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해고자 출신 이갑용 울산 동구청장이 말하는 해고자들의 아픔… 일부 언론의 왜곡 보도를 비판한다 </font>
▣ 이갑용/ 울산 동구청장 · 현대중공업 해고자
나는 해고자다. 현대중공업이라는 한 일터에서 네번 해고를 당했고, 세번은 복직을 했다. 1996년에 당한 네 번째 해고 이후 지금까지 복직되지 못한 채 해고자로 남아 있다. 1989년 현대중공업에서 파업 투쟁이 일어났을 때, 당시 위원장과 부위원장들이 모두 도망가고 임원 중에 남은 사람은 사무국장인 나 혼자였다.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야 하는데 집행유예 기간이었던 내가 그 총대를 멘다는 것은 곧 구속과 해고를 의미했다.
나는 왜 ‘골리앗’에 올랐던가
또다시 이어질 지루한 복직 싸움과 그로 인해 겪을 어려움과 갈등을 생각하면,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위원장과 임원들이 모두 도망간 것에 절망하고 분노하는 조합원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결국 ‘골리앗’에 올랐다. 그 골리앗 투쟁(1990년 현대중공업 파업 사태 때 노조원 100여명이 82m 높이의 크레인에 올라 13일간 농성을 벌인 사건)의 대가로 나는 해고자가 되었다.
‘해고자’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어제까지 나가던 내 일터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는 막막하고 낯선 현실과 조합원들에게 차츰 잊혀지거나 혹은 잊혀질까봐 느끼는 불안감, 조합원과 해고자를 분리하기 위한 회사의 끝없는 공작에 대응해야 하는 힘겨운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나처럼 노동조합에서 생계비를 지원한 경우는 그나마 생계 유지라도 되지만, 영세사업장이나 중소기업 그리고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서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생계비는커녕 하루아침에 길바닥으로 나앉아야 한다. 복직 투쟁을 위한 단식, 농성, 경비대와의 몸싸움 등으로 몸은 엉망이 되고, 가정은 파탄 나고, 결국 자살에 이른 해고자도 많다. 나 자신도 해고와 구속을 여러 번 겪으면서 이혼이라는 아픈 경험을 했다.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수백명의 해고자들이 이런 아픔을 겪고 있다. 이제껏 해고자들의 이런 현실을 알리고 해결하는 일에 이 나라 보수 언론이 나선 적은 한번도 없다. 그러던 그들이 지금 ‘귀족 해고자’를 만들어내 공격을 해댄다.
경제일간지 는 지난 8월30일 ‘노조 해고자 파행 지원, 강성 부른다’ ‘주요 대기업 노조, 해고자 특급 대우’라는 아주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주요 대기업 노조가 해고된 근로자에 대해 장기 우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강성 불법 투쟁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A씨는 해고 이후 다른 상급노동단체에서 주요 간부로 활동해 해고된 직장과 새로 활동한 단체에서 이중으로 수입을 거뒀다….” “노동계의 한 관계자는 ‘파업기간 중 굳이 필요하지 않은 강성 불법 행위로 해고, 구속돼 실형을 치른 뒤 이후 노조로부터 급여를 장기 수령하며 빈둥빈둥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들 해고자가 지급받는 연봉은 비과세 혜택을 받기 때문에 사실상 직전 연봉보다 20~40% 더 많이 지급받는 셈….” 하지만 이 기사는 왜곡과 날조로 점철된 기사다.
생계비는 모든 해고자에게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다 해고된 조합원에게 지급되는 돈이며, 그 자격 심사는 단위노조의 규약에 따라 엄격하게 한다. 지원을 받던 해고자라도 다른 생계수단을 가진다면 노동조합 활동을 포기한 것으로 보고 지원하지 않는다.
나도 해고자일 때,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당선돼 상급단체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노조에서 주는 생계비로만 생활했으며 민주노총에서 이중으로 돈을 받은 일이 없다. 그것은 민주노총 임원이나 파견된 간부 누구든 마찬가지다. 해고자에 대한 생계비 지원은 말 그대로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비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 지원이란 것도 내 경우처럼 노동조합 집행부가 어용으로 바뀌면 언제든지 중단될 수 있는 불안정한 것이며, 해고자 생계비는 이미 조합원들의 임금에서 모두 근로소득세가 원천 징수된 돈이다.
세금을 낼 수 있도록 일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해고자들에게 ‘비과세’ 운운하며 탈세 누명까지 씌우는 것은 그야말로 해고자를 두번 죽이는 일이다.
친한 자본가가 부도났다고 해서 자본가들이 돈을 걷어 그를 도와주진 않는다. 해고자에게 조합원들이 지원해주는 생계비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아름다운 연대의식의 표현이다. 자본은 오로지 ‘이윤’에 의해 움직이지만, 노동운동은 ‘이윤 때문에 짓밟힌 인간을 찾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생계비 논란’의 진실은…
재벌의 아들이 변칙상속으로 앉은 자리에서 수백억원을 벌어들이는 기이한 경제구조에는 침묵하면서,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낙하산 탔다 퇴직한 뒤 어느 기업의 고문이나 자문 등의 직책을 달고 하는 일 없이 월 수백만원의 자문료를 받아 가는 것에는 침묵하면서, 기업의 재산도 아닌 조합원들이 내주는 해고자 생계비에 대고 사실까지 왜곡하며 ‘도덕적 해이’를 주장하는 신문은 ‘경제 전문지’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가.
비단 경제신문만이 아니다. 저마다 다른 논조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신문들이 오로지 노동자 공격에는 한목소리를 낸다. 노조 때리기에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는 8월28일 ‘귀족 노조에 대한 노동계의 반성’이라는 사설에서 “근로자 10명 중 1명꼴에 불과한 일부 ‘귀족 노조원’의 이기심 때문에 국가경제와 국민생활, 그리고 대부분의 근로자가 피해를 보고 있다”며 귀족 노조의 반성을 촉구했다. 재벌과 기업가들, 의사나 변호사, 정치인과 관료 등 연간 소득이 수억원을 넘는 진짜 귀족들에 대해서는 귀족이라 비난하지 않으면서 주·야간 맞교대에다 휴일도 없이 연장, 특근, 잔업을 다 해야 겨우 연봉 5천만원을 받을 수 있는 평균 연령 40대 생산직 노동자들에게만 유독 ‘귀족’이란 딱지를 붙인다.
요즘 노동자들은 그야말로 동네북이다. 노조 때리기가 무슨 유행이라도 되는 양 진보적이라는 경제학자나 사회운동가들조차도 ‘대기업 노조의 임금인상 자제’가 진보의 필수 덕목인 것처럼 강요하고,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가 ‘세상이 망해도 내 몫만은 챙기겠다는 죽기 살기 투쟁을 일삼는 귀족들의 집단이기주의’로 매도당한다( 9월8일자 정운영 논설위원의 시평). 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예’이며 정규직 노동자들은 ‘귀족’이라는 희한한 등식을 ‘확실히’라는 단어를 써가며 동어반복하고 있는 정운영씨의 칼럼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진보의 기준은 노동문제- 경제문제가 아닌- 일 수밖에 없음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
1990년, 80m 상공의 골리앗 위에서 나는 외로웠다. 땅에서는 로마 병정처럼 중무장한 전투경찰들이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잡아가고, 바다에는 대간첩 작전 때나 쓰일 것 같은 해군 함정이 노동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연신 농성을 중단하라는 방송을 틀어대며 헬기가 날고 있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노동자들은 무기력함과 외로움에 고통받아야 했다.
여전히 노동자는 외롭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 노동자는 여전히 외롭다. 보수언론과 자본, 정권은 물론이고 일부 진보세력까지 입체적인 노동자 죽이기에 나서고 있다.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있고, 10명을 국회에 진출시킨 민주노동당이라는 정당이 있는데도 여전히 노동자들은 외롭다. 노동자 때리기에 정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우리의 ‘조직’을 가지고도 우리는 왜 여전히 외로울 수밖에 없는지, 노동계의 진정한 반성이 필요하다.
노동할 권리와 파업할 권리, 단체행동을 할 권리는 노동하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법으로 보장받는 권리다. 서구 선진국의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 헌법과 노동법에 의해 보장된 것이다. 노동자는 시민의 다른 이름이며 국민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노동자당이 집권을 하고 노동자가 대통령도 하는 이 새로운 시대에 아직도 우리는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명제를 두고 싸우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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