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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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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이 쉴 곳은 어디인가

등록 2006-08-24 00:00 수정 2020-05-03 04:24

일본에서 반환된 오대산사고본 47책, 300여 년 머물렀던 오대산으로 귀환하나… 약탈 문화재 환수에 무대책으로 일관하던 문화재청의 소재지 결정 앞두고 의견 분분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강원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면 일본에서 돌아온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이 ‘제자리’인 오대산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게 틀림없다. 지난 8월11일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에서 열린 ‘조선왕조실론 환국 고유제 및 국민환영행사’에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제자리 반환에 대한 열망에 부응하는 답변을 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유 청장은 20여 분에 걸친 인사말을 하면서 집안 연고까지 거론하며 “이쪽 사람들이 섭섭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운을 뗀 뒤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철저한 관리를 요하는 만큼 기념관 신축을 통해 오대산에 보관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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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에 부는 귀환 염원 바람

정말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의 위치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을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오대산 귀환’이 기정사실로 굳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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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대산에서 오대산사고본을 맞이할 준비도 이뤄지고 있다.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태백·영월·평창·정선)은 “실록 기념관을 비롯한 보관 장소 신축을 위한 예산 50억원을 문화재청에서 마련하고 있다”면서 구체적인 실행 계획까지 거론했고, 김진선 강원지사는 “보관 장소를 마련하는 데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예산을 지원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거들었다. 여기엔 강원도가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는 데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이 한몫 거들길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의 오대산 귀환을 둘러싼 논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유 청장의 발언이 ‘원론적 해법’으로 절차상의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의 제자리 찾기에 대한 결정권이 문화재청장에 있다 해도 오는 9월7일로 예정된 문화재위원회 국보지정심의분과위원회의 의견 수렴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로 지정돼 있다. 이에 속하는 오대산사고본도 국보 지정이 예고된 상태로서 국유문화재 처리 기준을 따라야 한다. 국유문화재는 보존과 연구의 용이성, 역사적 의미 등을 기준으로 소재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오대산사고본의 오대산 귀환을 둘러싸고 또 다른 홍역을 치를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는 식민지 시대를 견뎌야 했던 오대산사고본의 서글픈 운명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애당초 조선 후기 5대 사고로 지정된 오대산사고는 선조 39년(1606)에 건립돼 전주사고본을 원본으로 인쇄한 4벌 가운데 1벌을 보관했다. 당시 실록을 보관하는 실록각(實錄閣)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과 함께 수호사찰 영감사를 세우면서 월정사 주지가 오대산사고 관리 책임을 맡도록 했다. 그 뒤 오대산사고본은 삼재(화재·풍재 수재)의 위협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300여 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가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면서 오대산사고본은 90여 년에 걸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일본 역사학계가 조선 통치 전략을 세운다는 명목을 내세워 조선총독부에 조선왕조실록을 요청한 게 직접적인 계기였다. 이를 받아들인 조선총독부의 주도 아래 인부들이 오대산사고본 760책을 등짐으로 주문진항에 옮겨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다. 월정사 재무국장 법상 스님은 “오대산사고본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은 안타깝고 송구스런 일이다. 당시 오대산사고본의 보존 상태가 상대적으로 좋았기에 일본 학계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에 빌려준 것을 되찾아와 제자리에 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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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대첩비의 사례를 적용할 수 있는가

어쨌든 대출이라는 형식으로 일제가 약탈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그것은 시련의 예고편이었을 뿐이다. 일본 도쿄대 도서관에 보관했던 오대산사고본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760책 가운데 외부에 대출됐던 74책만 남기고 모두 불타고 말았다. 남아 있던 74책 가운데 27책은 1932년 5월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뒤 지금껏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그리고 남아 있던 47책이 지난 7월7일 도쿄대 도서관의 ‘기증’으로 서울대 규장각이 ‘반환’받는 형식으로 국내에 들어왔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오대산사고본의 제자리찾기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곧바로 환수위를 비롯한 강원도를 중심으로 오대산사고본 오대산 유치 운동이 벌어졌다. 이들이 오대산 유치를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약탈 문화재가 원래 자리로 돌아갔을 때 반환의 의미를 높이고 역사성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8월11일 강원도 평창 오대산 오크룸에서 ‘오대산본 어디에 보관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조동원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문화재가 원래의 소장처가 아닌 박물관이나 도서관의 서고 등지에 있다면 의의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복원된 오대산 사고를 최첨단 설비로 리모델링해 전시한다면 교육의 장으로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오대산 귀환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우선 문화재의 원위치에 대한 시각이 다르다. 예컨대 러일전쟁 때 일본에 반출돼 야스쿠니신사에 있다가 지난해 환국된 북관대첩비가 올해 3월 북쪽의 제자리인 개성에 복원된 것을 문화재 전반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관대첩비는 보관상 어려움이 없기에 원위치를 찾는 게 맞지만 조선왕조실록 같은 전적·문서류는 제대로 된 시설에서 연구자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월정사가 오대산사고본을 수비하는 수비대(승병) 구실을 하지만 소장처나 관리자가 아니었으니, 국가가 새롭게 보관 기관을 정하는 게 당연하다는 주장도 있다.

정말로 오대산사고본의 최종 거처는 오대산으로 결정될 것인가.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발언으로 오대사사고본의 오대산 귀환에 무게가 실린 게 사실이다. 이미 월정사는 필요한 부지를 내놓기로 하면서 관리권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고, 강원도는 예산과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태세다. 문화재청 연웅 동산문화재과장은 “지금까지 문화재청에선 조건부로 의견을 피력했을 뿐이다. 이미 문화재청장과 서울대, 환수위 관계자들이 만나 최종결정권을 청장에 넘긴 만큼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본다. 국보지정심의 분과위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오대산사고본은 오대산에 거처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환수 과정에서 문화재청이 보인 행태에 있다. 초산 스님(한일불교복지협의회 회장)이 5년여 동안 남북의 뜻을 모아 북관대첩비를 돌려받기까지 팔짱을 끼고 있던 문화재청의 태도는 이번에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환수위의 활동에 제동을 걸기까지 했다. 놀랍게도 문화재청은 오대산사고본의 존재를 9년 전에 확인하고도 한일협정(1965)으로 문화재 청구권이 소멸된 것으로 여겨 환수를 사실상 포기한 상태였다. 문화재청이 약탈 문화재 처리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게 곱게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화재청이 사과해야 할 것들

물론 문화재청이 약탈 문화재 처리를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다. 조선왕조실록만 해도 사적 소유물이 아닌 만큼 국가기관이 관리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행정적 오류까지 덮지는 못한다. 문화재청은 오대산사고본 처리에 앞서 약탈 문화재 환수 과정에서 보인 행태를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게 옳다. 더구나 조선왕조실록 기념관을 세운다면 시민의 혈세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앞으로 약탈 문화재 환수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때마다 시민들의 100만인 댓글달기와 태극기 그리기 모금 활동 등에 의존할 수는 없다. 이제라도 문화재청은 약탈 문화재 환수와 관리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


문화재청이 안 나서는 이유

박정희 시대에 경제원조 대가로 1300여 점 돌려받고 나머지 청구권 포기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얼마나 많은 우리 문화재를 일본에 빼앗겼을까.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한반도에서 문화재를 약탈하기 시작해 2차 대전에서 패망하기까지 10만 점 이상의 문화재를 약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에는 관변 고고학자들이 왕가의 무덤을 파헤쳐 온갖 유물을 약탈했고, 절에서는 사리함과 종, 탑 등을 맘대로 가져갔다. 그렇게 약탈한 문화재로 일본 전역이 한반도 유물 박물관이 되다시피 했다. 그렇게 명백한 약탈 문화재임에도 우리가 반환받는 데 어려움을 겪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문화재 약탈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고대 이집트나 로마 시대에서도 약탈이 이뤄졌다. 전쟁이나 점령, 식민지배 등을 겪은 나라치고 문화재 약탈을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영국 박물관·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일본 도쿄국립박물관 등에 있는 해외 유물은 대부분 불법으로 취득한 장물이다. 20세기 들어서만 해도 세계대전 동안에 문화재 약탈이 심각하게 이뤄졌다. 독일의 나치 정권이 각국의 문화재를 약탈한 것이다. 유럽 각국은 종전 뒤 1943년에 발표된 ‘런던 선언문’에 따라 약탈 문화재 반환 운동을 꾸준히 벌여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이에 견줘 우리나라는 약탈 문화재 환수의 뜻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했다. 특히 일본의 약탈 문화재는 아예 손도 쓰지 못하는 처지다. 여기엔 더글러스 맥아더와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선택’이 담겨 있다. 일본군 점령군 사령관이던 맥아더는 “점령군에 좋지 않은 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며 문화재 원상복귀 주장을 묵살하고,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 자금을 지원받는 데 눈이 어두워 1300여 점의 문화재를 돌려받고 나머지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했다. 이 대가로 문화재청은 일본의 약탈 문화재에 일언반구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이 반환되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비록 ‘기증’이라는 형식이지만 양국의 국립대학이라는 국가기관이 반환 창구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오대산사고본 제자리 찾기가 약탈 문화재 관리의 시금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라도 문화재청이 약탈 문화재 환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오대산사고본 반환으로 한-일 양국 사이에 국가기관을 통한 환수의 길이 열렸다. 이를 적극 활용해 약탈 문화재 환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만일 정부 차원에서 협상이 여의치 않다면 약탈 문화재가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공동으로 대응하는 방법도 있다. 이를 통해 약탈 문화재 반환을 위한 국제기구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방송 에서 시도해 성과를 거둔 것처럼 약탈 문화재를 국민모금으로 구입해 국가기관에 관리를 맡기는 방법도 있지만 자칫 문화재 값만 부풀릴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일본 고서적상으로부터 1억3천만원에 매입한 ‘김시민 장군 공신교서’만 해도 감정가 6천만원이던 것을 국내 골동품업자들이 값을 올려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재주는 환수위가, 책은 서울대가…

2004년 도쿄대 소재 파악 뒤 2억여원 들여 협상하던 중 반전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의 존재를 확인하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애당초 오대산사고본이 도쿄대 도서관에 있다는 사실은 1980년대 중반에 알려졌다. 당시 을 펴낸 계명문화대학 배현숙 교수가 도쿄대를 조사하면서 관동대지진 뒤 오대산사고본 46책을 3책 단위로 묶어 귀중서고에 보관한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04년 봉선사 총무 혜문 스님이 한국전쟁 때 사라진 ‘곤여만국지도’의 행방을 추적하다 오대산사고본 47책이 보관됐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이때부터 불교계를 중심으로 오대산사고본 환수를 위한 각계의 관심이 모아졌다.

그러다가 지난 3월3일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공동의장: 정념 스님, 철안 스님)가 공식 출범했다. 문화재청이 “오대산사고본 46책을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해 월정사에 통보한 뒤였다. 환수위는 출범식 직후 일본 총리와 도쿄대 총장에게 보내는 ‘조선왕조실록 반환요청서’를 노회찬 의원(민주노동당)을 통해 주한 일본대사관에 전달했다. 그런 다음 환수위는 3월15일 도쿄대를 방문해 정식 반환 요청서를 전달하고 오대산사고본이 47책임을 확인했고, 4월17일 다시 도쿄대를 찾아 2차 협상을 갖는 등 공식적인 환수운동에 나섰다.

이즈음 일본이 국내법에 따라 오대산사고본을 국내에 반환해야 한다는 견해도 나왔다. 월정사가 소송 당사자로 나서면 환수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환수위가 협상을 진행하면서 소송을 준비하는 동안 도쿄대는 다른 채널로 ‘기증’을 모색하고 있었다. 지난 5월15일 도쿄대 사토 부총장이 서울대를 방문해 기증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미 27책을 보관하고 있던 서울대는 곧바로 정운찬 총장 명의로 “도쿄대의 기증 결정에 감사하며 적극 수용하겠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렇게 보름 가까이 기증을 위한 물밑 협의를 진행한 끝에 서울대는 지난 5월30일 오대산사고본 47책을 되돌려받기로 한 사실을 공개했다.

그야말로 환수위가 도쿄대의 이중 플레이에 당한 격이었다. 도쿄대로선 소송을 통한 환수의 위기를 서울대를 통한 기증으로 돌파할 수 있었고 서울대는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신기를 부렸다. 이에 견줘 도쿄대 방문 등에 2억원 이상을 쏟아부은 환수위로선 ‘문화재 강탈’ 소송을 제기할 수도 없게 됐다. 오대산사고본 반환을 앞두고 유홍준 문화재청장 환수위·서울대 등의 관계자가 지난 6월27일 만나 ‘서울대가 반환 창구 구실을 맡고, 소유권은 국가에 귀속’하기로 했다. 이런 까닭에 국내에 들어온 오대산사고본은 곧바로 서울대 규장각에 임시 거처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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