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내가 반해버린 문장]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등록 2006-10-13 00:00 수정 2024-11-04 14:39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이십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시전집> 김수영 지음, 민음사 펴냄)

지식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단연 김수영이다. ‘B급 좌파’ 김규항은 읽는 책은 없지만 권할 책이 있다면 김수영 시집이라고 했다.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50원짜리 갈비탕에 기름 덩어리만 넣은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만 하는’ 김수영의 반성은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지식인들에게 와 꽂힌다. 좋은 말로 성찰, 나쁜 말로 자위. 김수영은 이념의 진보성과 삶의 보수성 사이에 놓여 있는 이 땅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나도 그랬다’고 말한다. 그래도 되는 것일까. 김수영으로부터 50년. 아직도 김수영을 방패 삼아 ‘김수영도 그랬으니 나도 괜찮다’고 자위만 해도 되는 것일까. 스타벅스에 앉아 김수영과 <B급 좌파>를 읽다 의자에 바늘이 돋은 것처럼 불편해졌다.

한겨레 저널리즘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