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열망을 차단한 상류사회의 냉혹한 폐쇄성 <베니티 페어>
▣ 김은형 기자/ 한겨레 문화생활부 dmsgud@hani.co.kr
‘베니티 페어’는 허영의 시장, 즉 허영을 거래하는 곳, 상류사회를 뜻하는 말이다. 어원는 분명 부정적 의미를 지녔지만 지금은 같은 제목의 여성 잡지(미국)까지 나와 수많은 독자를 끌어당기고 있으니, 아무리 가증스러운 허영의 집합소라고 해도 상류사회란 ‘민간인’들의 호기심과 선망을 자극하는 집단인 것 같다.
19세기 중반에 쓰인 윌리엄 메이크피스 테커레이의 소설 <베니티 페어> 역시 지금까지 6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비슷한 시대적 배경으로 상류사회의 위선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여러 번 영화화됐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프랑스 소설(또는 영화) <위험한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2004년 미라 네어 감독판 <베니티 페어>의 주인공을 연기한 리즈 위더스푼은 <위험한 관계>의 무대를 20세기 뉴욕의 부유층 고등학교로 옮겼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캐릭터는 정반대다. <사랑보다…>에서 청순한 양갓집 규수로 분했던 그는 이 영화에서 상류사회 진입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는 야심적인 여성을 연기한다.
가난한 화가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베키는 어려서 고아가 돼 하녀처럼 자란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귀여운 외모와 타고난 언변, 뛰어난 노래 실력이라는 자신의 무기를 이용해 상류사회에 진입하고자 애를 쓴다. 부와 지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방법은 결혼. 베키는 가장 친한 귀족 친구인 아멜리에의 오빠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 좌절한다.
<베니티 페어>에서 베키를 제외한 군상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부와 신분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스타인 백작), 돈 없는 귀족(아멜리아 가족), 돈은 있으나 태생은 평범한 신흥 부르주아(오스본 대위 가족)들이다. 돈 없는 귀족과 신흥 부르주아는 결혼으로 결탁해 자신들의 빈 곳을 채우고자 애쓴다. 오스본 대위의 아버지는 아멜리아 집안이 파산하자 한줌의 고민 없이 아들과 아멜리아의 약혼을 파기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흥미를 모으는 부분은 둘째, 셋째 부류 같은, ‘잔챙이’들의 이전투구가 아니다. 베키는 아멜리아 오빠와의 결혼이 좌절된 뒤 몰락한 귀족인 크롤리가의 가정교사로 간다. 베키는 크롤리가에서 유일하게 부와 지위를 함께 누리는 고모 미스 크롤리의 눈에 띈다. 언제나 낭만과 격정을 찬양하던 미스 크롤리는 베키의 전폭적인 지원자처럼 행동하지만 자신의 후계자인 조카 로든과 베키가 결혼한 걸 알고는 가차없이 상속권을 박탈해버린다. 그가 늘 숭배해왔던 ‘무모한 사랑’도 “현실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오랫동안 베키를 지켜봐왔던 스타인 백작은 베키에게 상류사회의 허상과 그들의 잔인함을 누누이 경고한다. 그러나 귀족사회에 냉소적인 것처럼 묘사되는 스타인 역시 베키를 자신의 노리갯감으로 생각해왔음이 폭로되고 만다. 지독한 폐쇄성과 그것을 포장하는 위선은 영화가 그리는 상류사회의 본질이다. 베키의 열망과 좌절에 추호의 연민도 느끼지 않는 이 냉혹함이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여인의 인생 역정마저 변두리로 비껴가게 만드는 <베니티 페어>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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