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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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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의 감수성, 탈북자를 위로하네

등록 2006-01-05 00:00 수정 2020-05-03 04:24

위태로운 탈북 청소년들을 응시한 영화 <배낭을 멘 소년>의 정지우 감독
침묵에 녹여낸 그들의 자존심과 절절한 그리움, 그리고 인권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국가인권위원회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를 도입하라고 권고하자 일부 언론은 “할 일 안 하고, 안 할 일 손대는 인권위”(<중앙일보> 사설 12월28일치)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인권위가 당장 “할 일”로 북한 인권 문제를 꼽았다. 인권위가 <여섯개의 시선> <별별 이야기>에 이어 만든 세 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 <다섯 개의 시선>에는 북한 인권과 관련해 인권위가 ‘한 일’이 담겨 있다. 이들의 권고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작은 대답인 셈이다. <다섯 개의 시선>은 다섯 편의 단편영화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은 작품인데, 이 중 정지우 감독의 <배낭을 멘 소년>은 탈북 청소년이 주인공인 영화다(상자기사 참고). <배낭을 멘 소년>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한 소녀가 있다. 소녀는 두 번의 시도 끝에 담을 넘은 탈북자(새터민)다. 소녀는 목숨을 걸고 담을 넘었지만, 담 뒤에도 장벽은 놓여 있다. 친구들은 “인육 먹어봤냐”고 묻고, 소녀는 말문을 닫아버린다. 그저 수화로 “아니야. 그게 아니야”라고 절규한다. 소녀, 소년을 만난다. 오토바이를 타는 소년을 만난다. 소년도 “남한 애들보다 잘하는 건 오토바이 타는 것밖에 없는” 탈북 청소년이다. 소녀, 소년에게 도움을 청한다. 소녀가 못 받은 아르바이트 월급을 알아서 찾아오기 위해 둘은 문 닫은 노래방으로 잠입한다. 그리고 소녀가 못 받은 월급만큼 정확히 수를 헤아려가면서 콜라를 배낭에 담는다. “하나, 둘… 서른….” 열심히 수를 세는 건조한 목소리에는 탈북자들의 억울함과 순수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렇게 <배낭을 멘 소년>의 곳곳에는 고통스런 소녀의 숨결이 배어 있다. 정지우 감독은 <해피엔드>와 <사랑니>를 통해 남다른 멜로 감수성을 선보여왔다.

위축이 낳은 거짓말은 반복되고…

어떻게 탈북자 문제를 다루게 됐는지 궁금하다.

=안성의 국립의료원에서 일하는 후배에게 탈북자들의 사연을 들었다(안성에는 새터민정착 지원기관인 ‘하나원’이 있어서 탈북자들이 의료원에 자주 온다). 장인 어른도 피난민이어서 고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차별 문제 중 탈북에 눈길이 갔다.

탈북자 문제는 양쪽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주제일 수 있다. 어떤 보수는 과장하고 싶어하고, 일부 진보는 눈감고 싶어하니까. 고민은 없었나?

=물론 조심스러웠다. 이것저것 생각할수록 점점 어려워졌다. 결국 너무나 뜨거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모두 어찌할 수 없는 존재를 찾은 것이 남한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탈북 청소년이었다. 다 떠나서 탈북 청소년들이 ‘나이 어린 이산가족’이라고 정리했다. 무연고 탈북 청소년은 모든 모순에 적나라하게 노출돼 있는 위태로운 존재다. 이들을 보면 사회의 단면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 <다섯 개의 시선>에 담긴 작품 중에서 유독 <배낭을 멘 소년>은 오랜 울림을 남긴다. 아마 정지우의 시선이 소녀의 마음으로 들어가서, 논리가 아니라 정서로 설득하기 때문일 것이다. <배낭을 멘 소년>은 일종의 침묵에 잠겨 있는데, 침묵이 오히려 마음을 전하는 데 성공한다.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지도 고민했을 것 같다. 인권영화라서 더욱 그랬을 듯한데.

=그 마음의 진심을 보여주면, 나도 저렇게 하겠구나 싶은 공감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별 현장을 보여주면, 죄책감만 들고 피하고 싶은 마음만 들지 않을까 싶었다. 나도 그러니까. (웃음)

소녀의 마음에 집중하면서도 보통 사람의 편견을 놓치지 않는다. 유니폼에 태극 마크를 단 택시기사, 월급을 슬쩍 깎는 노래방 주인 같은 대한민국 보통 사람의 편견이 풍경처럼 스쳐간다.

=대부분의 에피소드들을 탈북자들의 경험에서 따왔다. 탈북자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임금을 깎고 싶은 심리가 발동하지 않나. 아직도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경찰서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숨진 탈북 청소년의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이다.

◆ <배낭을 멘 소년>은 결국 고향에 대한 이야기다. 탈북자들은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을 거쳐 동남아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을 거쳤지만,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소녀과 소녀의 마지막 대사는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소녀가 말문을 연다. “오토바이 천천히 타십시오.” 소년이 되묻는다. “왜?” 잠시의 침묵이 흐른다. “고향에 가야지.” 한국 영화에서 디아스포라(이산)의 쓸쓸한 정서를 이토록 절절하게 그린 장면도 흔치 않을 것이다. 정 감독은 “그들에게서 발견한 것은 절절한 그리움이었다”고 말했다.

소년과 소녀에게서는 쓸쓸함과 함께 자존심도 느껴진다.

=탈북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은 두 가지였다. 정말 자존심이 센 사람들이구나. 그리고 위축돼 있구나. 아무리 자존심이 강해도 위축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한국 사회에서 성장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 적응력이 약하다. 그러다 보면 변명을 하게 되고, 거짓말을 한다고 여겨지게 된다. 낙인찍히는 과정이 전형적으로 반복된다. 탈북자뿐만 아니다. 국제결혼이 10%를 넘는 시대다. ‘금 밖의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

“기획탈북에 관한 장편 찍고 싶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나?

=탈북 청소년들에게는 자존심을 가지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일반 관객에게는 왜 그들의 자존심에 귀기울여야 하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그들은 먼저 온 미래다. 한국 사회가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을 통해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

앞으로 탈북자 문제를 다룬 영화를 더 하고 싶은 생각도 있나?

=그렇다. 이제 막 알아가는 단계다. 만약 장편을 할 수 있다면, 기획탈북에 관한 영화를 찍고 싶다. 기획탈북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 사회의 여러 단면과 인간사의 다양한 우여곡절이 뒤섞여 있다고 느꼈다. 참을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

◆ 정지우 감독은 “이 영화가 소중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영화를 찍는 내내 충만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영화가 내 인식의 심화 과정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하나, 그는 <배낭을 멘 소년>을 찍으면서 “내가 영화를 왜 시작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누군가는 <배낭을 멘 소년>이 10년 전 찍은 그의 단편 <생강>과 정서가 비슷하다고 했다. <생강>은 노동운동을 하는 남편과 노동운동을 중단하고 생계를 책임지는 부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정지우의 처음처럼, <배낭을 멘 소년>이 서 있다.



더욱 깊어진 ‘인권영화’의 시선

<여섯개의 시선>에서 <별별 이야기>를 거쳐 <다섯개의 시선>으로

<다섯 개의 시선>에는 다섯 개의 수작이 담겨 있다. 박경희 감독의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는 다운증후군 소녀 은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언니가…>는 은혜의 일상에 바탕을 두고 차별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은혜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모두 보여주는데, 특히 은혜가 아줌마 친구와 함께 동요를 부르는 자전거 신과 은혜와 엄마가 호흡을 맞춰 춤을 추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마술 같은 행복을 안겨준다. <송환> 등을 만들어온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계의 ‘거장’ 김동원 감독은 2003년 겨울 거리에서 얼어죽은 중국 동포 김원섭씨의 이야기로 <종로, 겨울>을 만들었다. 김 감독의 카메라는 김원섭씨를 대신해 김원섭씨의 시선으로 그날, 그 거리의 살풍경을 재현한다. 중국 동포들이 증언하는 한국 사회는 겨울공화국이 그날, 그 거리만의 비정한 풍경이 아님을 보여준다.
젊은 감독들의 재기발랄한 시선도 더해졌다. 류승완 감독의 <남자니까 아시잖아요>는 ‘한국 남자’가 빠지기 쉬운 차별 의식을 한밤의 포장마차를 배경으로 보여준다. 마치 내 이야기인 듯, 그의 이야기인 듯싶어 한 장면 한 장면을 보다가 웃다 보면 결국엔 씁쓸함이 입가에 남는다. 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남자니까…>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장진 감독도 <고마운 사람>으로 하나의 시선을 보탰다. 장 감독은 특유의 상상력으로 고문수사관의 사회적 ‘신분’을 뒤집어 비정규 노동자로 재정의한다. 어제의 관점에서는 민주의 적으로만 여겨졌던 인물이, 오늘의 시선으로 보면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 노동자였다는 것이다. 설정부터 전복적인 영화는 곳곳에 블랙코미디를 장착하고 있다. <여섯 개의 시선>에서 <별별 이야기>를 거쳐 <다섯 개의 시선>으로 오면서 인권영화의 시선은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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