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장애극복의 신화까지 극복하라

등록 2005-02-16 00:00 수정 2020-05-03 04:24

<오아시스>에서 <말아톤>까지, 장애인의 시선으로 본 한국 장애영화의 진화상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영화 <말아톤>이 ‘잘나가고’ 있다.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다. 영화적으로 훌륭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라는 평가다. 흔히 자폐로 불리는 발달장애를 세밀하게 다루었다는 것이다. 비장애인뿐 아니라 장애인도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보내고 있다. 2002년 <오아시스>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는 비평적 찬사를 얻었으나 장애인을 중심으로 이 영화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기도 했다. 장애인의 시선으로 보면, <오아시스>에서 <말아톤>까지 한국 장애영화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한공주’가 ‘종두’를 변호 못한다고?

<오아시스>는 뇌성마비 장애인 한공주(문소리)가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숨지게 하고 자신을 강간하려 한 비장애인 홍종두(설경구)를 사랑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200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여우상을 수상하면서 비평적 찬사를 받았다. 평단의 호평과 달리 장애인의 비판은 거셌다. 송정문 경남여성장애인연대 회장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오아시스, 장애인을 너무 모른다’는 글에서 “아무리 외로워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강간하려고 한 사람에게 그렇게 대처하는 사람은 없다”고 비판했다. 장애여성은 비장애인 남성이라면 어떤 사람이든 무조건 좋아할 것이라는 비장애인 남성의 무의식이 녹아 있다는 비판이었다. 종두가 공주의 강간범으로 몰리지만, 공주는 종두를 끝내 변호하지 못하는 장면도 논란거리였다. 장애여성들은 “아무리 뇌성마비 장애인이라도 그 정도 절박한 상황에서는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장애여성 공감’의 홍성희씨는 “오아시스는 장애여성의 생각있음, 저항함, 욕망함, 분노함, 생존을 위해 노력함, 성폭력에 상처받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장애인들은 <오아시스>에서 비장애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오아시스>를 지지하는 장애인도 있었다. 독립영화를 만드는 장애인 김영용씨는 “<오아시스>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한 드라마”라고 강조했다. 비장애인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날카롭게 표현한 장면도 호평을 받았다. 예컨대 공주의 옆집에 사는 부부가 환한 대낮에 공주의 집에서 성관계를 가지며 “쟤가 봐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장면은 장애여성을 여성도, 사람도 아닌 존재로 보는 편견을 잘 드러냈다. 무엇보다 <오아시스>는 장애를 영화의 소재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는다. <오아시스>에 이어 <후아유>(2002), <안녕! 유에프오>(2004) 등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가 제작됐다. 두 영화는 장애인 묘사의 현실감은 떨어지지만, 장애인을 주체적인 인물로 그렸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2005년 <말아톤>이 나왔다.

<말아톤>은 발달장애(자폐)를 가진 스무살 초원이가 마라톤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는 끊임없이 초원이가 마라톤을 좋아하는가를 묻는다. 초원이의 달리기가 엄마의 욕심에 의한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는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해답을 제시한다. 마라톤 레이스에 지친 초원이의 환상 속에서 누군가 초코파이를 내민다. 초코파이는 엄마가 초원이를 달리게 하기 위해 내밀던 유인책이었다. 초원이는 초코파이를 버리고 달리기를 계속한다. 초원이가 스스로 달리고 싶어서 달린다는 영화적 표현이다. 이처럼 <말아톤>의 시선은 장애인을 향하려고 애쓰고 있다. 비장애인의 시선에 포획된 장애인을 그렸던 한국 장애영화의 한계를 나름대로 돌파하려는 몸부림이다.

편견과 환상을 깬 <말아톤>에 남겨진 숙제

<말아톤>은 발달장애에 대한 편견과 환상을 동시에 깬다. 초원이는 발달장애인의 여러 가지 특징을 묘사하고 있다.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도 초원이의 행동을 보며 마치 우리 아이의 모습, 아이 친구의 행동을 보는 듯했다고 말했다. 발달장애인 아들을 둔 한 부모는 “자폐아 부모들과 단체 관람을 했는데 대형 마트에 진열된 물건들을 지나가며 빠르게 정돈을 하는 초원이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들이 ‘내가 아는 자폐아 중에서도 저런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있다’며 동감했다”고 전했다. 한편 발달장애인은 <레인맨> 등의 영화에서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말아톤>은 이런 환상도 깨뜨린다. 초원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인 <동물의 왕국>의 내레이션을 줄줄 외우자 초원이의 마라톤 코치는 “365 곱하기 27은?” 하고 묻는다. 하지만 코치의 기대와 달리 초원이는 하품을 한다.

장애인 가족 묘사에서도 <말아톤>은 진전한다. 초원이의 비장애인 동생은 형에게만 관심을 기울이는 엄마에게 불만을 느끼고 반항을 한다. 동생은 엄마에게 “나는 반항이라도 하지. 초원이 쟤는 도대체 뭐야?”라고 따진다. <친구> 등 장애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온 류미례 감독은 “주원이의 엄마에 대한 불만은 엄마의 소홀함에 대한 항의를 넘어서 엄마가 자기 마음대로 자식을 대한다는 지적으로 나아간다”고 말했다.

하지만 <말아톤>이 장애극복의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영화에는 “쟤가 다른 애들과 다를 게 뭡니까?”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이 질문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관점이 녹아 있다. <말아톤>에서는 엄마가 초원이의 마라톤 도전을 포기하려는 순간, 코치가 이 질문을 이어받는다. 장애극복 신화의 재연은 장애인의 현실을 억압한다. 독립영화를 만드는 장애인 김영용씨는 “<말아톤>은 비장애인을 교육해주는 고마운 영화지만 관습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장애극복 성공담은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희망이 되는 동시에 ‘나는 저렇지 않은데’ 하는 부담이 된다”고 덧붙였다. 성공담은 장애인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에게도 부담이 된다. 자폐아 자녀를 둔 한 어머니는 “<말아톤> 같은 영화를 본 친척들이 전화를 걸어 ‘저 엄마 하는 것 좀 봐라. 너는 왜 저렇게 못하느냐’고 핀잔을 준다”고 전했다. <말아톤> 다음에는 장애극복의 신화마저 극복한 장애영화를 볼 수 있을까? 장애영화는 전진하고 있다.



‘TV 드라마’는 아직 멀었네

종건이를 아십니까? 최근 TV나 인터넷 포털 사이트 뉴스 게시판을 열심히 본 사람이라면 종건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떠오르는 게 있을 듯. 1월15일, 22일 문화방송 <!느낌표>의 ‘눈을 떠요!’에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가진 중복장애인 어머니와 함께 사는 초등학교 6학년 원종건군의 이야기가 방송된 뒤, 해당 프로그램의 인터넷 게시판은 시청소감으로 도배가 됐다. 중복장애인인 종건군의 어머니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폐지를 수집하고 빈 병을 모아 몇년간 번 돈이 눈 치료비는커녕 종건군 공부 뒷바라지에도 빠듯한 액수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문화방송 <생방송 일요토픽>에서는 안면기형 치료지원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단순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집을 고쳐주거나 가게를 새로 내주는 데서 한층 진일보한 내용이다. 이처럼 최근 방송에는 장애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눈과 귀를 막고 있어 보지 못했던 장애를 가진 많은 이웃들의 이야기를 방송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일시적인 붐으로 그치는 것은 아닐까 우려도 된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경우도 비슷하다. 드라마의 갈등 구조가 천편일률적으로 ‘불치병’과 ‘출생의 비밀’이었던 것과 달리 최근 ‘장애’가 또 하나의 갈등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문화방송 <슬픈 연가>의 김희선은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고, SBS <봄날>의 고현정은 심리적인 이유로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시작됐다. ‘곧 죽는다’는 시한부 인생이라서가 아니라 볼 수 없어서, 말할 수 없어서 갈등이 생기는 것인데, 문제는 ‘치료 가능한’ 장애에만 이런 설정이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고현정은 입을 열었고, 김희선은 (곧) 눈을 뜰 테니까. 영화 <오아시스>나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처럼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지만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인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한국 공중파 텔레비전에서 볼 날은 아직 요원한 것일까.
이다혜/ 자유기고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