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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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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녀들, 칠공주네에서 숨막히다

등록 2006-09-30 00:00 수정 2020-05-03 04:24

주말 드라마의 극과 극, 문화방송 과 한국방송 … 여자의 경제적 독립과 욕망을 그린 코믹스릴러와 가부장적 통속극 너무 다르네

▣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

“내가 니 애비다.” 영화 에서 다스베이더가 아들 루크에게 이 말을 하자 루크는 단번에 무너진다. 지금까지 죽도록 싸운 아버지와 화해할 것인가, 끝까지 싸울 것인가. 죄를 지은 것은 아버지지만, 고뇌하는 것은 자식이다. 루크가 아버지와 싸우건 화해하건, 그는 아버지란 존재에 매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요즘의 어떤 아버지들은 자식을 자식이라 부르지 못한다.

‘하늘 같은 남편’은 매우 괜찮은 남자?

문화방송 의 정석(정웅인)과 한국방송 의 나양팔(박인환)은 자식에게 ‘아버지’로 인정받기 위해 고심한다. 정석은 친아들 정현준(김범)에게, 나양팔은 평생 그를 아버지로 알았다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나설칠(이태란)에게 다시 아버지가 되길 원한다.

그런데 이들이 아버지로 인정받으려 하는 과정은 상반된다. 정석은 자신이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사실에 기대 정현준이 아들이라고 말한다. 반면 나양팔은 친아버지가 아님에도 나설칠을 길렀기 때문에 자신이 아버지라고 말한다. 이들 중 “내가 니 애비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친아버지가 아니라 양아버지다. 정석은 모든 걸 잃을까봐 송미주(유호정)와 김은영(임지은)의 눈치를 보며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나양팔은 출생의 비밀을 안 나설칠이 집을 나간 데 충격을 받고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나설칠을 애타게 찾는다. 한 남자는 자신의 안위 때문에 아들을 찾지 못하고, 다른 한쪽은 아버지가 딸을 찾지만 딸이 아버지를 거부하려 한다. 그만큼 과 는 전혀 다른 세계를 그린다.

이 두 드라마에는 모두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아버지와 자식이 있고, 네 명의 여성이 주연으로 출연한다. 그러나 두 드라마의 차이는 ‘발칙녀’들이 사는 고급주택과 칠공주 가족이 사는 서민주택만큼이나 크다. 은 남녀관계에서 상당 부분 여성이 우위에 선다. 정석은 송미주의 허락 없이는 정현준에게 접근하기도 힘들고, 결혼생활도 김은영이 돈을 다 가지고 있어서 늘상 눌려 지낸다. 김은영도 한때 조태준(최우제)과 불륜을 저질렀지만, 이들 관계의 주도권은 김은영이 쥐고 있다. 그런데 는 완벽한 남성중심 사회다. 나양팔은 남편 유일한(고주원)과 다퉈 친정으로 온 나미칠(최정원)에게 ‘하늘 같은 남편’을 두고 친정에 오냐며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겠다고 펄펄 뛴다. 그러나 그는 막내딸 나종칠(신지수)의 남편 황태자(이승기)가 바람을 피웠다고 오해하자 황태자를 조용히 불러 일을 ‘해결’하자고 한다. 또 그는 황태자가 군대 문제로 고민하는 걸 알자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진짜 남자”라며 황태자를 격려한다.

의 칠공주들은 이런 남성중심 사회로 ‘돌아와야’ 할 존재다. 아버지처럼 ‘여군’이 된 나설칠은 출생의 비밀을 안 뒤 아버지를 부정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결국 돌아온다. 또 언니와 달리 허영과 사치에 물들고, 어른들에게도 대들기 일쑤인 나미칠은 ‘교화’ 대상이다. 집들이에 음식을 요리하는 대신 중국음식점에 요리를 시키는 그의 행동은 철없는 것으로 묘사되고, 그것은 유일한과의 갈등을 통해 조금씩 고쳐진다. 물론, 여기엔 의 남자들이 가부장적이지만 매우 괜찮은 남자들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유일한은 외모, 성격, 재력을 모두 갖췄고, 나덕칠(김혜선)과 로맨스를 만드는 왕선택(안내상)은 나덕칠의 전남편과 달리 착하고 자상하다. 심지어 작품 내내 다른 여자에게나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던 철없던 황태자도 명문대 법대생에 ‘군대’를 갈 때쯤엔 자신의 아내를 위로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에서 여성의 행복은 능력 있고 성격 좋은 남자와 결혼해 살림하며 사는 것인 셈이다.

남자 외에 의존할 데가 없는 세계관

그런데 ‘발칙녀’들은 ‘괜찮은 남자’ 대신 ‘자신이 원하는 남자’를 선택한다. 조건을 따지면 김은영은 정석 대신 태준을 선택해야 했다. 또 에서는 나설칠에게 ‘남자’ 취급 못 받던 연하남(박해진)이 알고 보니 엄청난 부잣집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 나설칠에게 강한 키스를 퍼부어 ‘남자’로 인정받는 것과 달리, 송미주의 연하남 장우진(이기우)은 부상으로 미래마저 불투명한 야구선수다. 이는 송미주와 김은영이 잘나가는 의사라 ‘돈’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확신하면서도 이혼하면 갈 곳조차 없어 이혼도 못하는 고상미(사강)와, 장우진과 백억년(정준하)을 저울질하며 돈 없이 사는 삶에 대해 끔찍해하는 양다림(오주은)을 통해 확실하게 드러난다.

은 여자에게 돈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 대신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착하지는 않지만 능동적으로 자기 인생을 산다. 송미주처럼 자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장우진 같은 남자도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의 네 공주들은 나설칠을 빼면 제대로 돈을 번다고 하기 힘들고, 그래서 남자에게 매여 있다. 그러나 는 그 이유를 생략한다. 대신 여성이 그런 사회에서 사는 걸 당연한 것처럼 묘사한다. 그래서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여자들은 이상한 여자들이 된다. 남자들이 돈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데 혼자 돈 많은 남자를 찾는 나미칠이나, 왕선택을 잡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왕선택의 전처는 당연히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그들은 남자 외에는 의존할 데가 없는 세계관 안에서 사는 여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다른 여자들이 모두 그것을 받아들이고 착한 여자로 사는데 이들만 톡톡 튀니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반면 ‘발칙녀’들이 사는 세상은 여자가 남자 말고도 잃을 게 많은 곳이다. 송미주가 아무리 정석에게 “너, 뽀솨버릴 거야!”라고 말해도 의사인 그는 대놓고 정석에게 복수하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 자신의 품위를 지켜가며 상대방을 위기로 몰아넣고, 이 때문에 송미주와 정석은 작은 결과라도 얻기 위해서는 온갖 계획을 짜야 한다.

가 여자들을 위한 신파극이라면, 은 여자들의 코믹한 스릴러다. 이는 두 작품이 대중성을 얻는 방법의 차이로 이어진다. 캐릭터의 튀는 행동은 보여줘도 그것의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않는 는 캐릭터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면서 자극적인 설정과 감동 양쪽을 모두 가져간다. 나미칠이 ‘문제아’가 된 것은 어린 시절 자신이 나설칠과 친자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나미칠은 시청자들에게 용서받는다. 그러나 은 용서 따윈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쁜 여자’들의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정석이 아내를 배신한 나쁜 남자지만, 그가 정현준에게만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하듯, 송미주와 김은영 역시 좋은 엄마와 나쁜 여자의 모습을 함께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부성과 모성은 캐릭터의 욕망과 별개고, 그만큼 의 캐릭터는 욕망과 현실, 그리고 자신의 가족 사이에서 고민하며 뻔할 줄 알았던 스토리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송미주는 장우진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복잡한 상황 때문에 그를 거부하고, 거기에 둘을 갈라놓으려는 정석의 방해가 끼어들면서 두 사람의 애정관계가 계속 감질나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아버지의 딸 ‘공주님’에서 ‘독립녀’의 시대로

가 작품 속 여성들을 ‘이해’하게 하면서 아무리 못된 사람이라도 사랑할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면, 은 이기적인 욕망을 가진 나쁜 여자 그 자체를 ‘인정’하라는 투다. 두 작품의 성과와 한계는 여기서 비롯된다. 의 여자들은 남성중심 사회를 벗어나지 않는다.

나미칠이 아무리 어른에게 대들어도 그의 한계는 유일한의 삼촌 공수표(노주현)를 모시고 살면서 그 안에서 식사 당번 정하기 같은 자신의 작은 바람을 관철시키는 정도다. 그런 뚜렷한 한계 안에서 남자와 시댁 식구 등과 마찰을 빚는 여자, 그에 맞서는 남자가 코믹하게 지지고 볶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코믹하게 처리하다가 극단적인 설정에 다다랐을 때 가끔 눈물 흘리는 것으로 시청자들을 끌어모은다. 그것은 이 드라마의 주요 시청자층인 30~40대 이상에게 그와 비슷한 현실을 떠올리게 해 캐릭터에는 수긍이 가지 않더라도 그들이 겪는 상황에는 동감하게 만든다.

는 아버지, 혹은 남편의 존재에 따라 울고 웃을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모습을 웃음과 눈물로 포장해 그런 인생을 살아온 중년 시청자들을 위로한다. 그들은 나미칠을 보며 혀를 쯧쯧 차면서도 나미칠의 사연에는 눈물 흘리고, 여성이면서도 황태자를 감싸고만 돌면서 며느리를 구박하는 그의 어머니에 동화될 수도 있다. 특히 문영남 작가의 전작 한국방송 이 무능력한 남편의 불륜과 폭력에도 여성의 무조건적인 희생만 요구한 것과 달리, 는 나미칠을 통해 착한 여자로만 남아 있길 원치 않는 여성 캐릭터를 보여주고, 그들의 상대가 모두 좋은 남자들이라는 점은 여성의 욕망을 과장스럽게나마 표현한다. 그러나 의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사회에 대한 선택권이 없고, 드라마는 비정상적인 설정 속에서 여주인공들이 쉴 새 없이 사건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는 기존 통속극 형식 안에서 나설칠이 결국 자신의 아버지에게 돌아가듯 시청자들에게 힘 빠지고 약한 존재라도 ‘아버지’에게 돌아가자고 말한다.

반면 의 아버지는 그저 ‘애가 있는 남자’일 수도 있다. 은 아들에게 자신의 애정을 드러내고 싶은 정석의 부정을 통해 정석까지도 구원하지만, 정석은 정현준의 ‘아버지’가 된다 해도 송미주와 정현준 가족의 ‘가장’이 되진 않는다. 의 남녀 관계는 여성의 남성에 대한 반항과 순종이 아니라 남녀의 ‘파워게임’이고, 여성은 남성과 별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며, 그만큼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이는 캐릭터 간의 갈등을 높이고, 그들의 선택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은 보다 더 복잡한 스토리 구성으로 대중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지금까지 이혼녀를 다룬 드라마 중 가장 완벽하게 여성이 가부장제로부터 벗어나면서 현대 여성의 문제를 무겁지 않게 제기하는 웰 메이드 드라마가 된다. 가 지금까지 통속극을 봐온 여성들의 현재라면, 은 더욱 새로운 드라마를 즐기는 여성들의 미래다. 이런 두 드라마가 주말에 함께 방영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버지의 딸’들인 ‘공주님’에서 독립적인 ‘발칙녀’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아버지가 “내가 니 애비다!”를 외쳐도 딸들은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는 그런 시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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