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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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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다의 고뇌도 봐주실래요?

등록 2006-10-21 00:00 수정 2020-05-03 04:24

영화 를 보고 걱정에 잠긴 패션 기자…이해할 수 없는 결말로 ‘패션계의 허영’ 타령 나오지나 않을까

▣ 심정희 <w korea> 패션 에디터

원작 소설만 믿고 영화를 보기도 전에 덜컥 원고 청탁을 수락하고 말았는데, 뒤늦게 본 영화는 내가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패션과 패션잡지에 대한 이야기(그 이야기라는 것이 주로 ‘폭로성 멘트’들로 채워져 있긴 했지만)가 주인공 역할을 했던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 패션은 ‘재미를 주는 조연’ 역할에 불과했고, 그것이 영화의 재미에 기여하는 양상 역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입던 옷 다 던져버리고 떠나다니…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영화 는 어쩌다 패션잡지에 몸담게 된 젊은 여성이 이전까지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유형의 인간들을 만나고, 그 안에서 갈등하고, 점차 적응해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편집장 미란다 프리스틀리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그려지고, 그녀의 그런 행동에 대해 화자 ‘나’가 끝없는 불만을 늘어놓았던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는 미란다를 훨씬 더 매력적이고 인간미 있는 캐릭터로 그려내고, ‘앤디’ 역시 별다른 불평 없이 미란다와 미란다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적응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앤 헤서웨이의 변신 과정(그녀는 ‘수더분한 공부벌레’ 스타일에서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베스트 드레서로 ‘짜자잔~!’ 하고 변신하는데 그 과정이 어찌나 급작스러운지 ‘과연 몇 주 사이 저런 일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쏠쏠한 재미를 느끼는 이가 꽤 있을 것 같고, 에서 ‘그저 그런 엄마 역할’에 머물렀던 메릴 스트립의 우아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극장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소재와 주제를 막론하고 영화에는 어떤 식으로든 시작과 끝이 분명한 로맨스가 똬리를 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 영화에 얼마나 만족할지는 의문이다(앤 헤서웨이의 상대 캐릭터들은 비실비실하기 짝이 없는데, 사이먼 베이커는 느끼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의문은 패션잡지를 만드는 사람들과 패션과의 열애에 빠진 사람들이 과연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점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 갭 스타일의 코발트 블루 니트 스웨터 차림으로 화보 촬영을 위해 비슷해 보이는 벨트 두 개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미란다 무리’를 보며 앤 헤서웨이가 ‘도무지 그런 고민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식의 표정을 지었을 때 미란다가 했던 말(“우리의 선택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해낸다”)을 비롯해, 메릴 스트립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최고의 패션잡지를 만들기 위한 숨은 노력과 패션산업에 대한 책임감이 언뜻언뜻 드러나긴 하지만, 이 영화의 결말은 쉬이 납득되질 않는다.
미란다가 “내가 지금껏 겪은 어시스턴트 중 최고였다”고 평가하는 에밀리는 결국 패션잡지를 떠나고(반면, 칠칠치 못한 전임 비서는 그 자리를 지키려 애쓰고), 그렇게 떠나면서 자신이 에 일하면서 입었던 옷들을 모두 전임 비서에게 선물로 줘버린다. 이 영화의 이런 결말이 혹여나 ‘패션잡지에서 남는 건 결국 생각 없고 허영만 가득한 여자들’이라는 생각을 관객에게 심어주게 되지는 않을까? 자신을 변신시켜줬던 옷들을 아무렇지 않게 몽땅 선물해버리는 앤 헤서웨이의 행동이 ‘옷에도 혼을 담는다’는 생각으로 옷을 만들면서 패션을 인생의 전부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혹여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결국 이 영화 자체가 ‘패션’을 눈요깃거리 정도로 여기고, 패션계를 ‘생각 없는 여자들의 이전투구 장소’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화가 개봉되고 나면, 영화를 본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시각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하게 되겠지만 부디 “거봐, 결국 패션계는 다 골 빈 여자들뿐이었잖아!” 같은 평들로 웹사이트들이 도배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프라다에서 단 두벌만 협찬한 이유

“패션기자만이 쓸 수 있는 영화 감상평”을 특히 강조하던 담당기자의 목소리가 떠올라 조금 덧붙이자면, 이 영화에서 앤 해서웨이가 입고 나오는 옷은 거의 대부분 샤넬에서 협찬했고,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메릴 스트립이 입은 옷은 단 두 벌 정도가 프라다 제품이다.


영화 제작자 쪽에서는 메릴 스트립이 입는 모든 옷들을 프라다에서 협찬받고 싶어했으나 영화 속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실제 모델인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릴 것을 저어한 프라다 쪽에서 거절했다는 소문(소문의 사실 여부나 근거는 명확지 않다)이 패션계에서는 나돌고 있는 상태. 이쯤 하면 ‘패션’을 소재로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만족할 만한 영화평이 되려나. 암튼 많이들 보시라. 100명보다는 1천 명, 1천 명보다는 1만 명, 1만 명보다는 10만 명의 관객이 본다면, 앤 해서웨이의 옷차림 변화뿐 아니라 ‘미란다의 고뇌’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역시 그에 비례해 늘어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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