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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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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생, 그들이 말을 건다

등록 2005-12-23 00:00 수정 2020-05-03 04:24

출판평론가 한기호씨가 선정한 올해의 책, <달려라 아비>는 무엇을 보여주는가…아버지와의 대화를 시도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몸부림치는 젊은이의 초상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판매 부수로만 따지면 ‘올해의 책’은 유일하게 밀리언셀러에 오른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탄줘잉, 위즈덤하우스)이다. 이 책은 감동서지만 과거의 감동서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사랑에 송두리째 걸어보라는 등 개인의 행동지침을 일일이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 독자는 젊은이인데 그들은 이렇게 좌표를 정해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다.

감동서와 임파워먼트의 유행

세상에 던진 메시지로만 보면 ‘올해의 책’은 한비야가 월드비전 긴급구호 5년 동안의 체험을 정리한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푸른숲)가 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몸으로 실천하면서 보여주는 것은 먹느냐 먹히느냐의 무한 생존경쟁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상생의 철학이다. 달리 말하면 개인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즐기되 자신만이 지닌 능력을 밖으로 표출하는 임파워먼트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올해의 키워드로 임파워먼트를 선정했다.

올해 가장 운이 좋은 책이라면 미하엘 엔데의 <모모>(비룡소)일 것이다. 이 책은 올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이야기 전개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소도구’로 세 차례나 등장했다. 그 바람에 드라마 방영 이후에만 60만 부나 팔리는 행운을 잡았다. 동일시의 대상이 영웅에서 스타로 변한 지 벌써 오래니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걸출한’ 책이 없다. 그래서 올해의 책을 선정하라는 ‘엄명’에 딱히 이것이라고 내놓을 게 없다. 그래도 고르라니 나는 올해의 책으로 감히 김애란의 소설집 <달려라 아비>(창비)를 추천한다. ‘아니 겨우 그 책’이라고 말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맞다. 문체미학으로 보더라도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게다가 1980년생 신인의 첫 소설집이다. 더구나 책도 이제 겨우 2만 부를 넘겼다. 그런 책을 어떻게 올해의 책으로 제시하느냐고 나의 ‘독선’을 질책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터다. 그러나 이 소설은 세상의 변화를 읽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한겨레21>의 독자라면 거부감을 가질 만도 한 세계화의 ‘전도사’ 토머스 L. 프리드먼이 늘 강조하는 것은 개인이다. 그는 최근에 <세계는 평평하다>(창해)라는 책에서 아웃소싱을 예로 들어 둥근 지구를 평평하게 만드는 힘이 국가나 다국적기업이 아닌 개인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미국의 수많은 기업이 인도에서, 일본의 수많은 기업이 중국에서 이미 상당 부분을 아웃소싱하고 있다. 인도의 B2K라는 회사는 이 순간에도 전세계의 사업가들에게 인도의 개인비서를 소개해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소개한 한 기사에는 가난한 인도 소년이 하버드 여대생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식의 선정적인 제목이 붙기도 했다.

그같은 일이 소수에게는 큰 ‘기회’가 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절망감만을 안겨줄 수도 있다. 아웃소싱 자체가 기업가가 비용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니 말이다. 이제 자본가는 ‘동네’가 아니라 전세계에서 인력을 고를 수 있게 됐으며, 그때 고려하는 것은 단지 능력만이 아닐 것이다. 그 대상이 되는 존재는 어떻게 될까?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질서가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니 언제나 칼날 위를 걷는 심정이 아닐까.

단카이 주니어 세대의 ‘하류인생’

세상일에 지치게 되면 사람의 행동은 엇박자가 될 수 있다. 일본은 ‘1억총중류사회’(1억 인구가 중산층으로 사는 사회)를 추구해왔다. 그를 주도한 것은 패전 직후에 태어난 단카이 세대(1946~50년생)다. 그들은 타고난 근면성과 기술력으로 경제 번영을 이뤄왔고, 시스템에 잘 적응하기만 하면 모두가 중산층으로 잘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이때 중류사회가 붕괴할 조짐이 나타났다.

배울 만큼 배우고 능력도 충분한 단카이 주니어 세대(1971~75년생)가 하류 생활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류 인생은 먹고사는 것을 걱정할 만큼 궁핍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단순히 소득만 낮은 게 아니라 배우거나 일할 의욕, 커뮤니케이션 능력, 생활능력 등 살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의욕이 낮은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는데, 생활태도에서만은 ‘나다움’(자신다움)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집과 회사밖에 모르고 살아온 단카이 세대는 ‘내 자식만은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길 바란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자식뻘인 단카이 주니어 세대가 세상의 주역으로 올라선 지금, 그들은 장래의 수입을 꿈꿀 수 없을 뿐 아니라 정리해고의 위기에 일자리도 찾기 힘들 정도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환경이 되자 ‘자아 붕괴’를 피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하류 인생을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는 급격하게 양극화되기 시작했다.

<달려라 아비>의 표제작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 집을 나간 뒤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소설에서 아버지는 공원에서 자식을 버리고 떠나는 등 늘 사라짐을 반복한다. 올해 창비 신인소설상을 수상한 1984년생 김사과의 ‘영이’라는 단편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늘 술병을 끼고 살면서 폭력을 행사한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아버지…

그들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누구인가. 보릿고개를 겪으며 성장했고 박정희 정권 아래서 성년기를 맞았으며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고 국가와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세대다. 그런데 그 결과는? 지금은 대학생들이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 교문 밖을 나가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실종됐거나 술병이나 끼고 사는 사람처럼 비칠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와 자식은 일본의 두 세대에 절묘하게 비견된다.

외국 소설의 범람 속에서 대단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이 소설들에서 1980년대생 작가들은 자신을 ‘버린’, 그래서 늘 불면의 밤을 보내게 만든 아버지와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이는 불가해한 세상을 사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내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대화’를 찾아갈 것이다. 이는 내년, 나아가 21세기 우리 사회를 읽는 중요한 키워드다. 그래서 나는 감히 <달려라 아비>를 올해의 책으로 골랐다.



인간에 관한 가장 대담한 질문

[심리학 분야 올해의 책]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가 도드라진 이유



20세기 말에 동아시아의 출판인들이 21세기의 책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논란은 분분했지만 하나로 모아진 의견이 있었는데 바로 이야기성이다. 그것이 파트워크로 잘게 쪼개진 채 인터넷을 떠도는 정보와 차별화되는 지점일 터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로렌 슬레이터, 에코의서재)는 인간에 관한 가장 대담한 질문을 가장 대담한 방식으로 제기해 세상을 놀라게 한 20세기의 실험 10가지를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놓은 책이다. 달리와 라타네의 사회적 신호와 방관자 효과라는 실험을 예로 들어보자.
1964년 뉴욕에서 술집 지배인으로 일하던 캐서린 제노비스는 새벽 3시에 귀가하는 중이었다. 그때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가 칼로 등을 찔렀다. 캐서린은 도와달라고 소리쳤고 동네 사람들 집에 불이 켜졌다. 창을 통해 동네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를 쳐다봤고 범인은 도망쳤다. 그러자 불빛이 꺼지고 마을은 다시 조용해졌다. 범인은 35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같은 범행을 저질렀지만 사건을 목격한 38명 중 어느 누구도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 실험은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많을수록 개인이 느끼는 책임감은 적어진다는 ‘책임감 분산’ 현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
올해 인문서 시장은 심리학책이 주도했다. 2002년에 출간된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디니, 21세기북스)은 80만 부를 넘기며 시장을 주도했고, <유혹의 심리학>(파트릭 르무안, 북폴리오), <선택의 심리학>(배리 슈워츠, 웅진지식하우스), <욕망의 심리학>(카트린 방세, 북폴리오) 등의 책들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학문적 지식을 바탕에 깔면서도 대중이 편하게 읽으며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탄탄한 텍스트라는 점이다. 처세나 심리치료책이 유행하던 과거보다 한 단계 진전한 것이다. 심리학은 사람의 정신과 행동에 관한 학문이다. 올해 대중은 자기 억압을 포지티브하게 극복하기 위해 심리학책을 즐겨 찾았다.




‘요다’할아버지의 지혜

[인문서 분야 올해의 책]

거시적 담론을 넓은 품으로 소화하는 신영복의 <강의>



<강의>(신영복, 돌베개)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 동안 감옥생활을 한 저자가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등 고전을 오늘에 되새겨본 책이다. 저자는 감옥생활의 엄혹함을 고전을 벗 삼아 풀어냈다. 그 경험을 살려 대학에서 ‘고전강독’이라는 강의를 했고, 책은 그 강의를 풀어낸 것이다. 저자는 기초적인 부분만 이야기했다고 밝혔지만 고전에 대한 기존 통설을 모두 소화해 자기 목소리로 풀어내는 품이 꽤 넓어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어야 책의 내용을 따라갈 수 있다.
책에 등장하는 고전들은 기원전 7세기부터 2세기경까지, 고대국가가 건설되면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거시적 담론이 필요한 시기에 탄생했다. 지금은 세상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는 시대다. 따라서 우리는 고전을 통해 이 시대의 문제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 책은 그런 문제의식에 맞춤한 책이다.
이 책을 올해를 대표하는 책으로 선정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요다형’ 책을 대표한다는 점이다. 요다는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선지자로, 요다형 책이란 할아버지가 인생 경험을 녹여 손자에게 이야기해주는 듯한 형식의 책을 말한다. 따라서 독자는 저자의 30년 공부를 책 한 권으로 얻을 수 있는 셈이다.
다른 하나는 구어체 문장으로 씌었다는 점이다. 올해를 대표하는 인문서에는 이 밖에도 <대화>(한길사)와 <대담>(휴머니스트)이라는 구어체 텍스트가 있다. <대화>는 ‘야만의 시대’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낸 ‘사상의 은사’ 리영희가 자신의 역정에 대해 문학평론가 임헌영과 대담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대담>은 인문학자 도정일과 자연과학자 최재천이 생명공학 시대 인간의 운명을 테마로 이야기를 나눈 대담집이다.
세 책은 모두 텍스트에 말하는 이의 ‘소리’와 ‘마음’이 가미돼 있어 인간의 뇌라는 이성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 즉 감성까지 움직여 책을 읽으며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인센티브의 힘’을 아는가

[경제학 분야 올해의 책]

기본과 원칙을 강조하는 <괴짜 경제학>



<괴짜경제학>(스티븐 레빗 외, 웅진지식하우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마디로 ‘인센티브의 힘’이다. 저자에 따르면 경제학은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까를 궁리하는 학문, 즉 인센티브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에게 좋은 일은 많이, 나쁜 일은 적게 하도록 설득하는 수단이다. 이 책은 스모경기의 부패, 마약판매상의 재정분석, 낙태의 합법화가 미치는 영향 같은 일상생활 속에 숨겨진 진실에 대해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결론을 도출하고 있는데, 상식과 통념을 깨는 발상의 전환이 바로 이것이다라는 점을 실증해 보이고 있다.
이 책을 비롯해 올해 경제경영서 가운데 화제가 된 책들은 한결같이 ‘기본과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경제경영서로는 이례적으로 30만 부나 팔린 <블루오션>(김위찬 외, 교보문고)은 피 터지는 시장(레드오션)에서 혈투를 벌일 것이 아니라 경쟁이 없는 시장을 찾아나설 것을 촉구한다. 저자는 블루오션을 창출하기 위한 핵심 개념으로 ‘가치의 혁신’을 강조한다. <서른살 경제학>(유병률, 인물과사상사)은 생존마저 위협받는 전환기의 30대가 고령화 시대에 대비하면서 품위 있게 늙어갈 수 있는 경제학의 원칙들을 ‘지식’이 아닌 ‘사고방식’으로 제시한다. 30대라는 나이는 직장 초년병을 거쳐 수많은 아이디어를 내야만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쾌도난마 한국경제>(장하준 외, 부키)는 한국 사회의 경제 현안을 대화로 풀어낸 책인데, 이념적 좌표를 넘나들면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는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경제경영서는 막연히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협박형 정보’를 담은 책이나 ‘돈’과 ‘부자’를 화두로 한 처세서, 재테크 같은 일시적인 테크닉을 다룬 책들이 주류를 이뤘다. 지난해에는 ‘땅테크’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올해는 그보다 한 단계 진전해 한 사람의 인생을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은 넓은 ‘안목’, 즉 기본이나 원칙을 강조하는 책들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또한 우리 사회가 진전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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