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공연] 환상여행, 괴물이 춤춘다

등록 2004-10-22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 배우와 인형이 내면을 파헤치는 종합공연 … 특수효과로 무의식 세계가 마술적 무대에 펼쳐져</font>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관객이 우주의 블랙홀로 빠져들 듯한 무대가 있다. 때로는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가 관객을 삼킬 듯하다. 어둠 속에서 형체를 드러낸 몇 가닥의 선이 배우와 오브제, 인형이 되어서 무대를 떠돈다. 신비로운 움직임이 공간을 자유자재로 채운다. 관객들은 우주선을 타고 신비로운 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거기에 몽환적인 음악이 흐르면서 관객은 꿈결을 헤맬 수도 있다. 다시 현실감을 느꼈을 때 무대에는 특수효과에 의한 마술적 장면들이 눈을 붙든다. 그렇게 ‘몸짓’으로 환상여행을 유도하는 프랑스의 공연 연출가 필립 장티(66·필립 장티 극단 대표)의 몽환적인 무대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필립 장티, 정신치료 중 인형극 만나

지난 10월14일 경기도 안산 문화예술의전당 별무리극장에서 국내 초연한 은 인간의 몸짓과 다양한 오브제에 창조적 생기를 부여하는 자리였다. 6명의 배우가 잠수부·요리사·철학자·우주비행사 등으로 분해 여러 인형들과 함께 이미지의 축제를 열었다. 여기에서 마임과 무용, 무용극 등을 결합한 색다른 무대언어가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마임 특유의 몸짓만 기대했던 관객이라 해도 이미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연장을 빠져나오면 이미지에 도취된 자신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초현실적 이미지가 무의식을 깨워 한 줄기 신기루 속에 빨려들도록 했던 것이다.

환상적인 내면 세계를 보여주는 필립 장티의 이력은 독특하다. 애당초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대학 시절 정신불안을 겪었다. 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인형극에 눈을 뜨게 됐다. 젊은 시절 친구와 함께 4년 동안 세계여행을 하면서 인형극으로 경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본격적으로 인형극에 나섰다. 그가 인형극에 무용과 마임 등을 접목한 것은 무용을 전공한 부인을 만난 덕택이었다. 일종의 종합예술로 포장된 은 인간의 내면을 엿보며 영혼의 치유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68세대로서 보편적 인류애를 견지하는 그의 무대언어는 자유롭기 그지없다. 관객은 자유로움을 만끽하다 보면 마술에 걸린 듯 이미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관객들은 에서 어떻게 이미지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던 것일까. 관객들은 공연 시작과 더불어 현실을 벗어나 몽환적 세계에 진입할 수밖에 없다. 검은 막 위에 하얀 선들이 중앙의 한 점에 모인 다음 원근을 만들어 소실점으로 사라진다. 수직의 막이 평면에서 입체로 변하면서 환상의 선은 무대의 배우를 제거하고 청중석에 있던 배우들이 일제히 무대 위로 올라간다. 이들은 심연에 대해 말하며 초현실적 분위기를 주도한다. 거기에서 관객들은 외부 세계와 맞서기 위해 내면의 갈등을 제거해야 하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이때 초현실적 이미지에서 무의식의 자아를 만나는 독특한 경험을 체험하게 된다.

일반적인 공연은 평평한 무대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은 무대 공간을 상하로 구분했다. ㄷ자 모양의 플랫폼이 무대를 감싸고 그 아래에선 파도가 출렁대고 위에선 배우가 몸짓 연기를 펼친다. 그리고 공중에서는 우주인인 된 듯한 배우가 유영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상하 무대라 해서 마술적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빛의 움직임이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무대 양쪽에 설치된 조명기가 무대 윗부분은 밝게 비추고 무대 아래는 암흑 세계로 만들면서 심연의 깊이를 더한다. 필립 장티 극단이 빛을 조정하는 기술을 보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양한 크기의 인형, 초현실적 이미지

이미지의 심연에 빠져든 관객들은 욕망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게 된다. 관객들은 심연으로 항해를 하면서 배우와 함께 20cm에서 3m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인형들을 만날 수 있다. 인형들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다. 이들은 그들만의 공간에서 잠재된 꿈을 펼쳐 보인다. 주말에 컴퓨터 전문가로 활동하는 개가 사람과 마주 앉아 입에서 비눗방울과 공이 튀어나오는 신기하고 코믹한 장면을 연출한다. 대형 ‘오게’(내 안의 또다른 나를 뜻함)귀신은 단순히 무서운 괴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내부의 상처와 욕망을 나타내는 존재다. 오게귀신은 우리 스스로를 상징하는 또 다른 등장인물을 통해 하부 의식이 무의식에 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현대 연극을 대표하는 자크 르콕은 “좋은 텍스트는 신체 안에 있다”고 간파하지 않았던가. 배우의 몸짓은 온갖 감정의 편린을 담아내게 마련이다. 몸이 예술의 ‘자궁’ 구실을 하면서 무수한 기억과 상처, 상념 등을 소리 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더욱이 마임의 몸짓은 대사의 구속을 받지 않으며 자유로운 상상력의 씨앗을 뿌리고 내면과의 대화를 시도하게 한다. 은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해 잠들어 있던 관객의 무의식을 깨운다. 많은 오브제들이 마술적 힘에 의해 무대에서 새롭게 태어나, 관객들이 괴물을 만나 웃고 즐기며 꿈을 꾸게 하는 것이다.

은 손과 마음을 통해 철학적 주제에 다가선다. 필립 장티는 마치 조물주처럼 탄생과 죽음을 주관하면서도 무대의 분위기를 가볍게 이어간다. 만일 관객이 이미지의 흐름에서 무엇인가를 읽어내려 한다면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인형을 해석하는 것마저 부담스러울 것이다. 이 줄곧 인간 내면과의 갈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필립 장티는 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 내면을 괴물로 다루었다. 괴물이 무섭다는 것은 선입견일 뿐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니게 되는 다양한 느낌을 괴물로 다루고 싶었다. 자신 안에 있는 괴물이 너무 커지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주와 바다가 공존하는 신비로운 공간은 보고 싶은, 보고 싶지 않은 내면세계였다. 무대 위의 환상적 장치들은 내면의 욕망을 드러내는 기제 구실을 한다. 인형만 해도 영혼으로서 우리 자신의 숨겨진 애니미즘 도구로 쓰인다. 어쩌면 이런 것에서 자유로워야 의 진짜 미덕을 즐기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상황에서 확대되고 분열된 인간들의 무의식과 꿈 역시 과거의 재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무의식의 심연 속에서 우주비행사로 잠수부로 허공을 떠다니고, 무중력으로 달 위를 걷고, 사람(자신)을 삼키는 괴물이 되었던 나를 바라보는 게 신비로운 경험인 것만은 틀림없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