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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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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쇼비즈니스다!

등록 2005-05-12 00:00 수정 2020-05-03 04:24

공주병 아티스트, 사랑스런 애교덩어리, 예술계의 뉴스메이커 낸시 랭과의 만남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그동안 아티스트 낸시 랭이 구축한 이미지를 선정성이라 단정하기는 쉽다. 비키니 차림으로 관객들에게 오일을 달라고 하며 노래방 기기에 맞춰 <보랏빛 향기>를 부르는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애교’다. 모피코트를 입고 무대에 올라 남자 모델들의 옷을 벗기고 그들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한 클럽 매거진 창간호에 실린 화보에서 낸시 랭은 매맞는 아내와 가정주부, 술집 아가씨 등으로 분해 ‘팜므파탈’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어쩌면 ‘낸시랭닷컴’(www.nancylang.com)에 쏟아지는 대중들의 수근거림을 은근히 즐기는 ‘공주병 아티스트’인지도 모른다.

“서울을 파리 같은 예술의 메카로”

사실 낸시 랭만큼 현대 미술의 화두를 충실히 따르는 아티스트도 드물다. 미술로 인간의 감각을 해방시키고 행복을 안겨주는 데 철저하기 때문이다. 그의 퍼포먼스 혹은 전시 오프닝 행사에서 요란한 환영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속살’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통의 기법을 타파하고 예술의 사회성을 부여하는 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려 할 뿐이죠. 그런데 보는 사람들이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 같아요. 때론 저도 몰랐던 부분을 깨닫게 되긴 해도 의도한 것들은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비난하는 목소리도 크게 신경쓰지 않아요.”

애당초 2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낸시 랭을 주목한 매체는 패션잡지였다. 그녀는 그때 산마르코 광장에서 란제리에 하이힐 차림으로 초대받지 않은 자로서 ‘꿈과 갈등-터부 요기니’라는 퍼포먼스로 화제를 뿌렸다. 그러다 지난해 4월 <한겨레21>의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에 ‘그 예술가, 애교덩어리!’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면서 대중적인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1년여 동안 낸시 랭의 행보는 사소한 일상사까지 온갖 매체에 노출됐다. 심지어 ‘강한 여성’을 뜻하는 신조어 ‘콘트라섹슈얼’(contrasexual) 모델로 지난 4월22일부터 케이블 여성채널 ‘온스타일’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싱글즈 인 서울 3-콘트라섹슈얼>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쯤 되면 풍기문란식 ‘사고’로 대중을 모으고, 저돌적인 ‘애교’로 대중을 껴안은 아티스트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기존 상식에 도전하는 이미지를 선정적으로 보여줬다거나 플럭서스(Fluxus) 활동가로 반문화적인 전위운동에 나섰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물론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가 선보이는 여성성은 이전의 그것과는 다르다. 예컨대 설치작가 이불이 남성적 시각으로 재단된 여성성을 주체적 시각에서 괴기스럽게 표현해 비평을 유도하고 퍼포먼스 작가 이윰이 자신을 포장해서 환상 속의 요정으로 거듭났다면, 낸시 랭은 여성성을 무기로 삼아 적극적으로 쇼비즈니스에 나선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훌륭한 작품으로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그것을 인프라로 삼아 부와 명예를 얻어 낸시 랭 재단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 다음 서울을 런던과 파리 같은 예술의 메카로 만들어야죠.” 이것이 쇼비즈니스를 향한 낸시 랭의 예술적 화두다. ‘문화적인 삶’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로 만들기 위해 아티스트로서 엔터테인먼트를 팔고 있는 셈이다. 그에게 ‘문화의 오락화는 문화적 죽음’이라는 말은 들리지 않을 게 뻔하다. 미국에서 태어나면서 얻은 본명 ‘낸시 랭’을 브랜드로 삼아 ‘예술자본’을 축적하는 것만이 그의 지상명제인 탓이다.

아직까지 낸시 랭의 평면 작품들은 예술자본을 축적하는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다. 아니 그에 대한 대중적 관심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젊은이들 특유의 생기와 상상력이 넘치는 ‘서울청년미술제-포트폴리오2005’전에 번듯하게 걸려 있고, 이달 초까지 서울 청담동의 갤러리 드맹에서 ‘터부 요기니 시리즈’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미술평론가 윤진섭씨는 낸시 랭의 평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사에 의존하는 주제를 풀어놓는 재주가 예사롭지 않다. 주제를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초기의 터부 요기니 작품은 고전적 취향이 깊게 새겨져 흡입력이 있다.”

지난 5월2일 정장 차림으로 전시장에 나타난 낸시 랭은 “여자의 스타일은 핸드백과 구두로 마무리된다”면서 작품 앞으로 다가섰다. 인간의 퇴색된 꿈을 실현해주는 의미를 내포한 ‘터부 요기니 시리즈’는 명품 중독자인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잃어버린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연주했듯이, 터부 요기니 시리즈에는 명품에 다가서기 힘든 자신의 존재를 표현한 셈이다. 신과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인 메신저 ‘요기니’(Yogini)처럼 현실에서 일체의 욕망을 ‘금기’(Taboo)로 여길 수밖에 없는 현실, 그것이 바로 그에게 터부 요기니인지 모른다.

초창기의 터부 요기니는 상처 자국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지구촌 전역을 시장으로 삼았던 ‘엄마’의 사업이 망한 대학 3학년 때까지 입었던 명품 정장 200여벌을 ‘새것’으로 바꾸지 못하는 것도 그에겐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처를 바늘로 꿰맨 뒤에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건담 로봇의 몸체를 중심에 놓고 명품(루이뷔통 등)과 엘리트주의(예일대 로고 등)에 대한 욕망을 곳곳에 배치했다. “작가와 작품은 하나일 수밖에 없어요.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게 제겐 없어요. 세속적인 욕망을 표현한 것에 대해 ‘꼴값’을 떤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요. 욕망을 숨기지 않는 게 죄인가요?”

상처에 명품과 엘리트주의를 새기다

낸시 랭의 터부 요기니 시리즈는 계속해서 진화를 꾀할 것으로 보인다. 그가 꿈꾸는 건 건담 로봇의 해체와 조립을 통한 재창조, 이제 막 부품을 한데 모았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장밋빛 지난날에 대한 미련을 훌훌 털어버릴 수도 있다. 실제로 과거의 사슬을 끊고 환상적인 미래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작품 속에 살짝 드러내고 있다. 상처투성이의 요기니와 함께 수호천사 구실을 하는 건담 로봇을 작품에 배치한 게 그것이다. 그에게 요기니가 피터팬이라면 건담 로봇은 요정 팅커벨인 셈이다. 명품으로 채워진 그만의 공간에 미래를 의지할 누군가를 초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중에게 다가서는 아티스트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낸시 랭. 그만큼 미술을 쇼비즈니스로 받아들이는 작가가 미술 시장에 흔치 않다.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와 작품을 통해 쇼비즈니스에 다가서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가 모델로 삼은 사람은 애니메이션과 만화 게임 등의 문화적 정서를 기반으로 자신의 작품 캐릭터를 아트 상품화하는 데 성공한 무라카미 다카시다. 무라카미가 일본 미술에 대한 확고한 이해를 바탕으로 영역을 확장한 것을 떠올릴 때, ‘애교’와 ‘명품’으로 놀이와 예술의 경계에 서 있는 낸시 랭이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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