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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커스] 뜬다 난다, e스포츠!

등록 2005-01-06 00:00 수정 2020-05-03 04:23

놀라운 관중동원력 자랑하는 게임대회… 스타플레이어·팬·대기업 스폰서로 프로스포츠 3박자 갖추고 훨훨

▣ 최혜정 한겨레 경제부 기자/ idun@hani.co.kr

비오듯 떨어지는 굵은 땀방울도, 심장이 터질 듯이 헐떡이는 가쁜 숨소리도 없다. 심판의 판정에 거세게 항의하는 조마조마한 장면도 연출되지 않는다.

공상과학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옷을 입고 머리엔 헤드폰을 낀 채 모니터만 줄곧 응시할 뿐이다. 다만 한 손으로 무섭게 마우스를 클릭하고, 네모난 화면 안에서 이상한(?) 물체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오락실의 오락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게임 마니아들에게 이 경기는 엄연한 ‘스포츠’다. 다만 앞에 디지털을 뜻하는 e를 붙이는 것이 좀 다를 뿐이다.

광안리 결승전 10만명 vs 사직구장 1만5천명

바야흐로 ‘e스포츠 르네상스’ 시대다. e스포츠가 젊은 층의 문화코드로 떠오르면서, 월드컵 이후 젊은이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e스포츠라는 얘기도 들린다.

젊은 세대의 문화코드로 떠오른 e스포츠는 간단히 말하면 게임대회다. 두명의 게이머가 나와 게임으로 승부를 겨룬다. 어느 스포츠나 마찬가지겠지만, e스포츠의 강점은 ‘재미’다. 게임채널 온게임넷의 스타리그·프로리그가 열리는 매주 수·금·토요일에 온게임넷의 메가스튜디오는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 나온 팬들로 가득하다. 설치한 의자 수가 곧 관객 수라고 온게임넷 관계자는 귀띔한다. 스타 선수들이 나오는 날에는 스튜디오에 미처 입장하지 못한 관객들이 복도를 가득 메운다.

e스포츠의 ‘위력’은 이처럼 관중 동원력에서 나타난다. 피리 부는 사나이에 홀린 아이들처럼 e스포츠는 젊은이들을 ‘유혹’한다.

준결승전이나 결승전 등 이른바 빅게임이 열리는 날이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관중의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해 7월 부산 광안리 해변에서 열린 ‘스카이 프로리그 2004’ 결승전에는 무려 10만 관중이 모여들었다. 같은 시각, 부산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모인 관중은 1만5천명이었다. 업계에서는 이를 ‘광안리 사태’로 부른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사건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지난 1999년 최초의 정식 게임리그인 ‘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PKO)’이 시작되면서 게임대회는 조금씩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때 벤처 열풍을 타고 30여개의 프로게임단이 창단되기도 했지만,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e스포츠도 함께 묻혀지는 것처럼 보였다.

e스포츠 열기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스타크래프트의 ‘신화’ 임요환(SK텔레콤 T1 소속) 선수의 등장이다. 회사원 송영욱(30)씨는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면서 온갖 전략과 통제를 구사한 것은 임요환 선수가 처음이었다”며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당시 모이기만 하면 ‘임요환 경기 봤냐’가 대화 주제였다”고 기억했다. 현재 임요환 선수의 팬클럽은 50만명을 넘어선다.

e스포츠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를 마케팅 도구로 삼는 기업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2004년 12월 현재, 한국e스포츠협회에 등록된 게임단 13곳은 대부분 정보기술(IT) 기업들의 후원을 받고 있다. KTF(매직엔스)와 SK텔레콤(T1), 한빛소프트(한빛스타즈), 팬택앤큐리텔(큐리어스) 등이다. e스포츠를 즐기는 10~20대가 휴대전화, 인터넷, 게임업체 등 IT기업의 주된 소비층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기업은 물론 주요 인터넷 업체들이 앞다퉈 게임단을 창단하거나 게임리그의 공식 후원자로 나서고 있다. 올 4월 게임단 ‘T1’을 창단한 SK텔레콤은 게임단 운영에 20여억원을 투자했지만, 실질적인 마케팅 효과는 760%(150여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자체 분석한다. 브랜드의 언론 노출 빈도와 소속 선수들의 인기 등을 수치로 환산한 결과다.

전용 경기장 예정… 스타크래프트 다음은?

LG전자는 최근 게임채널 온게임넷에서 주관하는 챌린저리그의 공식 후원사로 나섰다. ‘싸이언 챌린지 리그’를 통해 브랜드 인지도와 호감도를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게임리그를 처음 시작, 중계하고 있는 온게임넷 관계자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게임리그의 후원사를 찾느라 직원들이 기업들을 찾아다녔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기업쪽에서 후원 문의를 해오고 있다”고 밝혔다. 온게임넷은 13~25살 남성 시청률을 기준으로 공중파를 제치고 시청률 1위 자리를 굳혔다.

전문가들은 “이제 e스포츠도 ‘선순환’ 구조에 들어섰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 대표 e스포츠 종목인 ‘스타크래프트’의 경우에는 팬과 스타플레이어, 대기업 스폰서까지 프로스포츠 ‘3박자’를 고루 갖췄다. 임요환, 홍진호, 이윤열 등 스타 프로게이머가 등장하면 팬들은 구름같이 몰려들고, 기업들은 마케팅을 위해 게임단 육성에 적극적이다.

이처럼 e스포츠가 진화를 거듭하면서, 정부도 날개 달아주기에 나섰다.

문화관광부는 지난 12월15일 ‘e스포츠 발전 정책비전’을 발표하고 앞으로 3년 동안 14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e스포츠 육성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또 e스포츠의 기초 인프라 조성을 위해 2008년까지 전용 경기장을 세우고, 프로게이머 권익 보호와 e스포츠 체계화 작업을 시작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e스포츠 발전의 걸림돌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가장 고민스러운 부분은 스타크래프트의 대안을 찾는 일이다. 워크래프트2와 일부 축구게임이 그나마 관객몰이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스타크래프트 경기의 인기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게임을 찾기 어려운 탓이다. 여기에 그동안 국내 e스포츠 관련 단체나 기업이 따로 움직이는 점도 발전의 걸림돌로 지적됐다. 이 때문에 문화관광부에서는 e스포츠 정책과제에 게임개발 지원과 협회 일원화를 중요 정책으로 추진 중이다.

어린이날, 부모와 아이가 손 붙잡고 게임 구경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캐스터, 옵저버… 파생직업 생기네

e스포츠 관련 직업들



“이 선수 9시 상대 진영에 드랍십을 날렸습니다. 김△△ 선수 아직 눈치 못 챘습니다. 럴커드랍… 럴커드랍… 네 본진에 엄청난 타격을 입고 있는 △△ 선수… 앞마당 확장기지에 있던 병력들 수비하려고 황급히 돌아오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e스포츠가 어엿한 산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관련 직업들도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일반 스포츠 경기에 해설자, 캐스터가 있는 것처럼, e스포츠도 맛깔스러운 경기 진행을 위해 게임해설자와 게임캐스터가 필요하다.
현재 각 게임전문 방송사에서 게임캐스터로 활동하고 있는 게임해설자와 캐스터는 20명 안팎이다. 국내 대표적인 게임캐스터인 전용준과 정용훈, 정소림, 최은지씨 등은 모두 방송진행자 출신이다. 게임캐스터인 김도형, 김창선, 김동수, 이현주씨 등은 전직 프로게이머다.
‘대한민국 1호 게임해설가’ 엄재경씨는 만화스토리 작가 출신이다. 게임 마니아였던 엄씨는 지난 1999년의 투니버스 원년리그부터 시작해 지금은 온게임넷의 게임해설자로 일한다. 엄씨는 “이미 게임해설가나 캐스터는 어느 정도 명성을 쌓은 이들이 있기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라며 “게임산업이 워낙 역동적인 분야이니 자신이 직접 전문적인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e스포츠에서 카메라맨의 역할을 하는 이들은 게임옵저버다. 프로게이머들이 경기하는 게임 화면 중에서 중요하고 재미있는 부분을 잡아 방송 화면으로 내보내는 역할이다.
게임옵저버 김희제씨 역시 게임 마니아에서 시작해 게임교육기관 강사, 게임해설가 등을 거쳐 게임옵저버로 자리잡았다. 김씨는 “e스포츠가 자리를 잡는 단계이다 보니, 관련 일을 하는 데 공식적인 경로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아무래도 게임을 좋아하고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는 분들이 적합하다”고 말했다. 게임옵저버를 그만둔 뒤에는 게임개발쪽에 뛰어들 생각이다.
최혜정 기자




"손가락 감각이 무뎌지면…"

팬택앤큐리텔 큐리어스 합숙소 풍경



서울 대학로의 공연장에서 생일파티를 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팬이 사인을 받으려고 새벽까지 숙소 앞을 떠나지 않는다면 연예계 스타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프로게이머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일이 됐다. ‘토네이도 테란’ 혹은 ‘천재 테란’이라는 닉네임으로 널리 알려진 이윤열(22) 선수는 “새벽녘에 들어갔을 때 팬들이 찜질방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며 얼굴을 붉힌다.
프로게이머는 ‘e스포츠’의 꽃이다. e스포츠에 열광하는 많은 이들은 대부분 좋아하는 선수 한두명씩 마음에 품고 다닌다.
팬택앤큐리텔의 프로게임단인 큐리어스 합숙소 훈련실에는 20여대의 컴퓨터가 오밀조밀 자리잡고 있다. 아침 10시쯤 일어나 식사를 한 뒤 11시부터 4시까지 실전 경험을 쌓고, 다시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게임을 치른다. 저녁 시간은 따로 없어 알아서 챙겨먹어야 한다. 1일 계획표가 있다고 해서 모두 따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심야 시간에 훈련장의 컴퓨터가 바삐 돌아가는 때도 흔하다. 모든 선수들이 ‘정상’을 향해 달려가기에 경쟁을 피할 수 없지만 따뜻한 동료애로 ‘전략 회의’를 이따금 열기도 한다.
지난해 8월 ‘팬택앤큐리텔 큐리어스’ 창단과 함께 프로게이머 사상 최고액인 3년간 6억원의 연봉 계약을 맺은 이윤열 선수. 이 선수는 서울 서초구 방배중학교 부근의 단독 빌라에서 10명의 동료와 함께 지낸다. 합숙소 앞에 세워진 스타크래프트 밴에는 팬들의 낙서가 빼곡해 프로게이머들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다. 이 선수는 지난해 8월 최연성(23·SK텔레콤) 선수에게 KeSPA 랭킹 1위 자리를 내주기 전까지 무려 15개월 동안 ‘공인 1위’였다. 당연히 올해의 목표는 정상 탈환이다.
“윤열이 형과 게임을 하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아요. 예상치 못한 공격이 많기 때문이죠. 새로운 전략을 짜는 능력도 탁월하고요.” 후배 이병민(20) 선수가 선배 자랑을 하자 이에 질세라 이윤열 선수는 “기본기가 워낙 탄탄해서 한참 게임을 하다 보면 병민이의 전술에 말려들곤 하죠. 평범해 보이는 전술에 비범한 전략이 담겨 있는 것이죠.” 이렇게 게임단에 속한 선수들의 상대방의 장점을 배우면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해나갈 수 있다.
하지만 프로게이머가 되는 길은 험난하다. 게임단에 연습생으로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다. 연습생으로 메이저 대회에서 승점을 쌓아야 ‘준프로’ 자격을 얻고, ‘준프로’로서 (사)한국e스포츠협회에서 정한 등급에 올라야 비로소 프로게이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프로게이머라 해도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윤열 선수만 해도 공인 1위로 ‘SG 패밀리’로 활동하면서도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안정적으로 연습을 할 수 없었고 ‘밥값’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군대 문제도 풀기 어려운 숙제다. 현재 최고참 프로게이머 ‘테란 황제’ 임요환(26·SK텔레콤) 선수는 오는 7월로 군입대 일자를 통보받았다. 대학원에 진학해 2년을 미뤄도 2007년이면 군에 가야 한다. 이제 막 스물두살이 된 이윤열 선수도 벌써부터 군입대를 고민한다. “지금도 손의 감각이 예전 같지 않아요. 머리가 생각하는 대로 손이 따라가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군대에 가면 감각을 회복하기 어려워요.” 이때 ‘젊은’ 이병민 선수가 “게임 올림픽을 창설해 메달리스트에게 혜택을 주면 안 될까요”라고 묻는다.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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