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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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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목적’이 궁금하다

등록 2005-06-09 00:00 수정 2020-05-03 04:24

없으면 허전한 휴대폰인가,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연습인가
달콤쌉싸름한 연애담을 관람한 청춘남녀작가가 보내온 영화 후일담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어쩌면 우리는 모두 연애중독자다. 연애는 우리 시대의 군주다.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애인이 있건 없건 모두가 연애를 꿈꾼다. 돈은 없어도, 일이 없어도, 연애는 해봤으면 한다. 연애는 그 모든 것을 보상하고도 남는 그 무엇으로 숭배된다. 연애를 꿈꾸는 모든 자, 당연히 ‘연애의 목적’이 궁금하다.

영화 <연애의 목적>(감독 한재림)은 26살 담임선생 이유림(박해일)과 27살 교생선생 최홍(강혜정)의 밀고 당기는 연애담이다. 집요하게 지분거리는 남자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여자가, 당기면 도망가고, 도망가다 돌아오고, 헤어지고 만나는 이야기다. <연애의 목적>에 연애의 목적은 없을지 모르겠지만, 연애의 과정은 생생하게 그려진다. 포기할 듯한 순간에 달려들고, 거절할 듯한 순간에 받아들이는 ‘사소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연애 과정을 통해 친밀성을 쌓아가는 방식에 대한 생생한 통찰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반전이 일어난다. 그 반전을 통해 자문한다. 남녀상열지사에서, 어디까지가 나의 의지이고, 어디부터가 너의 강압이냐? 사랑과 폭력의 경계에 대한 사유를 넘어서 진심과 위선의 경계까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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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사랑타령이 아니다

<연애의 목적>의 보도자료에는 ‘연애는 ○○○이다’라는 설문이 나온다. 촌철살인의 정의 하나를 소개한다. “(연애는) 핸드폰이다, 없으면 허전해 죽을 것 같다”(조은용). 그렇다. 연애는 있으면 신경 쓰이지만, 없으면 허전해 죽을 것 같은, 중독성 강한 ‘물건’이다. 연애는 우리 시대의 필수품이다. 연애의 반대말은 애인이다. <연애의 목적>에서 ‘연애’는 달콤한 사랑타령이 아니다. 오히려 유부남이 불콰한 얼굴과 느끼한 목소리로 “우리 연애 한번 할까?”라고 지분거릴 때, 바로 그때의 ‘연애’다. 유림은 연애를 “좋고 끌리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아무 계산 없이 좋은 시간 쌓는 게 연애예요”라고 정의한다. 유림에게 연애는 사랑과 유사어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말에 가깝다. 최홍이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자요?”라고 따지자 유림은 “애예요? 16살도 아니고, 사랑이라는 거 웃겨요. 그런 거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남자는 여자의 사랑타령을 비웃는다. <연애의 목적>은 연애와 사랑의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시작하지만, 결국 연애와 사랑의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연애의 법칙이다. 그리고 연애는 항상 깨어짐을 예비한다. 두 주인공도 애인이 있는 몸으로 연애를 시작한다. 다시 한번 설문으로 돌아가서, 연애에 대한 명언을 복습한다. “(연애는)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연습이다.”(김순빈) 정말 쿨하고, 리얼한 정의다. 연애의 중독성은 영원하지만, 애인의 중독성은 매우 짧다. 그것이 연애와 애인의 영원한 딜레마다.

<연애의 목적>은 달콤한 연애담은 아니다. 씁쓸한 실패담도 아니다. 달콤쌈싸름한 연애담이다. <연애의 목적>은 연애에 대한 환상을 키우지 않지만, 연애에 대한 매혹을 깨지도 않는다. 그것이 <연애의 목적>의 미덕이다. 청춘남녀 소설가, 정이현씨와 천명관씨에게 <연애의 목적>의 감상문을 부탁했다. 두 사람은 남녀의 입장에서, 자신의 시선으로 본 영화 감상문을 보내왔다.

she said : 세트장 바깥의 연애는 없다

▣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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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밤 열한시에 끝났다. 지하 2층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갓 스물을 넘겼을 것 같은 남자아이가 제 여자친구를 향해 커다랗게 투덜댔다. “뭐야? 생각보다 안 야하잖아. 그리고 저 여자 진짜 웃기지 않냐. 남자 진심을 알면서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가 있냐.” 여자아이가 남자친구를 째려보았다. “무슨 소리야? 어쨌거나 성추행 맞잖아. 강혜정이 처음에 계속 싫다고 했는데 박해일이 강제로 한 거니까.” “웃기네. 그게 왜 강제야. 지도 좋아서 한 거지.” 엘리베이터는 곧 땅 위에 도착했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깜깜한 밤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였으므로, 나는 그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영화 한편을 보았을 뿐인데, 이상하게 피곤하고 멍했다. 드문드문 자동차가 오가는 한밤의 도로, 네온사인이 가로등처럼 깜빡거리는 빌딩들. 모든 게 그대로였다. 어디선가 신경질적인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기묘하게도 이 통속적인 풍경들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이곳이 거대한 세트장 안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몰랐다.

장난꾸러기 소년의 비정한 성장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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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이유림과 최홍이 각각 남성 일반과 여성 일반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라, ‘상처 없는 인간’과 ‘상처 있는 인간’을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나는 치명적인 것을 잃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무섭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나머지, 타인에 대해 아주 쉽게 품평하고 또 충고한다. 오만한 계몽의 태도로 자신과 다른 타인의 방식을 ‘바로잡아’ 주려 한다. “교직 세계도 분위기 봐서 밀고 당기기만 잘 하면 성공한다”는 것이 선임교사 이유림이 멀뚱한 교생 최홍에게 들려주는 자신만만한 어드바이스이며, 이는 연애 혹은 남녀상열지사에 관한 그 남자의 가치관이기도 하다. 육년째 사귄 가족 같은 애인이 있으며, 가끔씩 들키지 않을 만큼의 강도로 ‘딴 짓’을 하는 그 남자의 영혼은 솔기 없이 매끈하다. 그는 뺀질뺀질한 성공철학은 가지고 있으나 실패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없는 인간이다. 실패 뒤에 찾아올 크나큰 절망과 자기모멸, 잠을 이룰 수 없어 뒤척여댈 밤들, 이마 한가운데 깊게 팰 흉터, 더 다치지 않기 위해 짓게 될 냉소의 표정. 그런 것들에 대해 그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유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연애의 목적>은, 뒤까불어대던 장난꾸러기 소년의 비정한 성장담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순간, 넥타이를 맨 일군의 아저씨들 앞에서 최홍이 내린 선택에 대해서는 100% 공감한다. 그것은 선택의 차원이 아니라 절대적인 사회적 약자로서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살의 없이도 상대를 내쳐야 하는 때가 있다는 걸 그 여자는 이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칼로 베는 순간 비로소, 그 전에 내 등을 찔렀던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것. 세상이 그런 방식으로 굴러간다는 교훈을 얻는 일이야말로 연애의 진정한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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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래? 말래?” 연애란, 그저 그렇게 남녀 개인의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일 뿐이라고 믿는가. <연애의 목적>은 바로 그런 당신의 뒤통수에 서늘한 얼음을 가져다대는 영화다. 이곳은 거대한 세트장이며 시스템은 공고하다. 다만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개인의 사생활은 ‘사회적인 어떤 것’이 되어 객사한 거지의 동냥그릇처럼 거리 한복판에 까발려질 수도 있다. 우리는 끝없이 연애의 바깥을 꿈꾸지만, ‘바깥의 연애’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세트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내는 일은 가능한 것일까. 로맨틱 코미디로 위장한, 장르를 알 수 없는 영화 <연애의 목적>이 당신에게 묻고 있다.

he said : 포르노그래피와 핑크 로맨스

▣ 천명관 소설가 · <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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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과 수컷이 만난다. 수컷은 ‘그까이꺼’ 한번 달라고 위악을 부리고, 암컷은 그냥은 안 된다며 내숭을 떤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 흔한 ‘사랑과 섹스’의 함수 문제를 푸는 것으로. 이후,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내러티브가 아니다.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은 이병우의 날렵한 기타 연주다.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때로는 시니컬한 선율 뒤에서 암컷과 수컷은 사랑과 섹스 사이, 혹은 교실과 모텔 사이, 또는 핑크 로맨스와 포르노그래피 사이를 숨가쁘게 넘나든다. 핑크 로맨스와 포르노그래피는 남성과 여성의 각기 다른 성적 판타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포르노그래피에서 사랑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이는 반칙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암컷과 수컷이 만난다. 수컷이 말한다. “오! 당신의 엉덩이는 정말 멋진걸!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지?” 암컷은 대답한다. “글쎄요. 정 궁금하면 당신이 직접 한번 재보지 그래요. 물론 이 옷은 다 벗어야겠죠?”

“젖었어요?" 두 욕망을 뒤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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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없는 섹스와 거절당한 염려가 없는 욕망, 즉 남성의 그 가능성 없는 공상은 포르노그래피 안에서 현실이 된다. 물론 현실 가능성이 없기는 핑크 로맨스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여자는 남자를 만난다. 그는 부자에 잘생기고 친절하며 고독하기까지 하다. 그는 과한 업무에 시달리느라 여자를 만날 틈이 없다. 그리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여자가 없다. 그는 잠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호텔로 창녀를 부른다. 그녀는 키 175cm에 몸무게 49kg이며 일을 나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된, ‘기적처럼 순수한’ 창녀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핑크 로맨스는 이때부터 시작이다. 두 사람에겐 수많은 장애가 등장한다. 신분의 차이와 지저분한 과거, 복잡하게 얽힌 관계와 연적들…. 그러나 승리는 결국 그 늘씬한 ‘창녀’의 몫이다.

영화, <연애의 목적>의 첫 장면은 포르노그래피와 핑크 로맨스, 그 건널 수 없는 강을 단숨에 뛰어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낙엽이 지는 벤치 아래 남녀가 앉아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묻는다.
“젖었어요?”
감독은 그렇게 처음부터 ‘영화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합치할 수 없는 두 욕망을 뒤섞기 시작한다. 막걸리 집에서 고등어냐 이면수냐를 놓고 실랑이를 하던 홍상수식 트리비얼리즘도 더 이상 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핑크 로맨스의 기율은 일찌감치 팽개쳐지고 홍상수의 냉소와 장선우의 위악, 임상수의 쿨함 등 저 ‘차가운’ 감독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핑크 로맨스 위에 사정없이 버무려진다. 좀 과한 드레싱이 아닐까 싶지만 과히 염려할 것은 없다. 영화는 중반 이후 다시 ‘오해와 의심의 산물’이라는 핑크 로맨스의 규칙으로 돌아와 약간의 고행을 거쳐 백설처럼 하얀 아침을 맞는다. 여느 로맨스처럼 달콤한 엔딩이다. 하지만 두 연인이 걸어가는 그 백설의 아침이 마냥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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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목적>에는 인종이나 국경을 넘는 사랑 같은 건 없다. 신분의 벽이나 성격 차이도 문제가 아니다. 핑크 로맨스와 포르노그래피라는 남녀의 각기 다른 판타지도 마지막 장면에선 행복하게 합치된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문제는 뭘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박해일은 눈길에 미끄러지며 짜증을 낸다. 그 순간 그가 영화 초반에 그의 오랜 연인에 대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 떠오른다. ‘6년쯤 사귀다 보니까 자식 같고 부모 같다’는….

그렇다. 그들이 눈 덮인 골목을 걸어 나간 이후에 맞아야 하는 것은 시간이란 괴물과의 싸움이다. 그것은 첫 키스의 짜릿한 순간을 잊게 하고 연인들의 그 모든 달콤한 시간을 무화하는 난폭한 유령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견뎌야 하는 것은 거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참아내야 하는 것은 그들 앞에 지루하게 널려 있는 일상이다. 관습적으로 반복되는 섹스이며 만져도 더 이상 남의 살 같지 않은 익숙함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스러져가는 우리의 행복한 시간이다. 바로 그 ‘시간의 비극성’이야말로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견뎌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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