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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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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유령’ 있다!

등록 2005-06-23 00:00 수정 2020-05-03 04:24

세계적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오리지널 팀의 한국 개막 공연 현장
컨테이너 21대분이 만든 명장면 5선, 자막 포기하고 봐도 좋아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무려 5분에 걸친 기립박수가 여섯번의 커튼콜 이후까지 지속됐다. 팬텀이 <밤의 노래>(The Music of the Night)를 들려주고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뒤 객석은 또 다른 소용돌이에 빠진 듯했다. “이제는 끝났어 내 밤의 노래는…”이라던 팬텀의 탄식에도 이별을 준비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미 2001년 <오페라의 유령>에 홀렸던 관객이라면 ‘다시 만날 수 없는 팬텀’에 대한 애잔함도 녹아 있었으리라. 당시 7개월 동안 24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우리말 <오페라의 유령>은 ‘오리지널’에 대한 기대를 부풀려놓았다. 그런 기대를 충족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개막 공연이었다.

지난 6월10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막이 오른 <오페라의 유령>은 해외 투어팀에 대한 편견을 깨뜨렸다.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는 작품은 <캣츠>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미스 사이공>이다.

샹들리에 실망스런 추락

이 가운데 <오페라의 유령>만이 유일하게 투어 프로덕션을 꾸리지 않았다. 이번 공연에는 1986년 이래 20년째 지구촌을 누비고 있는 <오페라의 유령>의 명성을 이어갈 배우들이 무대에 올랐다.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팬텀 역의 브래드 리틀만 해도 1996년부터 3년6개월 동안 전미 투어에서 1800여회나 같은 역을 맡았다.

역시 팬텀은 관객을 사로잡았다. 무대 양쪽의 자막 전광판을 통하지 않아도 의식의 흐름을 읽어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의 노래와 몸짓은 마치 세포의 움직임을 세세히 보여주는 듯했다. “팬텀도 사람이다. 다만 사회가 그를 괴물로 만들었을 뿐이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팬텀의 고통을 보여주겠다”고 말한 브래드 리틀의 다짐은 폭발적인 동작과 애절한 노래를 통해 객석에 그대로 전해졌다. 그가 외형적 상처를 내면 깊숙이 가두는 구실을 했던 가면을 버렸을 때 유령의 사랑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이렇듯 <오페라의 유령>은 130분 공연 내내 관객을 자극해 ‘내 안의 유령’을 발견하게 한다. 흔하디 흔한 러브스토리에 생기가 흐르고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위험한 사랑의 씨앗이 애틋한 사랑으로 피어나는 것은 놀라운 무대기술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내에 들어온 무대 장비만 컨테이너 21대 분량이다. 여기엔 쉴 새 없이 무대를 뒤덮는 230여벌의 의상도 들어 있다. 아쉬운 점은 30만개의 유리구슬로 치장한 샹들리에가 속도감 없는 비스듬한 추락으로 웅장함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다시 <오페라의 유령>은 2001년 공연에 이어 흥행신화를 예고하고 있다. 현재 예매 추세대로라면 10만원 안팎의 공연료에도 관객 14만명이 관람해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은 시간문제로 여겨진다. 4년 전에 뮤지컬 산업의 토대를 다졌다면 이제는 뮤지컬 산업 전성기를 열어가고 있는 셈이다. 어찌됐든 <오페라의 유령>은 만끽해볼 만 하다. 객석에 앉기 전에 공식 팬카페(cafe.naver.com/phanphile.cafe)에서 대본이라도 읽어두는 게 좋다. 그렇지 않다면 자막에 신경이 쏠려 놀라운 무대예술의 성취를 실감하기 어렵다. 자막은 포기해도 좋은 <오페라의 유령>의 명장면 4개를 살펴본다.

지하 미궁

노를 저어 심연으로

무대 바닥에 드라이 아이스가 깔리고 지하 미궁으로 가는 뱃질 양옆으로 촛대가 미끄러지듯 설치된다. 팬텀과 크리스틴이 타고 오는 배는 무대 안쪽에서 관객 앞으로 서서히 다가온다. 촛대의 설치 타이밍과 배의 움직임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무대장치를 통해 적절하게 조합돼 원근감을 느끼게 한다. 이 배는 무선으로 조종되지만 팬텀의 섬세한 연기를 덧입어 마치 진짜 노를 저어 심연에 빠져드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라 하우스 지붕

꼬리 긴 팬텀의 노래

복잡한 상황을 피해 오페라 하우스의 지붕으로 도피해온 라울과 크리스틴은 다시 한번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이때 팬텀이 두 연인을 그림자처럼 뒤따라온다. 관객들은 화려한 황금빛 무대 둘레에 딸린 천사상에 있는 팬텀을 발견할 수 있다. 팬텀은 천사상을 타고 살며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오직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All I Ask of You)을 애절하게 부른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무대를 얼마나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년전야 가면무도회

화려하다, 웅장하다!

가장 화려한 장면으로 꼽히는 가면무도회는 배우 37명이 총출동해 마치 한폭의 화려한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관객들이 탄성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는 화려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절제된 안무와 웅장한 선율, 화려한 의상 등에 시선이 쏠리지 않을 관객은 없을 것이다. 만일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뜨고 의상 하나하나를 즐긴다면 재미는 두배로 증폭된다. 이를 위해 공연장 입구에서 오페라글라스를 3천원에 대여해볼 만하다.

호수 저편에

가면만 남기고 사라지네

팬텀은 크리스틴의 키스에 감동을 받아 크리스틴과 라울을 풀어준다. 이 장면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팬텀의 섬세한 연기다.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는 팬텀의 애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오페라의 유령>은 팬텀의 애절함에 흠뻑 젖어 있는 관객들에게 또 하나의 선물을 준비한다. 자신의 의자에 앉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망토를 뒤덮은 팬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의자에는 팬텀의 가면만 남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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