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계 미국 무용가 쉔웨이와 안은미의 에서 느끼는 아쉬움… 흉내내고 포장하는 일에 심취된 무용계에 은 좋은 자극
▣ 이지현 무용평론가 amooni@hanmail.net
한국의 창작춤을 고민하는 무용가와 안무가 혹은 그 과정에 있는 많은 춤 예술가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공허함’의 정체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특히 요즘에 관찰된 공허함과 불안정함은 흔히 말하는 잘나가는 안무가조차도 비껴가지 못하는 상황인 것을 보면 춤계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엄습해오는 어떤 전염병과 같은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발견한 춤 예술가들의 공허함은 “난 주류가 아니야”라는 말과 항상 동반되는데, 반대편에 주류를 상정하고 그로 인해 중심에 서지 못하거나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피해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 주류에 대해 물으면 정체가 서로서로 맞물려 있는 것이 발견되는데, 주류는 어디에도 없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주류 혹은 비주류가 되는 이상한 역할 바꾸기 놀이란 말인가.
이런 현상을 무용계의 중심과 주변이라는 구도가 와해되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긍정적인 공존의 다원화, 드디어 협주곡을 들을 수 있게 된 풍부함에 대한 설렘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무용가들이 창작적·존재적 고민을 ‘남 탓’으로 돌리는, 그래서 해결의 근거를 찾아 들어갈 수 없는 미궁에 빠져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찬사의 소리가 클수록 더 공허하다
분석미학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 분석미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아서 단토는 근대예술을 넘어서는 컨템퍼러리 예술에 관해 예술이 순수한 자기 정체성과 당위성으로 구분되던 시대는 끝났으며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 스스로의 역사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즉, 예술이 사조로 규정되던 시대에서 사유와 철학의 대상이 되는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지각적 식별로 구분되는 것이 예술이 아니라 의미의 집적된 역사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내포할 때 예술이 된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의 요즘 춤에 꼭 필요한 부분을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의 춤은 삶과 춤을 사유하고 몸으로 철학하면서 춤을 통해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 해체, 장르와 그 역사적 내용물들의 교차와 연접이라는 포스트모던의 포장지 정체에만 몰두하고 있다.
국제현대무용축제(일명 Modafe, 5월24일~6월6일, 아르코 대극장)에 초청돼 주목을 받았던 중국계 미국 현대무용가 쉔웨이의 <folding>과 성공적인 유럽 순회 공연에 대한 언론 매체의 대대적인 홍보를 후광으로 안고 귀국 공연을 한 안은미의 (5월12~14일,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이런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에서 원하는 동양의 이미지를 구미에 딱 맞도록 시각적으로 잘 다듬어낸 쉔웨이의 작품 <folding>은 이미지 요소로 분류된 ‘동양적’ 취향- 일본의 부토 분위기를 자아내는 속도와 분장, 물고기가 한가히 노니는 여백이 가득한 중국화 배경막, 마지막 장면의 숭고하고 환상적인 승천의 이미지 등- 의 전시장이다. 그는 중국인임에도 미국 현대무용계에서 성공을 거둘 만큼 미국 현대춤의 기량이 뛰어나고 그들이 요구하는 동양적 취향을 충족시킨다. 거꾸로 우리의 무용가이면서 유럽에서 찬사를 받았다고 자랑되는 안은미의 은 우리 고전을 소재로 중국인 남자 무용수를 캐스팅하거나 한국춤 무용수를 기용해 한국춤 그대로를 선보이고, 한국적인 오방색과 판소리, 그리고 그녀 특유의 단순하고 분절화돼 있는 쉬운 춤동작을 잘 버무린다.
이 두 작품에서는 정체도 없이 서양인의 사고 속에나 존재하는 ‘동양적’이나 ‘아시아적’ 혹은 ‘한국적’인 것을 위해 우리 삶의 파편들이 재조립돼 접합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작품들이 세계적인 것이 되어 돌아왔다면 그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보편적인 공감을 얻어야 할 텐데, 그래서 그들의 평가를 자랑하고 확대해 소개하는 매체의 글 속에나 그 찬사를 뒤에 두고 본 공연에서 마음은 허하다. 생존전략으로 언론을 통한 홍보를 무기로 삼은 찬사의 소리가 클수록 더욱 그러하다.
정영두의 지루한 몸짓에 깃든 사유와 용기
이에 견줘 노장의 러시아 발레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의 공연 (5월30~31일, LG아트센터)에서는 러시아 발레의 안정감을 볼 수 있다. 고전발레가 획득한 대중의 사랑, 그 사랑의 근거가 되는 대중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생활 속의 춤으로서의 발레, 시간 속에서 다져진 의미의 집적에 기반을 둔 ‘춤으로 대화하는 법’과 그것을 받침해주는 훌륭한 기량,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물결치는 시장이 되어버린 세계 속에서 고전적 형식을 꿋꿋하게 공연하는 보리스 에이프만의 뒷심! 그의 팬들은 아마도 러시아식 전통이 그에게서 다시 꽃피는 역사적 발전이 주는 안정감을 사랑하는 것일 것이다.
지난 6월6일 Modafe에 초청된 주목받는 신인 안무가 정영두의 은 몸으로 사유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지루하지만 신선하다. 정영두는 자신이 사랑받았던 연극적 요소와 감상적 호소력을 포기하고 춤으로 훈련된 역사를 갖지 않은 자신의 몸을 집요하게 사용한다. 주목받고 초청된 자리에서 그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객은 정영두에 대한 믿음으로 1시간 내내 집중해주었고 정영두는 그간 자신의 수행을 있는 그대로 선보였다. 물론 그의 짧은 춤 이력과 그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우리가 대극장에서 굳이 감상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울 만큼 공연은 지루했고 그의 놀이는 초보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뭉뚱그려놓았던 춤에 대한 생각을 하나씩 몸으로 느끼면서 되짚어보겠다는 용기는 흉내내고, 장식하고, 포장하는 일에 심취해 있는 우리 무용계에서 꼼꼼히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의미를 생산하고, 그것을 대중과 교류하려면 피해의식에 근거한 생존전략이나 또 하나의 권력화·집단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춤놀이에 심취하고, 춤사유에 빠져야 한다. 우리 현실이 무용가들에게 그런 여유를 허락지 않으나, 제도화돼가고 있는 컨템퍼러리 예술의 개념에 자신의 몸을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출발해 자신의 춤 역사 속에서 의미의 꼬투리들을 챙겨와 그것을 근거로 대중과 소통하는 용기와 당돌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럴 때 주변이라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자기가 선 곳에서 중심이 되는, 모두가 중심이 되는 자유가 다가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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