날레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허백련의 산수화와 ‘쓰레기’

광주에 진 역사적·정치적 부채를 갚고자 하는 동기에서 첫 회에 200억원 이상을 투입해 시작했던 그 광주비엔날레, 올해로 6회째를 맞았는데 ‘아시아적 사유 담론과 미학’을 주제로 삼았다. 음악이 연방 흘러나오는 비엔날레관의 앞마당을 지나 ‘신화와 환상’ ‘자연과 몸’이라는 소주제를 단 제1전시장으로 들어가자마자 마주치는 것은 의재 허백련의 산수화를 원형으로 삼아 작업한 황인기의 디지털 산수화이다. ‘아시아성을 찾고자 하는 예술적 실천이 시작부터 이렇게 인습적인 동양적 이미지로 제시되다니’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순간이었다. 초입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서 널려 있는 불상들과 중국 고대의 4대 미녀에 대한 이야기를 서구 역사화 스타일의 사진 버전으로 세련되게 바꾼 작품들을 보면서 ‘아시아성=전통’이라는 도식이 더욱 선명해졌다. 이것은 서구인들이 보는 아시아에 대한 환상이 이런 식으로 아시아인의 의식에 다시 투사돼 나온 장면과 다를 바 없었다.

같은 의재 허백련의 작품을 원형 삼아 제작한 수빙(중국)의 작품은 불투명한 하얀 아크릴판을 통해 비친 형광등 불빛으로 그럴싸해 보이는 허백련의 산수화를 보여주는데, 뒷면을 보는 순간 우리는 신비한 분위기의 산수화가 사실은 폐허 같은 짚더미와 쓰레기로 이루어졌음을 목격하게 된다. 오히려 이러한 작품을 통해 관람객은 ‘전통에 기대 아시아를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은 폐허 위에서 머뭇거리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른바 작품을 통해 현재의 아시아를 지시하는 아시아성에 대한 사유가 촉발되는 계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제2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좀더 구체적인 사유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라오스 출신 작가인 봉 파오파니트가 설치한 를 만나면 우리는 언어가 아닌 물질을 통해 전해지는 아시아적 정신성을 마주하게 된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인들의 일상이 시적으로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전시의 후반부를 지나 동시대 아시아를 이야기하는 섹션에 이르면서 인류학적 기록물 스타일의 작품들을 많이 보게 된다. 지적이지만 차갑고 날이 서린 다큐먼트들은 아시아의 현실을 중립적인 듯 보이도록 하지만 서방 국가들에 견줘 힘의 불균형 상태에 놓여 있는 아시아 국가들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의미를 획득한다. 그리고 우리는 비엔날레에서 이러한 스타일의 작품들과 자주 만나게 되는데, 이렇게 비엔날레라는 허용된 장에서 만나는 비엔날레 스타일의 정치적 작품들은 오히려 그 효과가 반감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비엔날레라는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중층적 이해관계와 그 동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 누드에 속옷을 입혀라”

비엔날레를 개최하는 도시는 비엔날레 효과를 원한다. 수치로 측정되는 관람객 수를 통해 성과를 매기고 그 통계가 관광수익을 내는 것으로 이어져 도시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이익을 창출하는 것. 이것이 개최도시 관료들이 목표하는 바이다. 따라서 비엔날레는 문화의 자율성과 예술적 발언의 자유를 실천하는 장이 되는 것에는 성공할 수 없는 구조 속에 있다. 그 단적인 예로 광주비엔날레가 개막한 초기에 독일과 노르웨이에서 온 마이클 엘름그린과 잉가 드라그세트의 이 동성애자의 이미지를 선정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주최 쪽이 관람을 통제한 사건을 들 수 있다. 물론 나중에는 그 ‘출입금지’가 해제되긴 했지만 이는 결국 허용된 선 안에서만 발언을 허가하고 있음에 대한 반증이다. 또한 이런 구조는 부산비엔날레에서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올해로 3회를 맞이하는 부산비엔날레는 ‘어디서나’를 주제어로 삼아 ‘현대미술전’과 ‘바다미술제’로 구성되어 있다. 도시를 비엔날레의 화두로 삼고 있는 부산비엔날레는 해운대 곳곳에서 작품과 만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류병학씨가 전시감독을 맡았던 ‘바다미술제’는 해운대 백사장과 해변도로에 27점의 작품을 설치하는 ‘퍼블릭 퍼니처’전과 SK로부터 12억원을 후원받아 지은 모델하우스에서 열리는 ‘리빙 퍼니처’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매개도 없이 현장에서 관람객과 직접 만나는 형식의 바깥미술에 대한 창작자와 수용자 쌍방의 의사소통 부재와 몰이해로 생기는 잡음이다. 그 잡음 중 하나가 ‘리빙 퍼니처’전이 열리는 SK파빌리온 외벽에 설치된 클라우스 포비처의 <w->인데, 이 작품은 원래 누드였지만 개막식 날 누드라는 이유로 경찰청의 철거 통보를 받고 부랴부랴 속옷을 입혀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러한 지역 관료들의 몰이해와 동시에 아시아 비엔날레들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것은 서구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을 서구 비엔날레와 비슷한 형태의 미술행사를 개최함으로써 극복하고 있다고 믿는 자족감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사를 개최할 자본과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서구와 동등한 지위를 누리려는 열망이다. 이 열망은 ‘세계화’ 혹은 ‘국가경쟁력’이라는 이름과 동일시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맞지 않는 모자를 쓰고 있다 하더라도 누구도 함부로 모자를 벗으라고 말하기 어려운 기이한 억압 상태에 놓여 있다. 마치 황우석의 사기극을 사기라고 발언한 순간 국가적 매국노처럼 취급당했던 그 억압적이고 폐쇄적 정서와 잇닿아 있다고 할까.

고유의 환경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자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각기 다른 현실 속에 놓인 아시아 국가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환경과 조건을 긍정적으로 포용하지 못하고 경쟁하듯 열고 있는 비엔날레가 진정으로 아시아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고 이에 대한 소통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서구를 우리의 발전 모델로 설정해놓고 있는 한, 지금의 모습에서는 결코 ‘예스’라는 대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설정 안에는 아시아가 문화적 열등감을 박차고 나갈 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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