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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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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눅들지 말고 댄스 댄스 댄스!

등록 2006-10-21 00:00 수정 2020-05-03 04:24

대중과의 호흡을 외치며 ‘플라스틱 주’ 결성한 젊은 안무가 주정민씨… 영상과 몸짓을 대화를 선보인 가 아트마켓을 겨냥하는 이유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우리 춤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젊은 안무가 주정민(26)씨에게 던지는 것은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다. 삶의 흐름에 예정된 경로가 없듯이 몸에서 나오는 동작도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소용돌이에서 나오는 모든 동작이 그에겐 춤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의 몸짓은 끊임없이 대화를 갈망한다. 비단 몸짓을 통한 사람과의 소통만을 바라는 게 아니다.

오래된 책장 사이에 끼어 있던 고전의 주인공을 만나 대화를 시도하고,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자기증식을 꾀하는 영상물에 말을 건네기도 한다. 모든 게 몸짓을 통한 소통의 도구가 되는 셈이다.

지난 10월10일 오후 내내 주정민씨는 서울 역삼동에 있는 소극장 LIG아트홀에서 가상의 물체 ‘큐브’를 만나 자신과의 소통을 꾀하고 있었다. 국제무용협회가 주관하는 제9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의 젊은 안무가 지원 프로그램인 ‘젊은 무용가의 밤’에 선보일 의 리허설이었다. 이 작품은 지난 10월11일부터 나흘 동안 열린 2006 서울아트마켓(PAMS)이 해외 진출 주력작품으로 선정한 ‘팸스 초이스’ 29개 작품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그가 이날 무대를 즐기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애당초 내년에 선보일 작품으로 기획했는데 갑작스럽게 공연을 준비해야 해서 한가위 연휴도 무대에서 보냈어요.”

춤으로 재탄생한 ‘이상한 앨리스’

사실 주정민씨는 무용 전공자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뒤 올해 들어서 늦깎이 무용 전공 대학원생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국내에서 주목받는 안무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타고난 ‘끼’와 잠재적 ‘욕구’ 때문이었으리라. 물론 배움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현대무용가 류석훈씨가 이끄는 댄스컴퍼니에서 대중과 호흡하는 춤의 기본기를 다졌다. 무용과 연극·미술·영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과 함께 소통의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아메리칸 댄스 페스티벌’이 선정하는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와 뉴욕 등지에서 현대 무용의 새로운 경향을 익혔다.

“현대무용이 어렵다는 편견이 심하잖아요. 예술춤이라는 말에 대중들이 주눅들기도 했어요. 중요한 것은 대중과 호흡하는 몸짓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플라스틱 주’라는 무용 관련 프로젝트 그룹을 꾸렸어요.” 그것이 지난해 4월의 일이다. 그룹이라고 해봐야 회원은 고작 4명뿐이다. 연출과 대본을 맡은 박종각씨, 안무를 하는 이미리씨, 음악을 맡은 박소연씨 등이 함께하고 있다. 그를 빼고 모두 서른두 살 동갑내기들이다. 소통의 끈은 나이의 차이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먼저 대본을 제시하고 몸짓을 떠올리긴 해도 완성본은 서로의 뜻을 모은 결과물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이맘때 주정민씨는 플라스틱 주라는 이름을 내건 공연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다. 서울 신촌 포스트극장에서 이틀 동안 공연한 였다. 영국의 작가 루이스 캐럴의 장편동화를 모티브로 무용 대본을 만든 것이었다. 물론 동화의 캐릭터만 빌려왔을 뿐 전혀 다른 내용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대본을 쓴 박종각씨는 “처음 대본을 쓸 때도 동화를 각색하는 식은 아니었는데…”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다시 대본을 수정하는 작업을 함께하면서 캐릭터만 남기고 전혀 다른 내용의 대본을 완성했어요. 여기에 미디어 아티스트가 결합해 내러티브가 있는 영상을 곁들이니까 우리만의 작품이 되었어요.”

춤추며 외쳐라 “더불어!”

그야말로 플라스틱 주에 의한 ‘앨리스의 이색적 변신’이었다. 이전에도 국내에서 춤에 영상을 접목하는 시도는 더러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영상과 춤을 인위적으로 묶는 데 머물고 말았다. 이에 견줘 플라스틱 주의 시도는 영상과 몸짓이 직접적인 소통을 꾀하는 양상이었다. 추상적인 영상을 구체적인 몸짓으로 풀어내는 플라스틱 주의 솜씨는 예사롭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독립 무대예술의 자유로운 표현과 형식을 실험하는 프로젝트 그룹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어쩌면 플라스틱 주의 다양한 실험은 미술의 눈으로 춤을 바라보는 주씨의 안목이 밑바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플라스틱 주의 시작은 무용계 안팎의 관심을 모았다. 이어서 2편에 해당하는 를 준비했다. 이 작품은 지난 7월28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지금 여기: 김수근’전의 폐막작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 8월 한 달 동안 플라스틱 주는 문화소외 지역을 떠돌았다. 트러스트 무용단에 합류해 전남 곡성과 경남 거제 등지에서 ‘2006 찾아가는 문화행사’ 여름 순회공연을 진행했다. 이 경험은 무대공연에 익숙한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 플라스틱 주의 안무가 이미리씨는 “다양한 무대효과를 대신하는 관객들의 열기를 경험했다. 우리가 대중을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을 배웠다”고 말한다.

이런 1년여 동안의 경험 속에서 잉태된 는 무용을 보는 ‘재미’를 안겨주었다. 아트센터 나비의 미디어아티스트가 작업한 큐브의 영상물이 눈빛으로 말을 걸면 주정민·이미리씨 등의 무용수들이 몸짓으로 답을 하는 식이었다. 때로는 커다란 동작에 미세한 표정이 더해져 장르의 경계를 허물기도 했다.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는 “더불어” 같은 대사는 외마디로 작품의 의도를 전하고 있었다. 큰 큐브가 다수라면 작은 큐브는 소수를 대변했다. 는 28분의 공연 시간 동안 서로를 인정하고 보듬으며 살아가는 세상을 웃음으로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

"젊은 춤꾼들이 작품 많이 만들었으면”

이제 플라스틱 주는 해외 무대에서 관객을 맞이할 길이 어렴풋이나마 열렸다. 서울아트마켓이 열리는 동안 아르코미술관에 마련한 부스에서 30개국에서 참가한 120여 명의 공연예술 관계자를 만나고, 팸스 초이스 선정작으로 앞으로 3년 동안 해외 홍보와 마케팅 등을 지원받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쌈짓돈을 털어 단체 안내 브로슈어와 동영상 자료까지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플라스틱 주의 회원들은 해외 관객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다. 국내 관객과 소통하는 작품을 만들면 해외 관객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들은 재미와 소통의 맛을 알고 있었다.

“젊은 춤꾼들이 작품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생각만큼 무대에 올리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지도 않아요. 누구든 시도하면 도움을 받을 방법을 찾을 수 있어요.” 프로젝트 그룹을 꾸려 1년여간 작업한 플라스틱 주 사람들이 ‘후배’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이들은 플라스틱 주의 다음 작품을 생각하면 다른 작품의 대본을 쓰고, 안무를 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수고를 마다할 수가 없다. 의 막이 내리고 직·간접 제작비 300여만원을 4분의 1로 나누는 일이 남았다. 만일 플라스틱 주가 내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아시아 아츠마트의 프로젝트인 ‘인터아츠’에 쇼케이스를 선보여야 한다면, 젊은 무용인들이 비행기를 탈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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