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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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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는 힘이 세다

등록 2005-01-06 00:00 수정 2020-05-03 04:23

트로트·개그·영화·드라마 파고드는 ‘쿨한 신파’… 유치한 솔직함에 웃고 애은 사랑에 운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신파가 돌아왔다. 옛날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오듯. 최근 오랜만에 트로트가 뜨고, 드라마는 신파조로 흐르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영화가 인기를 얻고 있다. 진부하지만 정겹고, 구닥다리 같지만 익숙한 신파 코드가 다시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파고들고 있다.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랍니다~.”

요즘 장윤정(24)씨의 폴카풍 트로트 <어머나>가 대박을 터뜨렸다. 어디에서도 <어머나>를 들을 수 있다. 음악 프로그램뿐 아니라 텔레비전 광고, 드라마에서 <어머나>는 흘러나온다. 이 노래는 가장 ‘새끈한’ 음악만을 사용하는 LG 싸이언 ‘뮤직폰’ 광고음악으로 쓰이고 있다. <어머나>는 터프가이 최민수를 ‘깜찍남’으로 변신시키기도 했다. 문화방송 주말드라마 <한강수 타령>에서 신률(최민수)은 애인 가영(김혜수)이 집안 문제로 괴로워하자 “불법으로 구운 CD”를 건넨다. 그 CD에서는 흘러나온 음악은 뜻밖에 “어머나~”. 시청자들은 ‘뒤집어졌다’. <어머나>는 거리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다. 이 노래는 지난 연말 휴대전화 컬러링 내려받기 순위에서 트로트곡으로는 보기 드물게 1위에 올랐다. 뜨는 노래에 얼굴까지 ‘받쳐주는’ 장윤정씨는 서울가요대상에서도 성인가요상을 탔고, ‘2004 SBS 가요대전’에서 여자트로트 부문상을 받았다.

폴카풍 트로트 <어머나> 대박나다

<어머나>의 가사는 유치하다. ‘어머나’를 연발하고, 여자의 마음을 ‘갈대’에 비유하는 유치한 가사는 경쾌한 트로트 리듬에 얹혀지면 유치함을 넘어서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한국인에게 내장된 신파 정서는 트로트의 4분의 2박자 리듬에 자동 반응한다. 80년대 이후 트로트는 주류 장르에서는 밀려났지만, 거의 주기적으로 히트곡을 내고 있다. <어머나> 음반을 기획한 김성식 인우프로덕션 전무는 “90년대 이후에도 <타타타> <찬찬찬> <네박자> 같은 주로 ‘석자’로 된 트로트가 4~5년 주기로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며 “트로트는 침체됐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트로트를 ‘가지고 노는’ 개그도 인기를 얻고 있다.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 비둘기합창단 코너의 난다김(김숙)과 랭보정(정찬우)은 “시상이 떠올랐다”며 유치한 대사를 읊는다. 알고 보면 트로트 가사다. 가령 랭보정이 “제목 사랑은 OX, 지은이 랭보정”이라고 분위기를 잡는다. 그리고 “사랑했다. 미워했다. 사랑은 OX 문제 같아요. 감독관이 없는 인생, 이리 재고 저리 맞춰 선택해놓고 이제 와서 X라면 어떡하나”라고 ‘뻔뻔하게’ 낭독한다. 바로 <사랑은 OX>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랭보정은 립싱크를 한다. 이처럼 트로트 가사를 말로 풀어놓으면 개그 대사가 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오선녀씨의 <딱 걸렸어>, 차용준씨의 <오팔년 개띠> 등의 수많은 트로트 가사가 난다김과 랭보정의 입을 통해 낭송돼 시청자를 웃겼다.

<웃찾사> 이창태 PD는 “트로트 가사는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솔직하게 자신의 아픔을 노래한다”며 “시청자들이 그 유치함에 배꼽을 잡으면서도 농익은 인생의 진실에 공감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정면으로 치고 들어오는” 트로트 가사의 솔직함에 시청자들이 울고 웃는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신파의 맥락을 달리해 수용하기도 한다. 허문영 영화평론가는 복고풍에 대해 “그 장르가 나왔던 당대의 수용 방식과 달리 일종의 자의식적 전용이 이루어지고 있다”며 “현재는 그 문화 자체의 호소력보다 그것과 거리감 자체가 유희의 대상이 된다”고 분석했다. 트로트의 유치함도 재미있는 코드로 바뀌는 시대인 것이다.

음악에서는 웃기는 신파가 유행이라면, 영상매체에서는 울리는 신파가 사랑받고 있다. 2004년 하반기 흥행 영화에는 유난히 신파 코드가 들어간 작품이 많았다. 한국 영화의 흥행 부진 속에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250만 관객을 동원했고, 외화 <이프 온리>와 <노트북>도 각각 100만, 500만의 관객을 모았다. 정우성, 손예진이 주연을 맡은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눈물 짜내는 줄거리를 감각적인 영상으로 중화해 ‘스타일리시한 신파’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 영화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연인에 대한 기억을 잃어가는 여자와 끝까지 그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속 신파 남녀의 ‘절대사랑’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래서 <이프 온리>의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하고, <노트북>의 남녀 주인공도 같은 날 숨을 거둔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는 “현실이 팍팍할수록 아름다운 사랑을 갈망하고,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를 그린 일종의 ‘판타지’인 신파를 통해 현실 너머의 세계로 도피하고 싶어하는 대중의 심리가 반영돼 있다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병, 실어증… 눈물샘 자극

지극한 사랑과 가혹한 시련을 테마로 한 신파의 현대적 변형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최근 안방극장의 주인공들은 ‘줄초상’을 치르고 있다. <러브스트리 인 하버드>의 여주인공, <12월의 열대야>와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남자 주인공은 불치병을 앓다가 숨졌다. 배국만 평론가는 “2004년 한국 드라마는 새해 벽두 <천국의 계단>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죽음으로 연말을 마무리했다”고 꼬집었다. 주인공들의 시련을 극대화해서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적’ 설정은 2005년에도 이어진다. 1월8일 방영되는 <봄날>의 여주인공(고현정)은 실어증에 걸렸고, 1월5일 시작하는 <슬픈 연가>의 주인공(김희선)도 앞을 못 보는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에서도 신파는 현대적 외양을 띠면서 끊임없이 변형되고 있다. 심지어 신파는 ‘메이드 인 코리아’의 히트상품이기도 하다. <겨울연가>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일본 중년여성들의 향수를 자극해 성공을 거두었다.

신파는 한국 대중문화의 원류다. 한국 대중문화는 일제시대 ‘돈에 속고, 사랑에 우는’ 심순애의 신파에서 시작됐다. 아직도 신파는 한국 대중문화의 특성으로 꼽힌다. 특히 90년대 이후 신파는 ‘쿨’하게 변용돼왔다. 그래서 신파가 어느 날 문득 돌아온 것이 아니라 항상 곁에 있어왔다는 분석도 있다. 허문영 영화평론가는 “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한 시대로 접어든 한국 대중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모든 문화적 취향을 무차별적으로 변용해 상품화하는 것”이라며 “마치 진열장 안에 옛것과 새것, 쿨한 것과 격정적인 것, 촌스러운 것과 세련된 것을 전시해놓고 마음대로 고르게 하는 양태로 변했다”고 분석했다. ‘쿨한’ 신파라는 형용모순이 모순이 아닌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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