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으로 무장한 채 ‘애국심 마케팅’에 열올리는 광고들
방금 태어난 아기까지 붉은 악마로 규정하니 살짝 무서운 느낌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애국의 계절이 돌아왔다. 붉은 광장이 돌아왔다. 월드컵의 열정이 돌아왔다. 당신을 깨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당신을 깨우는 휴대전화의 벨 소리는 아니고, 당신의 애국심을 깨우는 이동통신회사의 광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SK텔레콤이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고 외치자, KTF는 “우리는 붉은 악마다”라고 선언했다. 이제 우리는 붉은 악마 아니면 대한민국이다. 저렇게 뭉클한 광고를 보고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어쩌면 비국민일지 모른다. 다시 애국의 계절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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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텔레콤 “우리도 배타심·국가주의 경계”
SK텔레콤이 선수를 쳤다. SK텔레콤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시즌부터 월드컵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차들이 지나다니는 시청 앞 광장이 붉은 물결로 채워지는 모습을 교차 편집하면서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이 들려왔다. 올 1월 중순에 시작된 두 번째 광고는 동영상 못지않은 사진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두 번째 광고는 그날의 사진들을 이어붙이는 편집이었다. 간절히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소녀, 감격에 겨워서 고개를 젖힌 청년의 사진 등을 연속해서 보여주면서 그날 얼마나 간절하게 기원하고, 열정적으로 기뻐했는지를 되살렸다. 사진은 실제 2002년 거리응원을 했던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절절한 표정 위에 얹힌 광고 문구는 더욱 간절했다. “추억이라고 부르지 말자. 기적이라고 부르지 말자. 2006년 다시 타오를 불꽃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소녀의 얼굴이 긴장에서 환희로 변하는 순간,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됐다.
흑백의 기억을 컬러의 현실로 살리자는 메시지였다. 마지막 슬로건은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 광고에는 비장미가 넘쳐났다. 2002년의 기억을 되새겨 2006년의 열정을 호명하는 광고였다. SK텔레콤 광고팀 태영훈 과장은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X파일 사건이 터지고, 황우석 신화가 무너지면서 침체되지 않았느냐”며 “2002년의 희망을 되새겨 월드컵의 역동성을 되찾자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태 과장은 “특정인이 아닌 일반인 모델을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는 슬로건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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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가슴이 뛰지는 않았지만 ‘올 것이 왔군’ 했다. 한두 번 무심코 지나치다가 문득 난감해졌다. 광고를 보고 또 보고, 표정이 생생히 느껴질수록 기분이 무거워졌다. 장중한 음악에 얹힌 엄숙한 카피를 들을수록 애국주의의 위력이 무겁게 느껴졌다. 광고는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의 거울이다. 이 광고를 보고 열정을 느낄 국민을 생각했다. 그리고 저 열광의 물결이 다시 재현된다는 생각에 조금은 심란해졌다. 국가주의를 자극할 우려에 대해 SK텔레콤쪽은 “애국심이 배타심으로 표현되지 않도록, 우리도 국가주의를 경계하면서 광고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SK텔레콤의 월드컵 캠페인은 광장에서 시작해 열정적인 표정을 전시한 다음, 애국가 록 버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 번째 광고는 2월 하순부터 전파를 타기 시작한 ‘대한민국 응원가’ 1편. 지루한 조회 시간, 학생들이 맥 빠진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줄지어선 학생들 뒤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록음악으로 편곡된 애국가를 부르면서 윤도현이 등장한다. 학생들이 윤도현이 탄 트럭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신나게 애국가를 함께 부른다. SK텔레콤 월드컵 캠페인을 담당하고 있는 광고회사 ‘TBWA’의 박중욱 대리는 “비장미를 탈피해 친근감을 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박 대리는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는 슬로건도 너무 승패에 집착하지 말고 모두 하나가 돼 월드컵을 축제로 만들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앞으로도 재미를 주는 월드컵 광고를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광고에 나온 록 버전 애국가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붉은 악마와 안익태 재단은 애국가를 록음악으로 편곡해 응원가로 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들의 비판에는 애국가를 광고음악으로 이용한다는,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그리고 경건한 애국가를 경박한 록음악으로 바꿔 부르다니, 이런 정서도 담겨 있다. “애국가는 눈물 흘리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애국주의 비판은 이중의 전선에 걸쳐 있다. 국민 모두를 대한민국이라고 규정하는 애국주의와 애국가를 록음악으로 편곡해서 부르는 애국주의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엄숙주의가 이중으로 비판을 포위하고 있다.
논란 불러일으킨 록 버전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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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F의 월드컵 캠페인은 1월 하순 ‘붉은 악마의 탄생’ 편으로 시작했다. 시작은 한발 늦었지만 비장미는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붉은 악마의 탄생’ 편은 아기의 울음소리로 시작한다. 산부인과의 병상 위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붉은 자막이 뜬다. ‘48,396,208번째 붉은 악마’. 이어지는 한마디, “이 아이도 언젠가 뜨겁게 대한민국을 외칠 겁니다.” 그리고 ‘깨어나라. 우리는 붉은 악마다’라는 자막이 뜨고, “붉은 악마 공식후원사 KTF”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KTF 관계자는 “월드컵 광고가 너도나도 ‘그날의 감동’을 이야기하는 응원 장면의 연속인 상황에서 차별적인 접근이 필요했다”며 “‘붉은 악마의 탄생’은 2006년 월드컵 응원 함성의 탄생을 의미하면서 2006년 모든 국민이 붉은 악마로서 새롭게 탄생하자는 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굳이 ‘탄생’의 이미지로 시작한 것은 SK텔레콤에 응원의 주도권을 내주었던 2002년의 기억을 지우고 2006년에 새롭게 시작하자는 마케팅 의도도 담겨 있다. KTF 광고는 마지막 문구로 붉은 악마의 공식후원사라는 점을 강조한다. ‘48,396,208번째’라는 숫자는 인구통계를 바탕으로 2006년 첫 번째로 태어난 한국인의 추정치라고 한다. 문구상으로는 한국인 모두를 붉은 악마로 규정한 것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새에 내가 붉은 악마였나?”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 블로그에는 이 광고에 대해 “갓 태어난 아이를 48,396,208번째 붉은 악마라고 규정짓는 것도 무리지만 저 숫자는 이미 온 국민이 붉은 악마라는 걸 전제하고 있는데, 대체 누구 마음대로 붉은 악마인가? …온 국민을 대한민국이라는 구호 속에 가두고 있다”는 비판이 올라 있다. KTF 쪽은 비판에 대해 “국민 모두를 붉은 악마로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런 마음이 되자는 호소”라고 설명했다. ‘붉은 악마의 탄생’ 편도 볼수록 대략 난감이었다. 리얼한 병원 분위기에서 생생한 아이의 탄생 장면과 ‘붉은 악마’라는 카피가 맞물리자 살짝 무서운 느낌도 들었다. 역시 기우인가?
붉은 악마의 탄생은 붉은 악마 되기로 이어졌다. 2월 중순 시작된 KTF의 두 번째 월드컵 광고 ‘메가폰’ 편은 명동 한복판에서 한 젊은이가 메가폰을 잡고 목놓아 외치는 소리로 시작된다.
“우리 미칩시다! 미쳐서 외치면 우리는 또 할 수 있습니다! 독일까지 들리도록 뜨겁게 뜨겁게 외칩시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시민들은 젊은이를 ‘돌아이’로 생각하지 않고 젊은이 주변에 모여들어 함께 “대~한민국”을 외친다. 이 광고의 촬영은 광고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카메라를 숨긴 채 진행됐다. 물론 광고라는 사실으 나중에 알려지기는 했지만, 시민들의 반응을 생생하게 담아내기 위한 일종의 ‘몰래 카메라’ 기법이었다. KTF 쪽은 “시민들 반응이 없을 것을 우려해 30여 명의 엑스트라를 대기시켰는데, 시민들이 300∼400명 몰려들어 엑스트라를 돌려보내야 했다”고 전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구호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나라다.
지나친 애국주의는 건강을 해칩니다
애국심 마케팅은 월드컵의 계절이 다가올수록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외환은행 광고는 일찌감치 애국심 마케팅을 선점했다. 외환은행은 지난해 말부터 잉글랜드에서 뛰고 있는 이영표 선수의 일상에서 애국을 발견하는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이영표 선수가 외환은행 런던 지점에 걸린 태극기를 보기 위해 아침마다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고, 내 뒤를 지켜보는 국민들을 생각하면 벤치에서도 앉아 있을 수 없다는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반응도 좋다. 외환은행 광고는 ‘TVCF’ 사이트에서 평점 순위 10위 안에 들었다. 물론 외환은행 광고가 광고적으로 훌륭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 애국심 마케팅은 국민의 호감을 사는 좋은 방법이 됐다. 다시, 광고는 시대의 거울이다. 기업들이 애국심으로 ‘방법하는’ 이유는 국민의 가슴에 애국의 열정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애국의 열정이 뜨거운 만큼 광고의 강도도 뜨거워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칫 과열될 조짐을 보이는 애국주의는 광고의 문제가 아니라 광고를 보는 우리의 문제다. 지나친 애국주의는 국가의 건강을 해친다. 제발 살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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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1등’에 익숙해진 한국인? |
“한국인의 불평이 휴대폰의 아이디어가 됐다” “밥을 빨리 먹어서 자동차 산업 발전 속도가 빨랐다” “눈이 작아서 섬세함이 요구되는 반도체 산업의 최강국이 됐다”.
한국투자증권 광고의 문구다. 예전 같았으면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얻었을 메시지가 ‘말이 된다’는 공감대를 얻고 있다. 이런 메시지가 전파를 타고 공감까지 얻는 분위기는 한국인의 변화한 자아상을 반영하고 있다.
‘한국은 안 돼’라는 열패감에서 ‘한국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뀌고 있음을 드러낸다. 한국투자증권 광고는 나아가 “아이디어가 필요하고, 속도가 생명이며, 섬세함이 요구되는 금융에서 한국이 세계 1등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무섭게 밀려올 금융 한류에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1일부터 한국투자증권은 세 편의 광고를 동시에 내보내고 있다. 각각 중화인민공화국 제20차 경제인대회, 일본의 신세기 시사토론회, 미국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 회의를 배경으로 중국, 일본, 미국의 금융인들이 무섭게 밀려올 금융부문의 한류에 긴장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한국투자증권 홍보실 윤현숙씨는 “부정에서 긍정을 끌어냈다”고 말했다.
물론 호감과 비호감이 엇갈린다. 한쪽에서는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했다”는 반응이 있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이 볼까 두렵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세대별 반응도 나뉜다. 윤현숙씨는 “상대적으로 장년층보다 청년층에서 광고 호감도가 높다”고 말했다. 한국에 대해 콤플렉스가 없는 세대에서 공감대가 높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한국인이 모두 눈이 작고, 밥을 빨리 먹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광고뿐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자부심은 발견된다. 문화방송 드라마 <궁>에서 영국 런던에서 오랫동안 살다 귀국한 율(김정훈)과 율의 어머니(심혜진)가 마주 앉아 “서울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면서 “우리도 촌스럽게 보이지 않으려면 노력해야 한다”는 대사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서울이 런던 못지않게 세련된 국제도시라는 의미가 담긴 대사였다. 예전 같으면 현실감이 매우 떨어지는 대사로 네티즌들의 질타를 당했을 게다. 하지만 이제 그런 대사도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시대가 됐다. 월드컵과 한류는 한국인의 자아상을 그렇게 바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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