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순지의 ‘두 소녀’가 보여주는 사랑의 정체성
▣ 이성욱/ 기자 lewook@cine21.com
꽤 오랫동안 SF 장르의 인기 테마는 ‘기억’이었다. 기억(혹은 추억)에 대한 문제로 인간이란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는 방식이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이 그랬고, 오시이 마모루의 걸작 애니메이션 도 그랬다. 이와이 지는 그 기억의 문제를 사랑의 정체성과 연결지었다. 죽은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에서 시작된 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었지’라는 사라진 기억을 마침내 떠올리게 되는 순간, 영화를 끝냈고 오랜 여운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최근 극장가를 석권한 한국 영화 는 아예 ‘나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지워진 그대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란 물음에서 시작된 영화다.

이와이 지의 는 10대 소녀의 사랑 성장담이지만, 그 속에 이런 질문을 또 한번 살짝 담가놓았다. 전철역에서 본 미야모토(가쿠 도모히로)를 짝사랑하게 되면서 ‘그림자 스토커’가 된 하나(스즈키 안)는 그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만담 서클에 가입한다. 회장을 뺀 서클 회원은 미야모토와 하나, 둘뿐이다. 여느 때처럼 미야모토의 뒤를 좇던 하나는 만담 연습에 몰두하다 셔터 문에 부딪혀 기절한 미야모토를 깨우며 기막힌 거짓말을 생각해낸다. “선배, 기억 안 나요? 나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했잖아요.” 이제 거짓 기억상실증이 만들어낸 사랑이 시작됐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는 자신과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는 앨리스와 사귀었다고 방어막을 쳐놓았고, 앨리스는 자신을 찾아온 미야모토에게 “다시는 날 찾지 마!”라고 호통을 친다. 앨리스는 단짝친구 하나가 부탁한 대로 행동했을 따름이지만, 미야모토는 자신의 기억상실을 꼼짝없이 믿어버린다. 실재하지 않았던 두개의 사랑을 기억상실이란 이름으로 떠안게 된 미야모토는 당연히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믿게 된 과거를 더듬고 느끼고 싶어한다. 문제는 미야모토가 하나와의 기억보다는 앨리스와의 기억에 더 매달린다는 것이다. 앨리스 역시 점차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빠져들며 그에게 사랑에 관한 인공의 기억을 하나씩 주입한다.
오해는 말자. 의 주인공은 미야모토가 아니고, 주된 테마가 기억에 속박당한 사랑 이야기도 아니다. 속된 세상에 스스로를 떼어놓은 듯 우정을 나누던 하나와 앨리스가 관객의 눈을 빨아들이는 예쁘고 매력적인 캐릭터의 주인공이며,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빨려들어간 ‘삼각관계’를 거치며 성장의 진통을 겪는다는 것이 본론이다. 이 본론은 충분히 흥미롭게 형상화돼 있지만, 이와이 지의 감수성은 좀더 넓게 퍼져 있다. ‘사랑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생겨나는 기억’이라는 일반법칙을 거꾸로 뒤집을 수도 있다는 상상력이 그렇다. 그 역발상의 찰나에 사랑의 정체성은 순간적으로 굉장히 얄팍해진다. 이 자극의 순간이 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을 좇다 앨리스보다 더 소녀처럼 남아 성장을 멈춰버린 앨리스의 엄마가 등장하는 부분도 그래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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