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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주부들의 비밀스러운 일탈

등록 2005-07-22 00:00 수정 2020-05-03 04:24

숨기는 게 많아 묘하고 현실적인 미스터리 멜로극 <위기의 주부들>
미국가족협회 비판받은 문제작, 한국 공중파에도 상륙한다

▣ 손주연/ <스카이라이프> 기자 purple0402@hani.co.kr

카메라가 평온해 보이는 마을의 평범한 일상을 훑으면 한 중년 여성이 자신을 “메리 앨리스 영”이라고 소개한다. 이어지는 그의 경쾌한 내레이션. “…모든 게 평상시와 다를 게 없었어요. 가족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고, 집안일을 하고. 보통의 다른 날들과 똑같은 하루를 보냈답니다. 그것이 바로 놀라운 이유예요. 제가 갑자기 붙박이장을 열고,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권총을 꺼내들었으니까요.” 이렇게 돌연 자살한 메리 앨리스는 이후 이 드라마의 해설자가 돼 자신의 가족과 이웃들의 삶을 소개하고 그들의 은밀한 비밀을 폭로한다.

로라 부시도 느낀 동질감… 매력남 인기 가세

그의 이야기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은 가깝게 지내던 이웃 주부 4명이다. 남편과 이혼한 뒤 새로운 사랑을 찾으려고 노력 중인 수잔, 말썽꾸러기 아이 넷에게 시달리는 전직 커리어우먼 리네트, 끔찍하게 완벽을 추구하는 주부 브리, 원하는 것을 모두 가졌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전직 모델 가브리엘이 그 주인공. 첫 에피소드는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에 놀란 네 친구가 유품 정리 중 “나는 네가 한 짓을 알고 있다. 정말로 역겹더군. 사람들에게 폭로해버릴 거야”라는 내용의 협박편지를 발견하면서 끝난다. 이는 이 시리즈가 앞으로 미스터리를 포함한 독특한 멜로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미스터리와 멜로를 섞은 기묘한 장르인 까닭에 제작하기가 힘들었던 <위기의 주부들>은 초반의 우려를 뒤로 하고 로라 부시를 텔레비전 앞에 앉히고, 매회 15% 이상의 시청률을 보이며 3천만명의 팬을 거느렸다. 또 지난 2000년부터 시청률 1위 자리를 빼앗겨본 적 없는 와 치열한 순위 다툼을 했다. 백악관 출입기자 만찬에서 “대통령이 밤 9시에 잠들면 나는 <위기의 주부들>을 튼다. 나야말로 위기의 주부다”라고 말한 로라 부시의 영향으로 더욱 유명세를 탄 이 시리즈는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싱가포르, 네덜란드 등에도 수출됐다. 이 중 노르웨이에서는 무려 42%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고, 독일 함부르크에는 드라마 홍보를 위한 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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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주부들>이 미국을 넘어 세계 시청자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섹스 앤 더 시티> 속 언니들의 ‘무조건 혹은 대부분 까발리기’와 정반대의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적당히 감추고, 적당히 거짓말하는 이들은 일과 남자, 섹스를 사랑하고 도무지 속마음을 감출 줄 모르는, 그래서 너무도 쿨해 보이는 30대 뉴요커들과는 분명 다르다. <위기의 주부들>은 주인공의 생각과 감정을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도 현실 속 우리처럼 (거창하진 않지만 남들에게 알리고 싶진 않은) 비밀이 있음을 역설하며 많은 부분을 감춰둔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청자들은 “그래서 현실적”이라고 입을 모으며 브라운관 앞에 몰려들었다. 비밀(을 지키고 싶은 마음)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그들을 통해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며. 이는 판타지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 현실을 꿈꿨던 <섹스 앤 더 시티> 속 언니들이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현실감이다.
극의 강약은 내레이션을 하는 메리 앨리스가 이들의 비밀을 조금씩 드러내기도 하고 숨겨주기도 하면서 조절한다. 흥미로운 점은 숨기고 싶었던 주인공의 진실이 드러나면 이야기는 오히려 미궁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혼녀 수잔이 매력적인 배관공 마이크에게 끌리는 본심을 드러내면 그간 감춰두었던 마이크의 미스터리한 모습을 보여줘 도무지 다음회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식이다. 여기에 같은 마을에 살며 주인공 4명의 일탈을 ‘돕는’ 남자 배우들의 매력이 더해지면서 시리즈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위스테리아에 이사와 수잔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배관공 마이크, 가브리엘과 바람을 피우는 어린 정원사 존, 가브리엘의 부자 남편 카를로스가 그들인데, 적당히 섹시하고 잘생긴데다 간혹 친절하기까지 한 이들은 (주부인) 나에게도 가슴 떨리는 로맨스가 시작될 수 있다는 묘한 가능성을 주며 시청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더빙과 가위질 동원되려나? 관심 집중

<위기의 주부들>의 또 다른 재미는 주인공들의 패션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다. 별거 중인 남편을 유혹하기 위해 브리가 입은 붉은 ‘라펠라’ 속옷은 세트당 300달러라는 고가인데도 방송 직후 품절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속옷 제작사 라펠라의 한 관계자는 “<007>에 출연했던 핼리 베리의 오렌지색 비키니에도 큰 반응이 있었지만, <위기의 주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 <위기의 주부들>의 인기를 확인시켰다.
이 재미있는 시리즈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지난 5월 말. 유료 영화채널 ‘캐치온’을 통해서다. 하지만 오는 24일부터는 한국방송을 통해서도 볼 수 있게 됐다(매주 일요일 저녁 11시15분 방송). 매우 기쁜 일이지만, 다소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위기의 주부들>이 미국가족협회 등으로부터 “멀쩡한 주부의 일탈을 유도해 가족의 가치를 해친다”는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던 ‘문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금 부드러워지긴 했어도 여전히 보수적인 한국방송이 ‘멀쩡한 주부의 일탈’을 그린 <위기의 주부들>을 어떻게 포장할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한국방송에서 방송되는 외화시리즈는 모두 더빙 작업을 거치고, 이 과정에서 표현의 수위가 조정될 여지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체적인 맥락을 해치는 더빙 작업이 있을 리 없겠지만 말이란 조금만 표현을 바꾸어도 전혀 다른 뜻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부디 한국방송이 주인공들의 고민과 거기서 비롯된 일탈 혹은 일탈의 욕망이 ‘가족의 가치를 해치는’ 것이 아닌 팍팍한 우리의 진짜 모습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길 바란다. 그 점이 세계 시청자들이 <위기의 주부들>에 열광한 이유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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