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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외로운 ‘섬’에서 나부끼다

등록 2004-09-23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문화방송 의 마니아적 매력… 네 남녀의 눈물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소통방식에 ‘알랜폐인’들 열광 </font>

▣ 피소현/ 기자 plavel@hani.co.kr

어떤 이는 ‘가슴을 울리는 드라마’라 하고, 어떤 이는 ‘사이코 같은 드라마’라 한다. 극과 극의 호평과 악평이 엇갈리는 드라마, 바로 문화방송 수목드라마 다. 는 방영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2002년 방영되어 드라마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의 인정옥 작가와 이나영이 2년 만에 다시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기대감은 증폭됐다. 그리고 6부까지 방영된 지금, 가 불러일으킨 효과는 사람들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시청률은 저조하지만 ‘알랜폐인’이라 불리는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으며 젊은 층에게 중심 화제로 떠올랐다.

의 후광은 덫인가

와 가 새로운 문화현상을 낳으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음에도 20%대의 시청률에 머물렀듯이, 이른바 ‘마니아 드라마’라 불리는 작품들은 대체로 시청률이 높지 않다. 40, 50%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드라마들처럼 고르게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때문에 의 기획을 맡은 김사현 PD는 제작발표회에서 “정말 좋은 드라마지만 시청률은 포기하고 만들고 있다”고 대놓고 밝혔고, 인정옥 작가 또한 시청률 부담에 대한 질문에 “내 드라마가 ‘국민드라마’가 되기 어렵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의 시청률은 의 마지막 회와 겹친 첫 주에는 한 자릿수에 머물렀고 이후 10%를 겨우 넘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낮은 시청률뿐 아니라 에 쏟아지는 비난도 만만치 않다.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내뱉는 대사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드라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시청자가 있는가 하면 의 아류작일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와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줄 것이라 했던 이나영의 연기는 ‘전경’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고 현빈·김민정·김민준의 연기도 양동근·공효진에 못 미친다고들 한다. 인정옥 작가가 만들어내는 세계의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청자는 논외로 하더라도 결국 의 후광이 덫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에도 ‘알랜폐인’들은 또다시 그들만의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사실 ‘네 멋 마니아’와 (김민준이 출연하므로) ‘다모폐인’들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에 열성 마니아들이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의 활약 덕분에 방송사 홈페이지 게시판은 접속 마비 사태를 맞기도 했고, 포털 사이트의 팬카페는 회원 수 8만명을 넘어섰다. 이들은 본방송과 VOD를 오가며 보고 또 보고, 게시판에 에 대한 애정을 흠뻑 쏟아놓으며, 언제 어디서든 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알랜폐인’들이 에 매력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기존 드라마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만날 보는 트렌디 신데렐라 드라마가 아니다” “특이한 캐릭터, 욕, 명대사, 명장면, 다른 드라마에 안 나오는 거 다 나온다” “눈물을 강요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가슴을 울리는 드라마” “현실과 떨어진 듯하지만 우리를 현실 속으로 끌어들이는 드라마” “모든 캐릭터가 다 이쁘고 슬프고 아픈 드라마”…. 한 팬카페에 가 다른 드라마와 다른 이유에 대해 ‘알랜폐인’들이 써놓은 글들이다. (불법이지만) 동영상을 자신의 홈피에 퍼다놓을 정도로 열성적인 한 팬은 “캐릭터나 대사, 내용,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스타일 모든 것이 다른 드라마처럼 상투적이지 않아서 좋다”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이 찾는 ‘새로움’에 대한 목마름을 가 해소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두드리는 명대사

게다가 그 새로움이 단순히 자극적인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의 가슴속 깊은 곳을 건드린다는 것도 의 장점 중 하나다. 의 주인공 네명은 모두 현실에 굳건히 발딛고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한 곳에 마음을 정착시키지 못하고 떠도는, 그래서 ‘섬’처럼 고립돼 있는 존재들이다. 중아(이나영)는 아일랜드로 입양을 갔다가 온 가족이 눈앞에서 몰살당하는 것을 보고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 한국에 와서도 적응하지 못한다. 중아와 결혼한 경호원 국(현빈)도 어릴 적 차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자신만 살아남은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재복(김민준)은 가진 것 없는 백수건달이고 재복과 동거하는 시연(김민정)은 에로배우를 하며 무능력한 부모와 다섯 동생을 먹여살린다. 상처받고 소외된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때론 연민을 때론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뜨거운 울림을 안겨준다.

주인공들이 툭툭 내뱉는 말, 작은 몸짓 하나가 명대사, 명장면으로 꼽히는 것도 이런 울림에서 비롯된다. 짧고 건조한 대사 속에 숨은 아픔과 슬픔은 짙은 여운을 남기고 강한 척하다가도 한없이 약해지는 모습은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구려” “처음엔 불쌍해서 좋았고 지금은 좋아서 불쌍합니다” “내 눈물 받아줘” “난 아직 사람이 아냐”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명대사들은 우리가 남에게 혹은 자신에게 던지는 말로 의미부여가 된다.

아직 가 갈 길은 멀다. 구차한 운명과 가족과 사랑 속에서 몸부림칠 네 주인공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이다. 가 를 넘어설지, 어떤 의미를 남길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한다. 분명한 것은 주인공들의 현실이 절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희망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한 ‘알랜폐인’은 “따뜻한 마음의 위로를 주는 착한 드라마다. 드라마를 본 뒤 지나가는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고 도와주고 싶고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가 사람을 ‘사람’답게 보게 하고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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