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경기 중계방송과 오락 프로그램의 공중파 3사 대차대조표… 과거에 사로잡히거나 애국심만 좇은 무례한 상업성들은 바로 실패
▣ 강명석 문화평론가
뒤도 돌아보지 않는 리켈메의 마지막 힐패스, 캄비아소의 골. 그 뒤에 붙는 문화방송 해설위원 차두리의 한마디. “마치 오락 게임에서 보는 것 같은 골이에요.” 6월16일 2006년 독일 월드컵 예선 아르헨티나-세르비아몬테네그로전에서 아르헨티나가 무려 24번의 패스 뒤에 성공시킨 이 골은 이번 월드컵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조직력과 체력을 바탕으로 한 압박이냐, 개인기를 바탕으로 한 화려한 기술축구냐는 이제 의미가 없다.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은 화려한 개인기에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한 강한 체력, 그리고 24번의 패스를 이어갈 수 있는 완벽한 조직력을 선보였고, 한국은 각 게임은 물론 전·후반마저 각기 다른 포메이션을 선보여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선전했다. 그리고 시청자는 기존 해설가들은 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말들을 쏟아낸 차두리의 해설을 즐겼다.
월드컵 중계, 차-차 부자의 압승
독일 월드컵의 성공 키워드는 바로 변화였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이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반면, 과거의 영화를 고집한 이들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의 베테랑들에 의존한 프랑스팀처럼 고전을 면치 못했다. 4년 전 ‘대한민국~!’과 ‘필승 코리아’의 단맛을 본 SK텔레콤과 KTF는 응원의 포인트를 애국심에 맞춰 ‘애국가’를 응원가로 내세우고, 신생아가 곧 ‘4800만 번째 붉은 악마’라는 카피를 내걸었다. 그러나 ‘애국가’는 초기에 논란만 일으킨 채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했고, ‘4800만 번째 붉은 악마’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얼마 없다. 대중이 좋아한 응원은 영화배우 김수로가 토크쇼에서 우연히 보여준 ‘꼭짓점 댄스’였고, 사랑받은 CF는 월드컵과 일상을 코믹하게 연결시킨 한국방송 ‘월드컵 생활백서’였다. ‘대한민국~!’은 여전했지만, 대중은 무조건적인 애국심 대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축제로서의 월드컵을 선택했다. 물론, 그 와중에 여전히 과거에만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었다. 이미 시민들은 ‘축제의 매너’를 익혔건만, ‘대한민국~!’이면 뭐든 가능했던 4년 전만을 기억하는 일부 사람들은 과거처럼 차 위에 올라가고, 일부 남녀는 공공장소에서 낯 뜨거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들에게 돌아온 시선은 냉담했다.
물론 공중파 3사만큼 월드컵 기간 동안 비난에 시달린 곳도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개최한 월드컵 특수만을 기억하던 이들은 독일 월드컵에서마저 방송 3사가 대부분의 경기를 동시 방영하고, 월드컵 중계로 수많은 프로그램을 장기 결방해 시청권을 요구하는 시청자에게 시달렸다. 시민단체들은 방송사의 지나친 월드컵 관련 프로그램에 시위를 벌였고, 인기 드라마 문화방송 의 팬들은 드라마의 잦은 결방에 “자꾸 결방하면 한국이 지길 바라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나마 과거보다 약간은 새로운 것들을 내놓은 문화방송만이 시청률 전쟁에서 웃을 수 있었다. SBS가 여전히 신문선을 메인으로 내세우고, 한국방송이 한준희 해설위원을 중심으로 전문적인 축구 해설에 초점을 둔 것과 달리 문화방송은 기존 차범근 해설위원에 차두리의 가세로 탄생한 ‘차·차 부자’ 조합으로 경기의 맥을 짚어주면서도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축구 만담’을 통해 시청률 정상을 차지했다. 물론, 이 때문에 각종 첨단 방송기술의 전시장이 되는 월드컵의 시청률이 결국 해설가의 입에 따라 좌우됐다는 것은 비극이라면 비극이지만, 그건 한국방송의 ‘미디어 서버’나 SBS의 ‘전국 5.1채널 방영’ 등 신기술을 선보이고도 상업성만 좇아 화질 저화를 일으킨 멀티미디어메시징시스템(MMS) 시험방송을 강행한 그들의 자승자박이다.
옛날처럼 좋은 게 좋은 것이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과거의 대세를 따르는 프로그램 대신 조금이나마 변화를 준 프로그램이 승리했다. SBS 의 ‘X맨’과 한국방송 ‘날아라 슛돌이’가 과거 ‘이경규가 간다’처럼 월드컵 경기 현장 취재 방식으로 진행됐지만, 한국이 아닌 독일에서 열리는 경기들은 과거처럼 마음껏 경기장 구석구석을 찍지도 못했고, 단순한 연예인의 응원 모습은 호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오직 원조인 ‘이경규가 간다’만 VJ 찰스를 토고에 보내 승리를 기원하는 토고인들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내는 등 구성적인 변화와 더불어 한국만이 아닌 상대국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새로운 관점으로 호평을 받았다. 반면 과거 오락 프로그램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X맨’은 토고 선수 중 X맨을 선정하는 해괴한 행동으로 지탄의 대상이 됐다.
막강했던 ‘굴욕 시리즈’와 ‘조삼모사’패러디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TV가 아닌 인터넷에서 일어났다. 토고전 프리킥 백패스에 대한 격론 역시 인터넷에서 시작됐고, 네티즌들은 프랑스전에서 프랑스 쪽의 골 오심 논란에는 직접 3D 그래픽을 만들어 오심이 아님을 증명했으며, 심지어 네티즌들의 다양한 경기 분석평을 한번에 볼 수 있는 가상 잡지까지 나올 정도로 네티즌의 활약은 눈부셨다. 특히 이번 월드컵의 새로운 유행 코드가 된 각종 ‘굴욕 시리즈’와 ‘조삼모사’ 패러디(뭔지 모르겠다면 인터넷을 검색해보시라)는 이제 인터넷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스스로 유행을 만들고 창조적으로 놀 줄 아는 한국 네티즌들의 막강한 힘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2002년 월드컵이 ‘대한민국~!’ 하나로 모든 걸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2006년 월드컵은 그 구호 안에서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현상들이 퍼지면서 각자의 방법으로 즐기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끊임없는 변화의 역동성과 예상 외의 스타 탄생. 그것이 어쩌면 가장 권위와 전통이 있는 국제대회 중 하나면서도 끊임없이 전술 스타일을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고 늘 새로운 스타가 배출되는 월드컵과 가장 어울리는 모습일는지도 모르겠다. 아,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긴 하다. 축구 경기보다는 응원하러 온 예쁜 여자를 찾아헤매던 남자들과 선정적인 언론들은 2002년의 미나에 이어 이번엔 기어이 ‘엘프녀’는 물론 ‘시청녀’까지 ‘만들어’내며 축구 경기와 섹시 코드를 결부시켰다. 그럼, 2010년에는 ‘엘프남’도 만들어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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