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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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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노래하고 중국어로 연기?

등록 2006-07-26 00:00 수정 2020-05-03 04:24

스크린쿼터 축소 10년 뒤 2016년 한국인씨의 문화생활 가상 시나리오… 할리우드 영화의 피난처 텔레비전도 방송쿼터 사라진 뒤 미국 안방!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이건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가 아니라 백 투 더 패스트(Back To The Past)야….”

2016년 8월, 한국인(44)씨는 서울 시내의 멀티플렉스 극장 예매소 앞에 서서 중얼거렸다. 모처럼 한국 영화나 한 편 ‘때릴까’ 하고 극장에 왔지만, 도통 한국 영화는 찾기 힘들었다. 멀티플렉스의 10개관 중에 8개관을 할리우드 영화가 ‘점령’하고 있었다. 금쪽같은 휴일의 시간을 쪼개 시내로 나왔던 그는 다시 한 번 영화 상영 시간표를 살폈지만 실망만 더했다.

그나마 한국 영화는 조조 아니면 심야 시간대에만 상영되고 있었다. ‘쳇, 의무상영 일수 채우려는 구색 맞추기구만….’ 심란한 상영표 앞에서 그는 ‘괴물의 추억’을 떠올렸다. 10년 전인 2006년 여름, 한반도는 영화 의 열풍으로 뜨거웠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였던 은 500만 관객을 넘어 1천만 관객을 향해 돌진하는 ‘괴력’을 보이고 있었다. 의 추억에 잠기자 의 태풍도 떠올랐다. 그해 여름, 과 는 흥행순위 선두를 다투면서 한국 영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올랜도 블룸을 봐도 왜 즐겁지가 않냐…"

지난 10년 동안 한국 영화의 시계추는 거꾸로 돌았다. 2006년에서 2016년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1996년으로 돌아가버렸다. 1996년부터 10년 동안 꾸준한 상승세를 그리면서 60%까지 올라갔던 한국 영화 점유율은 10년 만에 다시 20% 선으로 떨어졌다. 정확히 96년 한국 영화 점유율 23.1%로 ‘도돌이표’를 그린 것이다. 96년에 흥행순위 5위 안에 든 한국 영화는 (3위)가 유일했다. 1위 부터 5위 까지 할리우드 영화들이 선두권을 휩쓸었다. 2016년 상반기 흥행순위에도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제외하면 할리우드 영화가 상위 10위를 석권하고 있었다. 신문에는 ‘잃어버린 10년’을 통탄하는 기사가 넘쳐났고, 스크린쿼터 문화연대는 90년대 중·후반처럼 또다시 한국 영화 의무상영 일수(스크린쿼터) 감시운동에 나섰다. 2006년에 146일에서 73일로 축소된 의무상영 일수마저 지키지 않는 극장들이 늘어난 탓이다. 그래도 1996년은 2016년에 견줄 수 없이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93년 15%로 바닥을 쳤던 한국 영화 점유율이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한국 영화가 부활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해에 부산영화제가 처음으로 개막을 알렸고,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탄생을 알리는 가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이렇게 96년은 한국 영화가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2016년에는 암울한 미래만 보였다. 한국인씨의 입에서 “아~ 옛날이여!”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제 2006년 괴물의 추억은 돌아오지 않는 과거가 됐다.

괴물의 추억에 잠긴 한국인씨를 깨우는 비명이 들렸다. 멀티플렉스 극장 바깥에 설치된 무대에 할리우드 스타인 올랜도 블룸이 나타나자 팬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번주에 개봉한 의 주인공인 올랜도 블룸은 영화 개봉에 맞추어 내한했다. 스크린쿼터 축소 이후,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한국 공습’을 강화하면서 예전에는 ‘코빼기’도 보기 힘들던 할리우드 스타들을 영화 개봉에 맞추어 한국에 보내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한국에 자주 올수록 홍보효과가 커지고 할리우드 영화의 힘도 세졌다. 한국인씨가 올랜도 블룸을 보려고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사이에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어, 웬일이냐?” “잘 지내나 해서. 뭐하냐?” “올랜도 블룸 보고 있다야….” “좋겠네. 너 올랜도 블룸 팬이잖아.” 순간 한국인씨의 얼굴에 심란한 웃음이 스쳤다. “그래, 팬인데 왜 이렇게 즐겁지가 않냐.”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가 할리우드의 한국 공습을 상징하는 풍경을 보면서 한국인씨의 마음이 복잡했다.

더구나 전화를 건 친구는 예전에 단편영화 감독이었다. 장편영화 데뷔를 앞두고 있던 친구는 한국 영화에 위기가 찾아오면서 영화감독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2007년 시나리오 작업까지 마치고 크랭크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투자를 받지 못해 영화 제작을 포기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다. 이렇게 2006년 7월1일 태어난 ‘스크린쿼터 축소’라는 괴물은 한국 영화산업을 삼켜버렸다. 그날부터 스크린쿼터가 146일에서 절반인 73일로 줄어들면서 2006년 100편에 달하던 한국 영화 제작편수는 2106년에는 50편으로 반토막 나버렸다. 할리우드 영화에 맞서려니 제작비와 마케팅비가 올라가고, 날로 높아지는 비용을 감당할 만큼 시장 규모는 커지지 않으니 영화의 수익성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대기업 영화 자본은 재빨리 영화 제작을 포기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는 극장 사업으로 돌아서버렸다. 이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한국 영화에 투자하려고 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오직 영화인들만이 할리우드가 따라오지 못하는 창의력과 감수성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씁쓸한 전화를 끊으면서 오래된 노래가 떠올랐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이승환의 가사처럼 영화인들의 슬픈 예감도 틀리지 않았다. 영화진흥위원회가 2006년 7월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축소의 효과가 평균 2.65년 뒤에 나타날 것으로 전망했고, 한국 영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견이 65.2%에 달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대로 “자신감을 가졌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대중음악, 1986년 수준으로 후퇴하다

영화관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등을 치며 중국어로 인사를 했다. “니 하오?” 돌아보니 조카 녀석이었다. 배우 지망생인 녀석은 요즘 중국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어, 웬일이냐?” “영화 보러 왔죠.” “뭘 볼 거냐?” “ 보려고요.” “한국 영화 안 보냐?” “재미없잖아요.” 한국 영화 제작이 줄어들면서 아시아를 뜨겁게 관통했던 한류(韓流)는 어느새 한류(寒流)로 변해버렸다. 한국 영화는 홍콩 영화가 걸었던 길을 따라서 걸었다. 그나마 스크린쿼터 66.6%를 고수해온 중국이 아시아에 화류(華流)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어제의 한류 스타들은 어렵게 중국어를 배워서 중국 영화에 출연하는 처지가 됐다. 요즘엔 아예 배우 지망생들에게 중국어로 대사를 지도하는 연기학원도 생겼다. 그래서 배우를 꿈꾸는 조카도 중국어 연기를 배우고 있다. 한때 아시아를 대표했던 한국 감독들도 중국에서 영화를 찍거나 할리우드로 진출하지 않으면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영화는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현실이다. 조카는 헤어지면서 “내일 오디션 보러 간다”며 좋아했다. 그는 “잘하라”고 어깨를 두드리기는 했지만, 왠지 조카가 안쓰러웠다.

영화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습관처럼 리모컨을 들고 텔레비전을 켰다. 아무리 리모컨을 돌려도 미국산 오락 프로그램만 나왔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서 미국 오락 프로그램이 안방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문화에는 관심 없는 척하던 미국이 서서히 한국을 압박해왔다. 2008년에는 외국 프로그램을 공중파 방송에서 20% 이상 내보내지 못하도록 규정한 방송 규정을 문제 삼더니, 2010년에는 공중파 방송 쿼터를 물고 늘어졌다. 그때까지 전체 영화의 25%, 애니메이션의 45%, 대중음악의 60% 이상을 한국 영화와 음악으로 채워야 하는 쿼터 규정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미국은 이미 2006년 발간한 부터 방송 쿼터를 무역장벽으로 지목해오고 있었다. 연례 보고서의 문자는 10년도 지나지 않아 현실로 변했다. 미국의 압력에 한국의 ‘장벽’이 무너지자 문화도 사라졌다. 스크린쿼터 축소 때처럼 정부는 방송 쿼터가 무너지고 나서야 방송 쿼터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2016년의 대중음악은 1996년도 아니고, 1986년으로 후퇴했다. 한국인씨는 20년 전을 떠올렸다. 1996년은 한국의 원조 아이돌 그룹이었던 H.O.T가 데뷔한 해였다. 이즈음 가요는 팝송을 누르고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의 상황은 72년생인 한국인씨에게는 격세지감이었다. 그가 15살이던 1986년에는 온통 듀란듀란, 아하, 왬 같은 팝 그룹들이 청소년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 세대에게 가요는 ‘촌스러운 음악’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이문세, 변진섭 등이 부르는 한국형 발라드가 유행하고, 90년대 초반 서태지가 등장하고, 90년대 중반 한국형 아이돌 그룹인 H.O.T가 인기를 끌면서 가요는 팝송을 밀어내고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 그래서 ‘가요세대’라는 말도 등장했다. 하지만 시계추는 거꾸로 돌아서 2016년의 상황은 1986년으로 돌아가버렸다. 방송에서는 팝스타가 하루 종일 노래하고, 아이들은 팝스타에 열광한다. 한국인씨는 미국산 오락 프로그램들이 지겨워 채널을 돌리다 겨우 한국산 음악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했지만, 한국인 가수는 영어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요즘은 한국 가수들 중에도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 이가 적지 않다. 가요는 또다시 ‘촌스러운 음악’이 돼버렸다. 음악 프로그램이 끝나자 할리우드 영화 광고가 이어졌다. 요즘 방송에서 할리우드 영화 광고가 부쩍 늘었다. 할리우드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커지니 당연히 광고 횟수도 늘어난 것이다.

방송총량제 폐지, 둘리는 사라졌네

아이들에게 둘리 같은 친구도 사라졌다. 둘리는 한국산 애니메이션의 전설로 남았다. 이제 한국산 애니메이션은 눈 씻고 찾아도 보기 힘든 형편인 탓이다. 그나마 열악한 제작 조건에서 한국산 애니메이션을 지탱하던 ‘애니메이션 방송총량제’가 무너졌다. 공중파 방송 시간의 1%를 국산 창작 애니메이션으로 방송하도록 규정한 방송총량제 덕분에 한국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명맥을 유지해왔다. 1%의 수치 덕분에 한 해 1시간짜리 국산 애니메니션 384편이 제작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2010년 애니메이션 방송총량제를 비관세 장벽이라고 주장하면서 폐지를 요구했다. 미국의 압력에 ‘장벽’이 무너지면서 384편의 애니메이션이 사라져버렸다. 한국인씨의 네 살배기 조카는 인어공주와 사랑에 빠지고 니모를 찾아서 꿈속을 헤엄치지만, 둘리같이 정겨운 친구는 가지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경쟁력’의 명목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무료하게 채널을 돌리던 한국인씨의 시선이 화면에 멈췄다. 뉴스의 한 장면이었다. 서울 광화문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시위대의 피켓에 적힌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울렸다. “한미 FTA 10년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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