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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평생교육의 터전으로

등록 2005-11-18 00:00 수정 2020-05-03 04:24

현장체험학습과 주5일제를 밝히는 ‘열린 박물관’의 가능성을 찾아서
체코·그리스·스페인의 흥미로운 개방형 프로그램들을 벤치마킹해보자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조상의 발자취를 더듬는 데는 현장을 찾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 예컨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가면 80여 년 동안 이어진 근·현대사의 수난과 박해를 가슴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다리품을 판다고 해서 생생한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국 각지에 조성한 민속마을에서 역사를 더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차라리 조상의 숨결이 스며 있는 문화재를 수집해놓은 박물관을 찾는 게 나을 것이다. 만일 박물관의 기능이 역사적 유산의 전시와 보존 등에 머물지 않는다면 대중의 비판적 의식 수준을 높이는 데 이바지할 수도 있다. 희미한 역사를 현재화하는 박물관 교육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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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박물관만큼 여건이 좋은 평생교육 시설을 찾기 힘들다. 다양한 시청각 실물 자료를 이용한 박물관의 체험교육은 교과서보다 훨씬 강렬한 교육 효과를 안겨준다. 특히 제7차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 개정으로 박물관 관련 내용이 확대되면서 수요자의 교육적 욕구가 높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박물관은 전문가와 교육 공간이 협소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박물관이 평생학습관으로 지정된다면 다양한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박물관으로서 평생학습관으로 지정된 곳은 제주교육박물관이 유일하다. 그만큼 박물관이 평생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셈이다.

프라하 국립박물관, 이집트 학자를 부르다

정말로 박물관은 소장품을 전시하는 유물의 무덤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일까. 지난 11월3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김우림)이 ‘도시역사박물관의 평생교육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마련한 국제심포지엄은 박물관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이 심포지엄에는 한·중·일 동북아 3개국을 비롯한 체코, 그리스, 스페인 등 박물관 선진국의 관계자들이 참가해 열린 박물관으로 나아가는 다양한 방식을 논의했다. 박물관이 사회적 기능이 강화된 문화공간으로서 관람객을 만나는 방식을 공유한 것이다. 이는 전시 프로젝트 기획에서 지역사회와 관계맺기까지 포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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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유럽에는 전세계 박물관의 50%인 2만여 개가 있다. 주로 애국주의 사상에 근거해 설립된 체코의 박물관 수는 400여 개로 영국(2300여 개)이나 이탈리아(2천여 개), 프랑스(1400여 개) 등보다 규모는 작은 편이다. 애당초 정치적 선전 구실을 했던 체코의 박물관은 ‘새로운 사회’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나가고 있다. 체코 박물관보안위원회 파벨 지라섹 위원장은 “크고 작은 박물관들이 지역 사회에 뿌리내려야만 적절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할 수 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박물관의 일방적인 프로그램은 통하지 않는다. 프로그램 개발 단계부터 학교와 협력해 학생들이 박물관과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박물관이 전시물과 관람객을 연결하는 중개자의 자리를 찾기도 한다. 근래에 프라하 국립박물관이 개방적인 기관으로 거듭난 것도 열린 프로젝트의 가시적인 성과에서 비롯됐다. 예컨대 이집트전을 열면서 이집트 학자들이 작업 결과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자리를 마련하는 식이다. 지역 사회의 단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지난 1997년부터 6년 동안 이어진 ‘열린 박물관의 문’ 프로젝트에는 시민단체인 개방사회펀드가 후원금을 내면서 각계 전문가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박물관이 평생학습 기관 구실을 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은 결과였다.

아테네, 미취학 아동부터 성인까지 맞춤식

국내에서 박물관은 배움터 구실은 차치하고 볼거리도 충실하지 못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문가의 지적 욕구를 채우기에 역부족이고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하는 탓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적절한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게 관건이다. 그리스의 아테네 시립박물관은 보존하고 찾아내며 전파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일생에 걸친 박물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취학 전 어린이 교육에서 시작해 청소년·성인 등에 걸맞은 프로그램을 마련해 초보자가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교육 프로그램은 도시 역사에 관한 평생교육의 공백을 메우면서 대중의 관심을 수도 아테네를 결정지은 그리스의 근대사로 돌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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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맞춤식 교육’이 돋보인다. 미취학 어린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에는 역사를 동화나 연극으로 바꾸거나 역사에 그리스 신화를 곁들이는 방식으로 집중력과 흥미를 유지시킨다. 초등학교 고학년들은 연극을 통해 역사 속의 인물이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림이나 조각, 건축 등에 관한 교육도 양방향의 소통을 꾀하는 교구를 통해 이뤄진다. 성인이라면 ‘위대한 여행가들의 그림과 조각으로 살펴본 아테네의 모습’ 같은 주제별 투어나 유적 가이드 투어, 다른 박물관 투어 등에 참가한다. 이런 전 생애 교육 프로그램의 이수자들은 박물관에서 자원봉사자나 국제행사 도우미로 활동하게 된다.

그동안 박물관은 개방적인 교육 공간으로 자리잡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박물관을 사회에 개방하자”는 구호를 마르고 닳도록 부르짖은 게 사실이다. 국내의 박물관도 예외는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만 해도 새로 문을 열면서 학예연구실 중심의 연구 기능에서 벗어나 평생교육과 문화 소비의 장을 지향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문제는 박물관의 교육 프로그램이 자체 역량만으로는 만족스런 결과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선진 박물관들이 대학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컨대 스페인의 카탈루냐미술관과 바르셀로나대학은 30여 년째 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박물관과 대학이 협력하면 전시의 질도 좋아지게 마련이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선사시대 고고학을 전문으로 하는 산이시드로 박물관의 경우 올해 선사시대 공동체를 재현하는 ‘철기시대 유적지’전을 마련하면서 대학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아 ‘마드리드, 펼쳐진 책’이라는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했다. 이는 학교 교사들에게 기본 자료를 제공해 박물관 현장학습의 지침서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마드리드 시립박물관 카르멘 프리에고 관장은 “스페인의 박물관은 사회적 기능이 강화된 문화공간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기능을 추구하면서 커뮤니케이션과 레크리에이션 장소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디지털 기술이 고리타분해 보이는 박물관에 적용돼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도 한다. 새로운 기술의 언어로 역사와의 대화를 꾀하면서 전시 공간에 갇힌 유·무형의 유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쌍방향 디지털 미디어 아트에 힘입어 오래된 유물이 오늘의 세대와 대화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루카박물관은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한 도시 유적지 동영상으로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만들어 관객에게 제공한다. 이를 이용하면 각각의 공간에 들어설 때마다 관련된 이미지나 음악이 나오면서 역사의 안과 밖을 동시에 경험하도록 한다. 박물관이 능동적으로 관객을 만나려는 시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제 박물관이 역사라는 무덤에서 벗어나는 모습은 아시아의 중국과 일본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00여 년 남짓한 박물관의 역사를 지닌 중국도 이미 1980년대부터 평생교육 시스템 구축 차원에서 전문가 위주의 운영에서 사회와 대중을 위한 서비스 기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일본의 박물관은 도시화에 따른 공동체 의식 상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 구실을 고민하고 있다. 에도도쿄야외건축박물관 사사키 히데히코 학예원은 “박물관의 생애학습을 경영의 관점에서 재검토해보면 효용성은 충분하다”면서 "전시와 교육, 교류를 토대로 멋과 활기를 창출하는 게 중요하다. 전시만으로 박물관의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재미와 오락의 부가적 기능도 제공해야

현재 우리나라에는 360여 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 교육과정이 개인의 능력과 창의성을 중시하면서 현장체험 과제물이 늘어나고 주5일제에 따라 토요 휴업일이 생기면서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박물관이 수요자의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프로그램을 내놓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고려대 권대봉 교수(한국평생교육학회장)는 “박물관이 평생교육의 터전으로 자리잡으려면 스스로 새로운 역할에 대한 인식을 갖는 게 필요하다”면서 “도시역사박물관은 에듀·인포·테인먼트 센터 구실을 하면서 재미와 오락을 부가적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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