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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막골의 덫, 미국을 잡다

등록 2005-09-08 00:00 수정 2020-05-03 04:24

남북화해를 대중적으로 승인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판타지가 아쉬운 이유…피해의식 먹고 자라는 민족주의는 새로운 속죄양으로 미군을 골랐는가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동막골은 모두를 웰컴한다. 탈영한 국군도, 길 잃은 인민군도, 추락한 미군까지. 하지만 동막골이 웰컴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는 무장한 연합군(유엔군 특히 미군)이다. <웰컴 투 동막골>(<동막골>)은 인민군을 환영함으로써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이데올로기의 저울에 균형을 맞춘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인간의 숨결을 얻었던 인민군은 <동막골>에서 정의로운 휴머니스트로 거듭난다. <동막골>이 성취한 진보다. 하지만 <동막골>은 비극적 역사의 원인을 순결한 한민족(내부자)의 땅을 공격하는 냉혈한 미군(외부자)에 돌림으로써 또 다른 불균형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동막골> 다시 보기를 해야 할 이유다.

간미 느껴지는 ‘인민군 3종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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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막골>은 평화로운 한반도에 대한 노골적인 은유다. 평화로운 동막골은 외세에 훼손되지 않은 한반도다. 불행히도 현대사에서 그런 한반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막골>은 판타지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실제 <동막골>에는 나비가 무시로 날아다닌다. 장자의 호접몽처럼. 판타지에는 지금 우리가 꿈꾸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더구나 역사에 얽힌 판타지라면, 오늘 한민족이 꿈꾸는 것이 담겨 있다. 지금 한민족이 꾸는 꿈은 무엇인가? 수사로 요약하면 “순결한 어머니의 땅”, 구호로 정리하면 “남북이 단결하여 외세를 몰아내자!”. 영어로 번역하면 “양키 고 홈!”, 북한식으로 말하면 “우리 민족끼리”. 뭐 그쯤이 아닐까? 물론 동상이몽이다. 아직도 남한 인구의 절반은 “미국 만세”에 공감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머지 절반은 “양키 고 홈”의 꿈을 꾸고 있다. 이미 <동막골>의 국민적 흥행몰이는 “양키 고 홈”의 꿈이 단순한 일장춘몽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어쩌면 <동막골>의 흥행은 남북 화해 정책에 대한 문화적 승인이다. 김대중과 노무현, 두번의 개혁 정권이 가장 ‘진보’시킨 분야라면, 그것은 북한에 대한 인식이다. 관객 500만명을 넘어 1천만명을 향해 질주하는 <동막골>의 흥행몰이는 남북 화해에 대한 국민적 승인을 상징한다. 이제 관객은 <동막골>이 인민군의 인간미를 묘사해도 반발하지 않는다. 사실 <동막골>의 인민군 캐릭터는 그리 새롭지 않다. 80년대 빨치산 소설 속의 인민군 이미지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묵묵하고 책임감 강한 이면에 인간미까지 숨기고 있는 인민군 장교 리수하(정재영), 무언가 더 잃을 것도 없는 듯한 소년병 서택기(류덕환), 적당한 비겁함 때문에 오히려 인간미가 느껴지는 늙은 군인 장영희(임하룡). <태백산맥> 같은 소설을 읽었을 사람들에게는 조금 식상한 (농담을 하자면) ‘인민군 3종 세트’다. 리수하는 잠든 국군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평화로운 인물이 되고, 한국전쟁 발발 원인에 대해 “우리가 쳐내려갔어”라고 커밍아웃해서 객관적인 인물이 된다. 심지어 그는 표현철(신하균)에게 “편한 척, 친한 척 지내는 건 어떡한?”이라고 제안해 화해를 주도한다. 결국 국방군과 인민군으로 구성된 ‘동막골 연합군’은 진짜 연합군(유엔군)의 동막골 폭격에 맞서 합동작전에 돌입한다. 이렇게 민족공조는 완성된다. 어쩌면 <동막골>은 북한 바로알기 운동의 (뜻밖의) 가장 대중적인 성취다. 우리는 여기까지 진보했다.

한민족은 순결한 백의민족인가?

하지만 <동막골>은 속죄양의 정치학을 버리지 못한다. 인민군을 용서했으니 또 다른 속죄양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민족 내부에 대한 온정 어린 묘사는 민족 외부에 대한 냉정한 평가로 이어진다. 한반도의 비극이 한민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속죄양이 필요하다. 이제 미군은 제2의 일본군이다. 어쩌면 21세기의 인민군이다. 그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다. 한민족의 순결함을 위해 미군은 불순함을 뒤집어써야 한다. 영화 속에서 전쟁이 벌어졌다고 하자 동막골 사람들은 “왜놈이가 되놈이가”라고 묻는다. 그들의 순박한 질문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동막골>의 미군 묘사는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동막골을 폭격할 것인지를 놓고 연합군은 논쟁을 벌인다. 미군 장교는 무조건 폭격을 주장한다. 한국군은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반박한다. 한국군의 항변은 묵살된다. 결국 동막골 폭격은 결정된다. 이처럼 연합군 내부의 균열을 통해 한국군은 그마나 구제받고, 미군은 철저한 냉혈한으로 강조된다. <동막골>의 판타지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의 원인을 외세로 돌리고 싶어하는 민족주의가 숨어 있다. 다시 영화로 피드백. 마침내 연합군은 동막골에 쳐들어오고, 순결의 상징인 여일(강혜정)을 죽인다. 그리고 ‘동막골 연합군’은 진짜 연합군의 폭격을 유도하다가 장렬히 전사한다. 그리하여 순교의 드라마는 완성된다. <동막골>은 넓게 보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의 첫 자막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저 불가해한 비극 앞에 누군가는 속죄양이 돼야 한다. 한민족은 역사 앞에 무죄가 되고 싶어한다. 모든 책임을 외세의 대명사인 미군에 뒤집어씌움으로써 한민족의 책임은 면제된다. 정말 한민족은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을 만큼 순수하기만 했는가?

그렇다면 스미스는 누구인가? 그는 비무장 외국인, 하멜 같은 존재다. 스미스는 전투기 추락과 함께 무장해제되고, 점점 동막골에 동화되면서 민간인이 된다. 이제 스미스는 동막골(한반도)에 서양문화(미식축구)를 전파하는 외국인일 뿐이다. 나중에는 동막골의 평화를 지키는 문물(추락한 전투기의 무기)을 전해준다. 그리고 ‘동막골 연합군’에 가세함으로써 미군에 맞서 평화를 지키는 미국인의 지위를 획득한다. <동막골>은 스미스를 통해 미군과 미국을 분리하지만, ‘미국물 든’ 한국인에는 긍정적이지 않다. ‘동막골 연합군’ 5인방 중에서 국방군 위생병 출신인 문상경(서재경)은 가장 ‘뺀질거리는’ 인물이다. 그는 일할 때도 뺀질거리고, 폭격을 앞두고도 달아나려 한다. 그의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은 그의 꿈이 ‘미군 구락부 지배인’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동막골>은 미국에 대한 혐오를 바탕에 깔고 있다.

<동막골>의 민족주의는 오늘의 진보와 내일의 위험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래서 <동막골>의 판타지는 달콤하지만 위험하다. 지금 여기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순결한 백의민족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피해의식을 먹고 자란다. <웰컴 투 동막골>을 ‘웰컴’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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