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음악인 정재일은 1978년작 김민기의 노래굿 을 어떻게 리메이크했을까
▣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2002년 12월, 1978년작 을 다시 만질 음악가를 물색 중이던 김민기씨는 주변의 추천을 받아 정재일(22)씨를 만났다. 정작 그는 음악 얘기는 제쳐놓고 농촌과 탄광을 돌아다닌 과거를 늘어놓으며 술잔을 건넬 뿐이었다. 그 뒤 정재일씨는 “원작과 다르게 하라”는 주문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2003년 초 개인 작업과 병행하는 게 어려워지면서 작업은 중단됐고, 다른 음악가를 만나지 못한 프로젝트는 2004년 1월 그에게 다시 돌아왔다. 10개월 뒤 은 1978년작 DVD와 2004년작 CD, 2개의 판이 묶여 세상에 나왔다.
불법 테이프에 담긴 음악적 미학
1978년작 은 사회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분명 문제작이다. 송창식씨의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반주에 이화여대 방송반 스튜디오에 모인 청년들의 노래를 덧입혀 만든 음반은 2천여개가 불법 복제되어 배포됐다. 1976년 동일방직 노조 사건을 모태로 한 이 카세트테이프엔 1970년대 후반 한국 노동운동의 일반적인 정황이 담겨 있다. 혹독한 작업 환경에 놓인 노동자들의 노조 설립 의지와 좌절, 그리고 남겨진 희망으로 구성된 노래굿은 별도의 대사 없이 노래만으로 사건의 얼개와 인물의 감정을 구현해낸 일종의 오페라다.
은 프로파간다였다. 여공들의 방에 카세트가 하나씩 등장하던 시절, 김민기씨는 새 매체의 파급력을 감지하고 LP판이 아닌 카세트테이프로 음반을 찍었다. 앞면엔 노래를, 뒷면엔 반주를 실어 현장에서 실연할 수 있도록 했다. “뒷면의 반주 테이프로 몇 사람이 노동자들이 재미있게 꾸밀 수 있을 것입니다.”( 중)
그러나 은 프로파간다 특유의 과장을 경계하면서 진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음악적 미학을 일궈냈다. 특정 계급과 이념을 대변하는 예술은 정치나 종교, 사상의 선전물이 되어 행동강령을 강요하는 사이 심미성을 잃기 쉽다. 하지만 이 간직한 저항정신과 유기적 완결성을 구현한 형식미, 구전가요·흑인영가·남도소리·전자음악을 풀어낸 음악적 감수성은 2004년에도 빛난다.
“김민기 선생님의 노래는 소박하고 서정적인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걸 처음 들었을 때 다듬어지지 않은 사나운 소리들에 놀랐죠. 혼재된 스타일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정재일씨가 느낀 첫인상이다. 단순한 전자음의 선율이 만드는 극적 긴장감은 으로 이어지는 초반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연극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회화적 상상력은 전위적인 외국 프로그레시브 록의 실험성을 능가한다. “이런 작품이 그 시절에도 있었구나, 김민기라는 사람이 이런 작품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2004년 1월 시작된 작업은 막막할 뿐이었다. 마감시한 2월이 다가오자 촉박한 마음에 “역작을 만들자”는 생각을 내려놓고 급히 첫 번째 노래극을 완성했다. 정작 기본 뼈대가 나오면서 아이디어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김민기씨도 작업의 연장을 권유했다. 결국 10개월 뒤 정재일씨는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집시음악, 별신굿, 정악 섞어내다
정재일씨는 소리를 풍부하게 다룬다. 월드뮤직·클래식·국악·락·재즈 등 장르를 불문한 음악적 섭생이 소리를 윤택하게 한다.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개고요’로 시작하는 을 놓고 꽤 고민했단다. “구전민요 같기도 하고, 트로트 같기도 했죠. 결국 집시음악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핍박을 받으며 유랑하는 정서가 노동자와 비슷하기도 하고요.” 집시음악의 정서는 전체 음반을 관통하는 모티브가 됐다.
구사대의 출현부터 노조 설립의 좌절까지 이어지는 절정 부분은 원작에선 하나의 국악 장단으로 교묘히 연결된다. 정재일씨 버전에선 극적인 느낌이 강조된다. “은 신나게 하고 싶었어요. 복잡한 리듬은 ‘드럼 앤 베이스’에서 따오고, 시끌벅적한 느낌은 동해안 별신굿으로 살렸죠. 꽹과리 소리가 들리실 거예요. 원곡의 멜로디는 쭉 늘려서 자유롭게 하고, 전진하는 느낌을 내기 위해 전인권씨 목소리를 빌렸습니다.”
극중 가장 중요한 인물인 ‘순이’는 넓은 스펙트럼을 소화해낼 수 있는 빅마마의 이지영씨에게 부탁했다. 에서도 깊이감은 느껴진다. “수제천이나 종묘제례악 같은 정악을 좋아해요. ‘탁’ 하는 박 소리 뒤로 느리디 느리게 멜로디가 진행되죠. 그 안엔 자그마한 변화들이 미세하게 존재하죠. 장엄하고 원시적이에요. 시조 같은 가사를 가진 에서 정악과 오케스트라를 펼쳐봤습니다.” 그 밖에 가수 이소은씨를 ‘아무것도 모르는 서무’로, 이승열씨를 ‘굳건한 남공’으로, 이적씨를 ‘간사한 공장장’으로 불렀다. 젊은 소리꾼 남상일의 아니리도 들린다.
물론 1980년대생인 정재일씨의 과거엔 1978년이 기록돼 있지 않다. 하지만 문헌과 이야기로 더듬어본 그 시절은 끔찍했고, 이는 여전히 이주노동자를 통해 현실로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1978년작을 만진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짐이 되진 않았다. “김민기 선생님도 그저 무시하라고 했습니다. 과거를 알 필요는 있지만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고요. 저도 새로운 음악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하여 들어볼 것을 권유한다. 희곡집에 가까운 가사집을 들고 음반 전체를 좇아가면 새로운 느낌을 얻을 수 있다. 또한 1978년작과 2004년작 두 작품을 모두 들어보길 간청한다. “을 모르는 또래도 이런 삶, 작품, 예술가가 있었다는 걸 알면 좋겠어요. 2004년작은 옛날의 음악을 기억하시는 분들께 생소한 감동을 전해주고요.”
은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모두 ‘김민기’의 과거에 집중할 때 김민기씨는 ‘현재’에 살고 있었다. 다만 직접 노래를 만드는 대신, 정재일이라는 젊은 음악인을 통해 낯선 음악을 출아(出芽)했다. 단세포의 혹이 떨어져 새로운 생물체가 만들어지듯 1978년작 은 2004년,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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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쟁쟁한 음악인과 팀을 짜서 공연을 한다는 뉴스가 돌던 게 어느덧 7년 전이다. 작곡·편곡·반주로 음악작업을 하던 정재일씨는 2003년 1집을 내며 자기만의 음악을 찾기 시작했다.
- 음악 경력이 짧지 않다.
= 4살 때 동네 피아노학원에 처음 갔고,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을 졸라 기타를 시작했다. 밴드활동을 하다가 중2 때 재즈아카데미에서 작곡을 배웠고, 중3 때 정원영·한상원 밴드의 일원으로 프로에 입문했다.
- 2003년 1집 이 나왔다.
= 첫 음반에선 오케스트라를 콘셉트로 삼았다. 어릴 때부터 참 좋아했다. 악보로 그려진 선율이 수십명의 연주로 눈앞에 나타날 때 그 순간은 너무 감동적이다.
- 음악이 조금 심각하게 들린다.
= 나도 인정한다. 음악작업도 심각해지곤 했다. 오케스트라 곡은 무대 재현도 어렵기 때문에, 앞으로는 가벼운 음악을 즐겁게 해볼 예정이다.
- 궁극적으로 어떤 음악을 할 건가.
= 나만의 음악, 새로운 음악을 하고 싶다. 음악을 만드는 이, 듣는 이가 모두 한 원에서 연결된 느낌, 그런 감동을 전하고 싶다.
- 음악 외에 당신이 즐기는 건?
= 무용과 연극에서 많이 배운다. 댄스시어터에 특히 관심이 많다. 무대장치·소품·의상이나 순간적인 몸짓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
- 중단된 학업을 계속할 것인가.
= 대입 검정고시를 봤는데, 밴드활동 때문에 때를 놓쳤다. 기회가 되면 문학과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 티타늄 가공이나 옷 재단도 해보고 싶다.
- 다들 천재소년이라고 말한다.
= 어릴 땐 좋았다가, 그 뒤 아무 감정이 없다가, 요즘은 이제 그만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영화음악이나 총체극 음악에 관심이 많은 그는 11월 초 독일에서 열리는 한국음악축제에서 전자음악을 선보일 예정이다. 하늘과 대지를 한껏 껴안으려는 그의 음악이 우리에게 상상의 공간을 무한 확장할 것을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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