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_식_장 프로젝트’ 작가 38명의 고정관념 깨기… ‘궁전 예식장 점거한 김공주’에게 개성 있는 결혼식을!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책장에 갇힌 책들에 예술의 향기를 불어넣어 갤러리로 이끄는 북아티스트 박소영씨. 책의 책장 탈출을 꾀하던 그가 판박이 결혼에 한방을 날리는 신선한 대안을 내놓았다. 결혼의 주체인 신랑 신부의 얼굴은 바라볼 겨를도 없이 “국수 한 그릇 먹어보자”며 피로연장으로 사라지는 하객들을 ‘나누는 차, 나누는 책’으로 붙드는 것이다. 그가 마련한 소박한 식탁에는 한 상 가득 차린 요리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누구나 결혼의 의미를 생각하며 간단히 블렌딩해서 마실 수 있는 차와 책을 통한 다과가 준비돼 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결혼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부복제’ 당하려고 신부수업 했나요
“지금의 결혼 문화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가부장 문화를 패키지로 판매하는 상품이 인터넷에도 넘쳐나고 있다. 상업적 결혼 문화가 대안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확고히 자리잡은 것이다.” 박씨는 신랑과 신부의 마음을 전하는 피로연을 떠올려 세개의 테이블을 마련했다. 첫 번째 테이블에는 메뉴를 담은 미니 아트북을, 두 번째 테이블에는 결혼 당사자가 의미를 부여한 차를 원하는 만큼 마시고 책처럼 묶은 비스킷을 먹게 된다. 세 번째 테이블에는 결혼문화의 안과 밖을 떠올릴 수 있는 글귀가 국수 가닥처럼 생긴 종이에 타이핑됐다.
그동안 결혼문화에서 소외됐던 커플들이 주인으로 자리잡는 모습은 그것만이 아니다. 서울시 동부여성발전센터에서 열린 ‘여성과 공간 문화축제 2탄, 결혼_식_장 프로젝트’ 전시장에는 결혼식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작품들이 수두룩했다. 여성문화예술기획 여성문화전문아카데미 문화기획과정 수강생들이 마련한 ‘김공주, 궁전예식장 점거하다’라는 제목의 축제 기간에 열린 전시였다. 전시를 기획한 여성문화전문아카데미 오혜주 큐레이터는 “결혼문화의 현재를 보여주고 대안을 제기하는 작품을 38명의 작가에게 의뢰했다. 개성 있는 결혼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다”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 여성들의 신부에 대한 환상을 대표하는 김공주. 그는 독립적인 주체로 평등하고 가벼운 결혼식을 올리길 기대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곳은 복제 건축 양식의 예식장일 뿐이다. 여성문화예술기획 사진고급반 수강생들의 렌즈에 포착된 예식장은 로코코풍 양식에 우뚝 솟은 탑과 환상적 색감의 간판으로 ‘파란만장 결혼동화’를 읽게 한다. 놀랍게도 다른 간판을 달고 있는 예식장을 한데 모으면 곧바로 ‘궁전 예식장’이 따로 없다. 김공주는 부부를 찍어내는 궁전에 다다르려고 신부수업을 받았던 셈이다. 궁전 예식장 주변에는 변함없는 사랑을 상징하던 대형 케이크가 금이 간 채로 방치돼 있다.
궁전 예식장의 기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신부 드레스만 입으면 어디에서라도 웃어야 한다. 청소기와 걸레에 묻혀 살면서도 ‘핑크의 로망’을 떠올리면 무조건 웃어야 하는 것이다. ‘착한 딸로 살아가는 법’을 몸 보정용 의자로 보여주는 송상희씨의 ‘체험! 신부대기실’은 끔찍하게 느껴질 만하다. 신부는 바르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마네킹처럼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 신랑은 웃음을 머금고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신부의 고통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신랑을 앉혀 착한 아들이 되기 위한 몸짓을 배우라고 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다.
모텔로 예식장, 생리대로 드레스
이쯤 되면 궁전 예식장을 점거하려는 김공주의 야심찬 도전에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궁전에서 나고 자랐다 해도 거기에서 대를 이어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성문화전문아카데미 문화기획강좌 1기 수강생들이 ‘부엌 프로젝트-세개의 고무장갑’을 통해 부엌이 ‘여성만의 공간’이라는 굴레를 깨뜨린 데 이어 결혼식장의 속내를 드러낸 이유는 분명하다. 이번 행사에 마케팅 기획으로 참여한 박미경씨는 “궁전 예식장으로 상징되는 지금의 결혼식은 가문의 뜻에 따라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며 “독립적 주체가 평등하게 대접받는 가벼운 결혼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대안 결혼 박람회라는 이름이 거창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랑과 신부가 만들어내는 즐겁고 개성 있는 결혼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생각을 바꾸면 생활이 편해진다는 말을 확인하면서. 일단 사진으로 궁전 예식장 밖에서도 얼마든지 근사한 결혼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모텔을 예식장 삼아 ‘내 멋대로 결혼식’을 치를 수도 있지 않은가. 웨딩드레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릴 수도 있다. 하얀 웨딩드레스가 순결을 상징한다면 이현영씨의 ‘생리대 드레스’는 순결 이데올로기에 칼을 댄다. 육체적 성숙을 뜻하는 생리대로 사회적으로 어머니 ‘자격’을 부여받는 드레스를 만든 것이다.
용감한 신부로 궁전 예식장을 박차고 나왔다면 결혼생활을 재발견하는 것도 가능하다. 양성평등은 성생활에서 예외일 수 없다. 더 이상 수동적 섹스를 강요당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설치와 비디오 퍼포먼스로 보여주는 창파의 ‘해피 섹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다양한 체위를 만들 수 있는 헝겊 퍼즐을 가지고 놀거나, 괄약근을 강화하는 스태미나 동작을 비디오로 익히면 성을 가볍고 유쾌하게 대할 수 있지 않을까. 궁전 예식장을 점거한 김공주는 전투 과정에서 ‘혼전 계약서’와 ‘부부재산 청약서’도 작성해 부부의 다른 욕구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지금 김공주의 파트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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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커플은 지난 12월6일 ‘깃털보다 가벼운 진짜 결혼식’을 올렸다. ‘김공주, 궁전 예식장 점거하다’의 폐막제로 열린 결혼식은 궁전 예식장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실제 커플들이 참여하는 결혼식에 앞서 사물놀이로 흥을 북돋우고 취발이가 사전 행사를 주도했다. 행운을 전파하는 길조로 알려진 두루미로 인형극을 펼치고 공연장이 아니라면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마임 공연도 있었다.
다른 결혼식은 신랑 신부 입장에서부터 확연히 달랐다. 웨딩드레스는 낡은 선입견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신랑은 재활용 티셔츠로 디자인한 셔츠와 넥타이에 청재킷을, 신부는 청치마에 무늬가 있는 셔츠, 날개를 달고 무대로 나갔다. 이들은 신랑 신부가 입장할 때 연주되는 천편일률적인 웨딩마치 대신 록음악으로 한껏 개성을 뽐냈다. 다른 커플은 왈츠에 맞춰 우아한 몸동작을 선보이는 식으로 하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이날 실제 결혼식을 치른 커플들은 지난 2일 개막제로 열린 ‘넉픽션 결혼식 퍼포먼스 희희락락(喜喜樂樂)’ 예행연습으로 분위기를 익히기도 했다. 내년 4월 결혼을 앞두고 퍼포먼스 예비 결혼식을 경험한 최은영·이윤호 커플은 “결혼식은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치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김공주의 아이디어를 내년에 하는 결혼식에 적용해 우리가 주도하는 결혼식을 치르겠다”고 말했다. 이제 하객들은 색다른 결혼식을 경험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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