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시로 가즈키 원작과는 달리 너무 정석대로 간 영화 …진짜 ‘가장’의 의미를 찾는 게 아닌 가족만능주의의 설교로 그쳐버려
▣ 김봉석 영화평론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중년의 가장 장가필. 그런데 막상 사랑하는 딸이 고등학교 복싱 챔피언 태욱에게 폭행당해 입원하는 상황이 닥치자, 소심한 가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태욱의 부모가 가진 막강한 권력에 대항할 방법도 없고, 그렇다고 주먹으로 태욱을 두들겨팰 힘도 없다. 가 하드보일드였다면 태욱을 칼이나 총으로 죽여 복수했을 것이고, 법정극이었다면 비열한 태욱의 변호인에 맞서 법정에서 불꽃 튀는 논전을 벌였을 것이고, 하이테크 스릴러였다면 첨단기술을 활용한 음모로 태욱의 집안을 몰락시켰을 것이다.
중년 남성의 판타지여
하지만 는, 약간 비현실적인 구석이 있는, 낭만적인 드라마다. 가필은 우연히 고등학교 쌈장인 승석을 만나고, 치열한 트레이닝을 거쳐 링 위에서 태욱과 맞대결한다. 결말은 보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럼에도 는 계속 궁금하고,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된다. 영화화된 <go>에서 보았듯이, 가네시로 가즈키의 이야기는 활기차고 단순하면서 박력이 있다. 어설프게 주장하거나 고뇌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열정으로 들끓는 축제에 동참하게 만든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를 원작으로 한 영화 에서는 딸을 폭행한 악당에게, 중년의 가장이 정당한 폭력으로 응징한다. 그것은 주제곡으로 쓰이는 봄여름가을겨울의 노래처럼 충분히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외칠 만한 상황이다.
의 주제는 아주 간단하다. 가족의 영웅으로 부활하는 중년의 가장. 말로만 가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자신의 힘으로 가족을 재건하는 굳센 영웅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가족이 재건되기는 할까? 의 설정은 거의 판타지에 가깝다. 배가 축 처진 중년 남자가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의 훈련으로 3년 연속 고교 복싱 챔피언을 이긴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아무리 태클을 배우고, 조르기로 공격을 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는 중년 남자의 환상에 가까운 이야기다. 그럼에도 나는 원작자 가네시로 가즈키가 만들어낸 의 이야기가 정말 마음에 든다. 배가 나오고,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차는 것이 느껴지는 중년의 남자가, 오로지 육체를 이용해 불가능에 도전한다. 그것이 현실이건, 몽상이건 상관없이, 그런 발상 자체가 반갑다.
청년이 지나고 중년이 되면, 대체로 사회에 안착한다. 불만이 있어도 꾹 참으며 넘어가고, 되도록 둥글게 살아가고자 한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욕망 같은 것은 버리겠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헌신해야만 하는 게 가장이다. 그러나 그건 허구의 현실에 가깝다. 승석의 말처럼, 가필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주변 1m만을 바라보면서, 그저 가족만 지키는 데 몰두했다. 회사에서 승진하고, 아이를 상급학교에 진학시키고, 가족이 다 함께 모여 행복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았다. 하지만 가필의 능력으로, 그동안 배워온 모든 지식과 상식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벽을 만나자, 무너진다. 사방 1m만을 지키는 힘으로는, 거대한 악과 싸울 수 없다.
그래서 말한다. 날아오르라고.
날아서, 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라고. 지금까지 그가 지키겠다고 말한 가족만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보라고. 사실 가네시로 가즈키가 말한 의 의미는 그것이다. 그냥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악당에게 이기고,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이 끝이 아니다. 중년 남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승석이 가필에게 깨우쳐준 것은, 일종의 가능성이다. 육체를 그렇게 개조하는 것처럼, 중년의 남자라도 얼마든지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 내 딸을 지키고, 나아가 세상의 모든 아들딸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갖겠다는 것. 그래서 승석은 과 을 읽고, 방에는 몽골 평원의 사진을 붙여놓았다. 그건 기존의 질서 어디에도 소속되길 원치 않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기록이다. 혁명이란 건,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욕망이다. 주먹으로 태욱을 때려눕히고 싶은 가필의 마음처럼.
‘대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데 한국판 는 너무 정석으로만 간다. 폭행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가필은 훌륭한 가장이었다. 가족이 망가진 것은, 오로지 외부의 공격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가필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지 적을 물리치는 일뿐이다. 승리를 거두고, 가필은 가족에게 돌아가면 끝이다. 외부의 공격으로 파괴된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일본판은 조금 다르다. 중년의 가장은 열심히 일하지만,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가족과의 대화는 줄어들고, 그는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다. 그가 재건해야 하는 것은, 과거의 행복한 가정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새롭게 만들고, 그 힘을 통해 가족의 행복한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가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혁명이다. 승석 역시, 잃어버린 아버지를 단지 승리한 가필로 대체하는 것은 가족만능주의의 설교에 가깝다. 원작의 순신은 재일동포, 즉 이방인이다.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재일동포는 현실의 아버지가 아니라, 세계 전체의 아버지가 부재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순신은 ‘대디’의 승리를 통해, 세계의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을 수 있는 통로를 만든다. 그냥 가족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요구되는 ‘대디’를 원하는 것이다. 근엄한 아버지,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친근하고 다정한 새로운 형태의 아버지 ‘대디’를. 도 단지 가족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가족을 넘어선 진짜 ‘가장’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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