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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의 산울림, 연극을 흔들어라

등록 2005-03-23 00:00 수정 2020-05-03 04:24

개관 스무돌 맞이한 소극장 산울림 대표 겸 연출가 임영웅, 그의 ‘대학로 밖’ 연극인생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은 관객의 수가 아니라 우리들이 만드는 연극이어야 한다. 연극은 무성의하게 적당히 만들면서 관객 수를 생각하는 것은 주객의 전도다. 우선 우리가 할 일은 관객을 생각하는 시간에 연극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올해로 개관 20주년이 된 소극장 산울림 대표이면서 연출가로 데뷔한 지 50주년을 맞은 임영웅(71)씨의 지론이다. 서울 신촌에서 홍익대 방향으로 가는 길에 자리잡은 소극장 산울림은 보조석을 실컷 늘어놓아도 150석을 채우기 어렵다. ‘연극의 메카’라는 대학로 밖에서 20년을 굳건히 버텨온 뚝심은 연극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됐으리라.

‘미친 놈’ 소리… <고도를 기다리며>의 성공

애당초 소극장 산울림을 개관하는 것은 모험에 가까웠다. 주변에서 임씨를 가리켜 ‘미친놈’이라고 농반진반으로 말하기도 했다. 연극하는 사람이 소망하는 ‘자기 무대’를 마련했다는 것을 축하하는 이는 드물었다. 소극장 운영은 경영 측면에서 무모한 도전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무슨 일이 있어도 10년은 참고 버텨야지” 하는 맘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레퍼토리 시스템'으로 무대에 올릴 준비를 했다. 아무리 배우가 익숙한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연출가가 희곡을 충실하게 해석해 작품을 선보여도 항상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극장 문을 닫아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마도 ‘고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소극장을 지켜온 것이 아닐까. 실제로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에게 인생의 버팀목 구실을 했다. “무대에 올릴 때마다 힘들고 어려운 작품이지만, 막이 오르고 나면 성취감과 함께 인생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내가 왜 연극을 하는지, 왜 연극을 계속해야 하는지도 명쾌하게 일깨워준다.” 이런 까닭에 1969년 공연 일주일 전 ‘전회 매진’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해 초연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36년 동안 정기공연 14회, 해외 초청공연 5회와 특별 공연 등 그의 연극 인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임씨가 연출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소극장 산울림 개관 20주년 기념공연 시리즈 첫 번째 무대에 올랐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뮈엘 베케트의 원작을 일점일획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살려낸 극본을 번역한 사람은 인생의 반려자인 오증자(전 서울여대 교수)씨다. 그가 초연 때 3일 동안 끙끙대며 읽은 원작을 오씨가 맛깔나게 우리말로 옮기며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시골길에 있는 앙상한 소나무 한 그루 아래에서 펼쳐지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쉴 새 없이 대사를 내뱉는 ‘본능적 연기’는 변함이 없다. 다만, 초연 때 2시간30분이던 공연 시간이 15분가량 줄었다. 대사 분량은 그대로인데 대화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서양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임씨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어릿광대짓이 잔혹하고 요란한데 두 주인공이 부드럽고 무용적인 광대로 탈바꿈했다. 지나가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포조와 럭키의 대사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정통과 실험의 절묘한 조화로 인간을 그리는 예술을 추구하는 임씨의 연극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현대인의 삶을 진실하게 그리려면 합리적인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24시간을 추적하면 극적인 순간은 거의 없다. 일상적인 것에 진실성이 있다고 믿는다. 36년 전 낯섦에서 느꼈던 충격을 해가 바뀔수록 즐겨가는 모습이 뚜렷했다. 부조리극을 사람 사는 이야기로 느끼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서울시내에 소극장만 해도 50여개에 이르러 젊은 연출가들이 색깔 있고 진취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연출가 데뷔전’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임씨의 연극연출 데뷔는 아주 우연히 이뤄졌다. 그가 서라벌예대에 입학한 해에 제1회 전국 중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당시 28개 학교에서 참가했는데 주로 극단 ‘신협’의 배우들이 연출가로 나섰다. 이때 그는 모교인 휘문고의 요청으로 <사육신>(유치진 작)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연출 강의를 몇 시간 들은 것을 밑천 삼아 대회에 나갔는데, 지금은 고인인 된 탤런트 이진수씨와 성우 안종국씨가 최우수연기상을 받는 성과를 올렸다.

나름대로 연출력을 인정받았지만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 연극만으로 생활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1960년대 중반까지 신문기자와 방송PD로 언론계에 몸담아 문화 관련 기사를 쓰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즈음 뮤지컬을 만나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창작 뮤지컬로 꼽히는 <살짜기 옵서예>(예그린 악단)를 무대에 올렸다. 그가 뮤지컬 연출에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재즈 연주가인 부친 임태식 선생과 교향악 지휘자인 숙부 임원식 선생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재즈와 클래식을 들으면서 자랐고, 연극 영화광이었던 조모 밑에서 자라면서 예닐곱살 때부터 극장에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요즘 임씨는 소극장 개관기념 공연과 함께 오는 5월11일부터 한달 동안 진행될 뮤지컬 <갬블러>의 일본 순회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일본 사회 전반을 휩쓰는 한류 열풍을 공연으로 이으려는 <갬블러>는 한 카지노에서 벌어지는 갬블러와 쇼걸, 카지노 보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사의 사랑과 배신, 욕망과 파멸의 인생 역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세계적인 팝 그룹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리더인 에릭 울프슨의 글을 원작으로 삼았다. 이렇듯 그는 해외의 원작에 색깔을 입히는 데 능숙하다. “나라고 창작극으로 세계 시장에 나가고 싶은 욕심이 없겠는가. 하지만 창작극으로 세계인과 소통하는 데 한계가 따른다. 해외 원작이라도 우리 식으로 완성도를 높인 뒤에 창작극을 알려도 늦지 않다.”

기념 공연· 뮤지컬 <갬블러> 일본 공연 앞둬

국내 연극계의 실정에서 소극장 산울림이 20년을 이어온 것은 크나큰 수확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거기엔 임씨의 은밀한 카리스마가 한몫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산울림표’ 연극은 뚜렷한 색깔을 지녔다. 그것이 ‘브랜드 파워’ 구실을 하는 게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상업적 여성연극 전문’이라는 꼬리표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런 지적에 대해 “산울림의 연극에서 관객몰이에 성공한 작품이 여성성이 강해서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한다. 예컨대 <위기의 여자>(1986)는 7개월 동안 5만명이 객석을 채웠지만 <심판>이나 <죄와 벌>, <어느 무정부주의자 사고사> 등의 작품은 몇몇 사람만 기억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제 고희를 지나 ‘노익장’이라는 말이 귀에 익은 임씨. 그의 연극 인생 50년은 좋고 싫음에 대한 확연한 구분을 통해 이어졌다. 그의 관점에서 철저히 작품과 배우를 구별해 종종 주위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한국 연극의 모더니티를 제시한 연출가’(국립극단 예술감독 이윤택)라거나 ‘인간, 그 이상의 감동을 빚는 무대 예술가’(연극평론가 박용재) 등의 평가에도 그는 ‘문하생’을 꼽는 데 주저한다. 오로지 작품으로 말하려 했기에 ‘가르침’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한치의 오류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매서운 집념, 그것이 성년기에 접어든 소극장 산울림의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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