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선보인 영화감독 유하, 그의 남자들
…병두와 현수의 순수성이 폭력과의 불화를 불렀나
▣ 김봉석·대중문화평론가
의 병두는 건달이다. 건달이나, 조폭이나, 양아치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병두에게는 분명히 다른 존재다. 건달이 자존심을 잃으면, 그건 양아치다. 당장 굶어도 구두는 닦아야 하는, ‘의리에 죽고 사는 진짜 건달’이 병두의 이상형이다. 그건 요즘 한국의 조폭영화에서 보는 인물들과는 사뭇 다르다. 요즘의 조폭이라면,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의리고 뭐고 당장 내팽개치는 인간이다.
한없이 야비하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냉혈한. 하지만 병두는 다르다. 병두가 원하는 것은 자기 식구들(진짜 가족과 그가 거느리는 부하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뿐이다. 병두는, 무척이나 고답적인 인물이다.
식구·우정·의리를 챙기는 고답적 인물
이런 조폭이 지금도 존재할 수 있을까? 에서 나온 ‘강호의 의리는 땅에 떨어졌다’는 말의 여운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 홍콩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정통 건달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런데도 병두의 캐릭터는 영락없는 정통 건달이다. 일단 고향은 전라도. 영화 곳곳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흥건하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고 있는 집은 곧 철거되고, 돈을 벌 사람은 병두뿐이다. 가정 형편 때문에 재대로 배우지 못한 병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주먹을 쓰는 것뿐이다. 초등학교 동창, 짝사랑했던 현주를 만나기 전까지 병두는 단 한 번도 조폭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병두에게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야심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스폰서 하나 잡아, 평생을 멋진 건달로 살고 싶은 정도다. 그것도 ‘식구’들을 위해서.
병두가 필연적으로 비극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대착오적 인물이란 점이다. 의리가 중요하단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리가 조직의 이익과 배치될 때는, 모두가 의리를 깬다. 그게 요즘 조폭의 규칙이다. 그러나 병두가 의지하는 것은 가족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동창들. 모두가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일종의 도피처다. 세상의 법칙을 모른 채, 순수하게 사랑과 우정을 나누었던 사람들, 병두는 그들을 전폭적으로 수용한다. 조폭 세계에서는 자신이 치고 나가야 할 때를 정확히 판단하고, 누군가의 배신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는 병두이지만 정작 친구의 야비한 배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알고 나서도, 어물쩍 넘어간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병두란 인간은, 전근대적인 가치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 가치가 무너진다면, 병두의 존재는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병두가 맹신하고 있는 가족주의의 무자비한 폭력성이다. 어머니는 병두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면서도, 나쁜 짓 하고 다닌다며 잔소리뿐이다. 더러운 돈을 받으면서도, 건달인 병두를 욕한다. 병두가 의지하는 ‘식구’ 역시 조폭 세계와 동일한 시스템에 의해 움직인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폭력으로, 모든 사회가 움직인다. 오로지 병두만이 홀로 다른 세계를 걷고 있다.
유하 감독의 네 번째 영화 는 전작인 와 무척 닮았다. “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사춘기를 보냈던 나에게, 그 시절 갖게 된 폭력성에 대한 관심은 창작활동의 영원한 원천이다. 로 시작된 인간의 폭력성 탐구에 대한 두 번째 영화가 될 는 이를 좀더 구체화시켜줄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유하 감독의 말처럼, 와 는 평범한 장르영화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다. 두 작품의 주인공인 현수와 병두는, 이 사회의 폭력성에 우리가 어떻게 저항하면서 동시에 받아들이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유신시절의 남학교, 정글에서 패배하다
의 현수는 고등학생이다. 배경은 1978년. 박정희가 죽기 1년 전, 군사독재 정권의 폭정이 극에 달해 있을 때다. 군복을 입은 교련 선생의 군홧발에 맞으면서, 10월 유신의 역사적 사명을 배워야 했던 당대의 청춘에게는, 모든 것이 잔혹한 정글이었다. 양육강식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학교에는, 선생과 학생의 계급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이제이’라는 말처럼, 학생을 폭력적으로 다스리는 방법은 학생을 이용하는 것이다. 선도부는 선생 이상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무소불위의 존재다. 사회의 폭력성은, 아주 작은 개인적인 부분에까지 여과 없이 침투한다. 성적제일주의의 학교는 진실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장악하고 있던 ‘폭력’의 법칙을 가르친다. 그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마초’가 되어야만 한다. 아버지가 태권도 사범이지만, 현수는 폭력을 두려워한다.
어느 정도의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고, 리샤오룽(이소룡)을 숭배하면서도 정작 현실의 폭력에는 쉽사리 빠져들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폭력을 선택했을 때, 그 폭력은 단지 선도부만이 아니라 학교 전체를 향한다. ‘대한민국 학교 좆까라 그래’라는 현수의 외침은, 폭력적인 사회에게 던지는 현수의 복수다.
하지만 결국 현수는 패배한다. 한 번 저항을 하긴 했지만, 현수가 얻은 것이란 없다. 재수를 하고, 대학에 진학한 뒤 다시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가 암울한 이유는, 폭력의 굴레가 깨어질 기미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리샤오룽이 출연한 의 세계와 동일하다. 아무리 일본놈들을 때려눕혀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본군의 총부리뿐이다. 아이들을 괴롭히던 선도부를 박살내고, 선생에게 욕설을 퍼부어도, 현수가 갈 곳은 없다. 유하는 우울한 청춘의 잔혹사를, 묵묵히 걸어가거나 시스템 바깥으로 이탈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비극을 보여준다. 더 비참한 것은, 시대 자체가 바뀌어버렸다는 것이다. 적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강인하게 세계와 충돌했던 리샤오룽에서, 세계를 슬쩍 비웃으며 비껴버리는 청룽(성룡)으로, 시대의 영웅이 바뀐 것이다. ‘리샤오룽 세대’는 이제 영웅의 의미조차 바뀌어버린 시대가 배경인 에서도 동일한 궤적을 걸어가야만 한다.
의 현수와 의 병두는 모두 과거지향적인 순수한 인간이다. 그들은 여자 앞에서 폼 잡는 일 따위는 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수줍게 전하는 정도다. 그들이 보통의 공간에 놓여 있었다면, 그들의 순수함이 보상받을 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잔혹한 폭력의 아수라장 속에 놓여 있다. 그 순수함은, 도리어 그들을 몰락하게 한다. 현수는 폭력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학교라는 공간은, 완벽하게 폭력이 지배하는 시스템이다. 그 안에서 현수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타협해 선도부가 되거나 이탈하는 것뿐이다. 병두는 스스로 폭력의 세계를 선택했다. 배우지도 못하고, 돈도 없는 병두가 성공할 수 있는 길은 건달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달 일에 모든 것을 건다. 그러나 선택하건, 하지 않건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유도 과정도 다르지만, 그들의 여정은 무척 닮았다. 그들은 세계의 폭력성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이 살아갈 방법으로 폭력을 선택하고, 결국 자신이 가진 내면의 영웅적 특질로 인해 몰락한다.
의 준영은?
가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폭력을 말했다면, 는 폭력 그 자체인 조폭의 세계를 통해 사회 전체의 폭력성을 말한다. 병두의 친구 민호는 영화감독이다. 배울 만큼 배운 인텔리이지만, 그의 행동방식은 조폭과 다르지 않다. 자신을 홀대한 모든 이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도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언제든 배신한다. 그는 조폭 이상으로 야비하고 비굴하다. 아니 이상, 이하를 따질 것 없이, 이 폭력적인 사회에서 어떻게든 성공하겠다고 달려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영화 속에서 민호가 가장 비열한 이유는 그가 가장 성공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욕망이 그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근대적인 공동체를 꿈꾸었던 병두는 제거되어야만 할 존재였다. 병두의 욕망은 결국 다른 ‘식구’들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에. ‘리샤오룽 세대’의 가치와 행동양식은 이미 과거의 추억이 되어버린 것이다.
유하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은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다. 1978년의 현수는 그 시대를 상징할 만한 캐릭터지만, 지금 보기에는 고전적이다. 현수와 거의 흡사한 병두는 21세기에는 존재할 수 없는, 과거형의 인물이다. 그렇다면 의 준영은 어떨까? 준영은 현수나 병두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적어도 준영은 직접적인 신체적 폭력을 받거나 가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육체적 억압에서 비껴나 있는 고상한 대학 강사였다. 그러나 위계질서와 돈이 모든 것인, 사회의 폭력적 시스템에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 준영은 처음부터 딱 부러지게 말한다. 너는 나 같은 가난뱅이 대학 강사가 아니라, 돈 많은 남자를 잡아야 한다고. 준영과 연희는 두 가지를 분리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안정을 누리고, 연인과의 밀회를 통해 친밀하고 직접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다. 시스템을 인정하고 어떤 부분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타협이 필요하다. 하지만 결국 준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연희도 마찬가지다. 타협하고 그저 즐기는 것 같았던 그들은, 결국은 서로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함에 회의하고 또 분노를 느낀다. 그들은 시스템을 인정하고 적당히 포기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겠다고 선언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완벽하게 시스템화되지 못한 인간들이었다. 그것은 현수와 병두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준영이라는 인물 역시, 유하 감독이 그린 일련의 남자들과 일맥상통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시스템화되지 못한 순수한 인간들
70년대였다면, 병두는 건달로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병두는 두 가지를 분리한다.어린 시절의 친구와 가족들이 존재하는 한없이 포근하고 다정한 세계와 야비하고 잔인한 폭력이 지배하는 조폭의 세계. 가족이나 친구에게는 부드럽고 섬세한 병두이지만, 건달이 되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다. 자신의 어머니와 똑같은 처지인, 철거를 앞둔 가정집에 가서 협박을 할 때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병두는 공적인 자신과 사적인 자신을 철저하게 분리한다. 그것이 결국은, 그를 몰락시키는 이유가 된다. 반면 민호는 노골적인 폭력의 세계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모든 것은 폭력을 수반한다. 흥행 영화를 만드는 것은, 타인을 짓밟고 정상에 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이용하고 배신한다. 그것이 사실, 이 비열한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양식이다. 그러나 병두만이, 그 법칙을 깬다. 모든 것이 허락되고 용서받는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의 친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 그 약함이, 그 순진함이, 그를 매장한다. 병두의 사악함이 아니라, 병두의 인간적인 개성이 그를 몰락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의 법칙이다. 유하는 비열한 세계의 법칙을 거부하는, 혹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대통령은 두더니, 대통령제 버리자는 국힘…이재명 “정치 복원하자” [영상]
[단독] ‘한덕수 국무회의’에 ‘2차 계엄 의혹’ 안보실 2차장 불렀다
천공 “윤석열, 하느님이 점지한 지도자…내년 국운 열린다”
‘내란 옹호’ 유인촌, 결국 사과…“계엄은 잘못된 것”
윤석열 체포영장 수순…없애려던 공수처에서 수사받는다
1호 헌법연구관 “윤석열 만장일치 탄핵…박근혜보다 사유 중대”
한덕수, 경호처 압수수색 거부에 ‘뒷짐’…총리실 “법 따라” 말만
탄핵심판 질질 끄는 윤석열, 헌재 서류도 수취 거부
[단독] 여인형 “체포명단은 윤석열이 평소 부정적으로 말한 인물들”
검찰, ‘내란’ 윤석열 수사 공수처 이첩…중복수사 해소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