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강우석의 야심찬 국가주의

등록 2005-02-16 00:00 수정 2020-05-03 04:24

2000년대 강 감독의 영화가 위험한 사회적 메시지…매체는 그의 위상에 걸맞는 비판을 하고 있는가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공공의 적2>가 사뿐히 흥행 바람을 타고 있다. <실미도>의 절반쯤인 500만 관객을 예상했던 강우석 감독의 계산능력은 경지에 이른 듯 보인다. 그런데, 강 감독의 ‘직설화법’을 염치없이 빌려 말하면 2000년대 그가 만들어낸 흥행작들 <공공의적 1, 2>와 <실미도>는 공공연히 국가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한국 대중의 무의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어떤 강렬한 향수에 정확히 부응한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지적에 동의한다. 여기에 작은 미스터리가 하나 숨어 있다.

“난 이런 공권력을 기대한다”

한국의 대표적 영화주간지로 꼽히는 <씨네21>의 기사들을 검색해보면 강 감독에 대한 엄청난 양의 기사들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를 크랭크인하기 전부터 인터뷰나 소개 기사가 실리고 촬영현장을 찾아가고 개봉하면 특집기사와 인터뷰가 다시 실린다. 한국 최고의 상업영화 감독에 대한 이 정도의 지면 할애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투캅스 이후 강 감독의 최고작”(<공공의 적1>) → “국가주의에 대한 정면 공격”(<실미도>) → “강우석의 야심찬 직설화법 제2장”(<공공의 적2>)으로 이어지는 찬사의 퍼레이드처럼, 제작자나 배급업자가 아닌 ‘감독’ 강우석은 늘 지지를 받았다. <화씨 9/11>의 선동성을 냉소적으로 리뷰할 줄 아는 이 ‘쿨’한 매체가 ‘과욕의 승부사’의 선동적 메시지에는 ‘과욕의 애정’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씨네21>은 일간지들에 비해 비판도 많이 실은 편이다. 지난해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의 흥행을 정리하면서 몇몇 좌담을 통해 영화에 등장하는 퇴행적 인물이나 국가주의의 그림자에 대한 비판을 짧게 내비치기도 하고, 특집으로 두 영화의 ‘방어적 집단주의’와 ‘문화 민족주의’를 꼬집기도 했다(<씨네21> 441호 특집1 ‘관객이 천만? 콤플렉스가 천만!’). 그 외에도 ‘영화 읽기’라는 짧은 평론가의 칼럼에 비판적 접근이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강 감독 영화가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에 대한 정면 비판이라기에는 겸연쩍다. 다른 매체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공공의 적1>은 관객과 평론가들의 일치된 호응을 받았고, <실미도>는 1천만 관객 돌파라는 이슈에 묻혔으며, <공공의 적2>는 강 감독의 재기 여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미스터리는 여기에 있다. 강 감독의 장르·상업 영화에 대한 재능에 견주어, 영화 속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적 메시지는 사소하거나 위험하지 않은 걸까.

<공공의 적1> 시사회가 끝난뒤 강 감독은 <한겨레21>(393호, 2002년 1월24일치)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채업자든 패륜아든 공공의 적은 아예 때려 없애자는 거다. 이 부분에 적당한 호응만 받으면 점점 더 어려운 <공공의 적> 시리즈를 만들 거다. …평자들은 상관 안 한다. 영국 갔을 때, 길에서 경찰이 몽둥이로 행인 한명을 죽도록 때리는 걸 봤다. 그런데 지나는 사람들이 맞을 짓을 했다며 웃고 지나가던데, 난 이런 공권력을 기대한다.” 물론 강 감독 특유의 소박한 ‘직설화법’을 고려하면 이런 ‘파시즘적’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오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공공의 적1> 전체의 내러티브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의 소박한 세계관이다.

실미도는 국가주의를 공격했나

1편의 강철중은 권투선수 출신으로 경찰에 특채가 된 형사이고 “형사질을 하고 다니는지 깡패질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듣는 ‘반영웅’이다. 공공의 적인 조규환은 지적이며 냉철한 사고의 소유자로 부모를 죽이는 가장 극단적인 악행을 벌인다. 이것은 일견 덜 나쁜 자가 더 나쁜 자를 징벌한다는 설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진정으로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은 가난하고 무식하고 비천한 자가 부유하고 유식하고 고상한 자를 법과 제도의 사회적 테두리 바깥에서 싸워 이기는 구도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선악의 구도는 그 자체가 인민재판의 성격을 띤다. ‘약자의 원한’은 공공을 위협하는 ‘놈’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데, 이것은 바로 전체주의의 동력이다. 악은 폭력으로 때려잡아야 한다는 강렬한 파토스. 여기에 국가라는 괴물, 혹은 아버지가 개입한다.

지난해 많은 매체들은 <실미도>에서 국가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개인의 몸부림을 보았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영화담당은 해본 적이 없고 오랫동안 남북관계에 관심을 갖고 취재해온 한 기자의 비판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한겨레21> 493호(2004년 1월29일치)에서 “영화는 쥐뿔도 모르는” 권혁철 기자는 “극장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10대 두명이 볼일을 보면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야, 김일성 목을 딸 수 있었는데 아쉽다.” “맞아 그랬으면 통일도 되고 좋았을 텐데.”

권 기자는 감독이 국가주의를 비판한다고 했는데, 일부 관객들이 국가주의에 매몰돼버리는 현상이 관객 탓만은 아니라고 본다. 그 원인은 ‘역사의 빈곤’과 ‘감정의 과잉’ 탓이다. 역사가 거세되고 ‘남성 결사’의 울부짖음만이 난무하는 이 영화에는 “정부의 변덕스러운 평화통일 정책이 실미도 영웅 31명을 죽였다는 ‘함정’에 빠질 장치가 도처에 깔려 있다.” ‘실화’라는 타이틀이 이 혐의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심영섭씨는 “실미도의 이데올로기에는 강한 아버지에 대한 향수가 있다. 그들이 청와대로 가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을 아버지(국가)에게 확인받기 위해서다”라고 말한다. 즉, <실미도>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권력에의 복종, 남근주의 등 70년대의 이데올로기로 70년대를 비판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앙정보부가 국가냐”라는 대사가 떠오른다. 부재하는 ‘아버지’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른 영웅들의 비애가 영화를 뒤덮고 있다.

그리고 올해 강 감독의 야심이 담긴 문제작 <공공의 적2>가 개봉됐다. ‘야심’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강 감독 스스로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내가 만든 영화 중 유일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담은 게 아닌가 싶다. …이 영화로 사회의 공공의 적들에 대해 관객이 함께 분노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매체들은 본격 정치영화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강철중은 더 이상 건들거리는 반영웅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정의로운 검사로서 덜 나쁜 놈들과 더 나쁜 놈을 공권력으로 응징한다. 그는 시종일관 설교조의 장광설이나 국정홍보처의 캠페인 같은 대사를 내뿜는다.

애국심이라는 동원기제

그래서 이 ‘정치영화’는 매우 선동적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혹은 국가가 호출한 국민의 이름으로 사회악을 때려잡자는 울림이 영화를 뒤덮는다. <공공의 적2>에는 권력을 작동시키는 국가 시스템에 대한 정교한 비판이 없다. 건전사회 육성을 위해 일부 ‘잘난 놈’들을 응징해야 한다는 충동질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황진미씨는 <씨네21> 489호에서 <공공의 적2>의 ‘정의’에 대해 다분히 사회학적인, 그러나 유효적절한 비판을 내놓는다. 영화 속 ‘공공의 적’은 자본가 계급이나 사학재단, 정경유착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가 가지고 있는 악의 핵심은 국부를 외국으로 유출하려는 미국 시민권자이며, 귀족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검사 강철중은 민족주의와 군인정신, 평등주의와 서민정서가 결합된 ‘박정희’를 떠올리게 한다(실제로 5·16 쿠데타는 골프 치는 배부른 놈들 때려잡고 정의사회 이룩하자는 대중주의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영화의 결론은 결국 국가가 정의고, 국민은 선이라는 공식에 담긴다.

이쯤 되면 다시 처음의 질문, ‘강우석 감독 영화의 사회적 메시지는 위험하지 않은가’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주인공이 표방하는 국가주의를 장르영화의 관습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허문영씨는 “전반적으로 강우석 영화에서 국가주의에 대한 입장이 혼란스럽거나 애매하다”고 지적하면서도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감독의 소박성에 기원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70년대 미국의 <더티 해리> 시리즈처럼 국가기관이 정의를 수행할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개인이 정의를 실현하는 ‘자경단 영화’와 비교하기도 한다. 국가주의를 드러내는 주인공의 모습은 주인공이 뒷골목 악과 싸우는 액션영화의 관습 정도라는 것이다. 김봉석씨도 비슷한 입장이다. “영화 속에 인민주의 정서가 있지만 그렇다고 명확히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강우석 감독이 <공공의 적1>을 시작하면서 내세운 ‘의욕’은 단순히 장르영화의 장치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야심차다. “지난해 일련의 영화들을 보면서 정말 짜증나고 화가 났다. 영화가 <개그콘서트>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머리 비게 간단 말야. …과거의 내 영화에서의 사회풍자는 웃음을 경박하게 가지 않겠다는 강박으로 끌어들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공공의 적1>은 사회에 대한 나의 시각이 달라진 거다.”(<씨네21 335호) 강 감독은 ‘머리가 비어 있지 않은’ 상업영화로 그의 사회적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분명히 전달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공공의 적2>에서 지극히 선동적이고 계몽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충무로 파워 1위의 영향력 때문?

이 지점에서 그의 영화가 흥행하는 이유, 관객이 그의 영화를 수용하는 방식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유지나씨는 “한국은 애국심이라는 동원기제가 강력한 나라다. 강우석 영화가 잘되는 건 본질적으로 애국심에 호소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강 감독 영화의 국가주의가 본질은 아니더라도 대중적인 결단이다. 뛰어난 상업영화의 감각을 가진 강 감독은 대중을 교화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대중의 눈높이에서 대중의 정서에 호소한다. 관객들은 <실미도>의 자폭 장면에서 개인이나 인권이 무화되고 형제애가 버스를 감싸는 순간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렇게 정의로운 국가권력에 대한 환상, 혹은 향수가 생겨난다. 그것은 <공공의 적1,2>에서처럼 악의 무리에게 공권력을 맘대로 휘두를 수 있는 권위와 복종을 요구한다. 이것은 유신시대가 막 내리고 강산이 몇번이나 변한 지금에도 끊임없이 박정희가 회귀하고 국가주의가 득세하는 우리의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강우석 감독 자신이 영화에서 사회적 메시지를 앞세우고 있다면, 그것은 담론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으로 떠올라야 한다. 그런데 왜 매체에서 그의 위치에 걸맞은 무게 있는 비판이 진행되지 못하는 걸까. 당연하게도, 많은 전문가들은 몇해째 ‘충무로 파워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강 감독의 영향력을 이유로 든다. 물론 그가 ‘파워’로 지면을 찍어 누른다는 얘기는 아니다. 강 감독은 2000년대 한국영화의 저력, 그 자체다. 따라서 그에 대한 공격은 한국영화의 성공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있다. 그의 영화가 실패하면 다른 영화의 투자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 외에도 일부 평론가들은 강 감독의 상업영화에 비평적 관심이 없다는 이유를 들기도 한다. 심영섭씨는 이렇게 진단한다. “김기덕 감독 같은 작가는 찬반양론이 특집으로 실린다. 강우석 감독은 평론의 사각지대에 있다. 그리고 일단 강우석 감독 비판은 매체에서 주문이 안 들어온다. 그렇다고 자청해서 비판하겠다고 나설 대상도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를 ‘비주류 평론가’로 규정하는 강성률씨는 매우 직설적인 어조로 평단의 상황을 비판한다. “잡지에서 기획을 하고 글을 달라고 하기 때문에 개봉 영화 위주가 되고, 비평담론은 거의 없다고 해도 될 만큼 부족하다. 또 충무로 파워 1위와 주류 평론가들의 관계가 알게 모르게 형성돼 있을 가능성도 있다. 김기덕 감독을 그렇게 신랄하게 씹는 분위기라면 강우석 감독은 더 위험하기 때문에 비판을 가해야 하는데, 주류 평가들의 헤게모니 때문인지 강 감독을 건드리지 않는다. 일간지에도 기자들이 다 써버리기 때문에 비주류 평론가들이 얘기할 지면이 없다.”

이유야 어쨌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점은 강우석 감독의 영화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보는 상업영화라는 사실이다. 황진미씨는 이렇게 일갈한다. “대중상업영화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는가?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본 대중영화를 가지고 온갖 정치적·윤리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공론의 장을 튼튼히 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