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살맞은 독설가 마이클 무어, 배급 난관 뚫고 ‘정치 다큐멘터리’로 천문학적인 성공을 거두다
▣ 김영진/ 영화평론가 hawks1965@hanmail.net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은 “이 모든 것은 꿈이었을까?”란 탄식으로 시작한다. 화면은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엘 고어의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던 시점을 비춘다. 환호하는 청중들에게 손을 흔드는 고어 부부와 그 옆에서 영화배우 벤 애플렉과 로버트 드 니로가 축하의 박수를 보내던 장면은 과연 일장춘몽이었다. 몇 시간 뒤 부시는 득표수에 지고도 대통령에 당선됐다. 부시 정권이 집행하는 패권적인 질서 속에서 전세계가 목격한 테러와 전쟁의 아수라장을 눈앞에 두고 마이클 무어는 장탄식을 내뱉는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을까?” 무어에게 모든 비극의 시작은 부시의 미국 대통령 집권이다. 에서 역사상 가장 멍청하고 탐욕스러운 대통령으로 묘사되는 부시야말로 무어가 보기엔 진정한 악의 축이다.
개봉 전부터 의 제작 목적이 부시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서라고 공공연히 밝혔던 마이클 무어에게 이 영화의 흥행 열풍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는 다시 한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되뇌고 있을지 모른다. 은 지난 6월25일 개봉해 첫 주말에 2180만달러(약 261억원)의 수익을 올려 흥행 1위에 올랐다. 미국 다큐멘터리 역사상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던 무어의 전작 (2002)이 250개 상영관에서 9개월 동안 총 2150만달러를 벌어들인 기록을 3일 만에 깨버린 뒤에도 은 지금까지 흥행 총액 1억943만달러를 기록하는 천문학적 성공을 거뒀다(한국에서도 전국 30여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화제를 끌고 있다).
“부시 행정부나 NC-17 등급 먹어라”
다큐멘터리 감독이기 전에 정열적인 저널리스트이고 무엇보다 대중을 웃길 줄 아는 엔터테이너인 무어의 재능으로도 앞으로 또다시 이런 흥행 기록은 불가능할 것이다. 무어의 기록적인 성공에 대해 성찰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미국 내 다른 기록 영화감독들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마이클 무어는 매우 특수한 인물이다. 그는 상업적인 체제를 뚫고 들어가는 개성적인 전략이 있다. 한계가 있지만 굉장히 효과적이다. 그가 굉장히 웃기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 나는 대중을 웃기지 못한다. 그러니 같은 전술을 쓸 수 없다”라고 멕시코 사파티스타 봉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1998)를 연출한 진지한 감독 릭 로울리는 말했다.
사실 개봉 직전까지도 의 운명은 오리무중이었다. 원래 이 영화의 배급을 맡기로 했던 디즈니는 정치적 파장을 우려해 일방적으로 배급을 할 수 없다고 무어에게 통보했다. 무어는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전망은 밝지 못했다. 디즈니로부터 의 판권을 재매입한 미라맥스 대표 하비와 밥 와인스타인 형제는 배급사 라이언스게이트엔터테인먼트, IFC필름과 계약을 맺고 6월25일 개봉을 강행했지만 미국영화협회(MPAA)는 이 영화에 R등급(17살 미만은 부모 동반)을 매겼다. 이 당시 무어는 자신의 홈페이지(www.michaelmoore.com)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나는 모든 10대들이 이 영화를 보기를 바란다. 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가 매일 저녁마다 TV로 봤던 것 이상의 폭력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미국영화협회가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행위에 대해 ‘너무나 혐오스럽고 질서 파괴적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봐서는 안 되는 것’으로 판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부시 행정부가 만들고 있는 현실의 전쟁 장면이야말로 NC-17 등급(17살 미만 관람 금지)을 받아야 한다. 부시 정부가 10대 후반의 젊은이들을 이라크에 보내 죽여도 된다고 믿는다면, 이후 1~2년 사이 징집 연령이 될 10대들은 부시가 그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려 하는 이유에 대해 ‘알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대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의 성공은 텔레비전 토크쇼의 사회자로 나서도 무리가 없을 만큼 대단한 입담의 소유자인 마이클 무어가 끊임없이 화면에 쏟아내는 우스개를 깐 독설 덕분이다. 무어는 전쟁을 일으킨 부시가 얼마나 멍청한 인물인지를 입증하는 데 영화의 상당수 장면을 할애한다. 그를 보좌하는 관료 집단의 뻔뻔스런 탐욕은 TV카메라가 돌아가기 직전에 침을 발라 머리를 빗는 동작 따위를 상세하게 보여주는 것을 통해 의도적으로 관객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게끔 편집되고 있다.
부시 낙선 위한 세계시민용 서비스 홍보물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민간인을 피해 이라크를 포격하고 있다는 체니 부통령의 연설 장면 뒤에 마을 전체가 미군 폭격으로 재가 된 상황에서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이라크인들의 모습을 이어붙이는 식이다. 의 대다수 장면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영상의 힘을 선동적으로 활용한 편집으로 분노와 눈물, 때로는 웃음을 끌어낸다.
문제는 이 애초에 기대했던 만큼 새롭게 뭔가를 말하는 영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무어는 언론에서 이미 제기했던 문제들을 놓고 자신의 촬영팀들이 찍은 것과 텔레비전 뉴스 화면 등에서 사온 이미지를 편집해 종합하고 있을 뿐이다. 부시 일가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카에다 가문이 어떤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영화 초반의 추론은 끝까지 낱낱이 파헤쳐지지 않는다. 미국 군수기업쪽에 투자된 사우디 왕실의 돈이 천문학적 규모이며, 테러가 나고 그 연장선상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사우디 왕실은 물론이고 그들과 사업적 공모 관계를 맺은 부시 일가와 관료 집단이 군수업체의 호황을 통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 따위의 사실이 나열될 뿐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은 이 새로 밝혀낸 것이 거의 없고 토론보다는 선동만 부추긴다는 점을 들어 좌파를 위한 에 비유할 수 있는 문화적 독약이라고 폄하했다.
하긴 부시의 재선을 막기 위해 발 벗고 나선 무어에게 그런 결함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어는 이라크 전쟁이라는 자명한 악의 전쟁에 우리가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를 줄기차게 들이댄다. 이 영화는 신문의 탐사 보도를 열심히 읽지 않는 대다수 미국 국민이나 전세계 시민을 상대로 한 일종의 대민 서비스 차원의 홍보 영상물이다. 무어는 부시는 참 나쁜 놈이에요. 머리도 나빠요. 근데 그 머리 나쁜 놈이 추악한 놈들과 짜고 돈을 통장에 입금시키기 위해 막무가내로 전쟁을 밀어붙이고 있어요, 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 무어는 쇼비즈니스의 법칙이 우선시되는 미국 사회의 생리를 정확히 꿰뚫고 대중에게 통할 수 있는 자극적인 화술로 화면을 꾸민다. 이런 재능으로 그는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었다. 무어의 반대자들로부터 쏟아지는 그에 관한 추문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영화로 번 돈으로 대저택에 살고 리무진을 타며 비행기는 꼭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하는 그가 가난한 무산계급을 옹호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식의 순진한 비판에서부터, 실제로는 특급 호텔에 묵으면서 기자들을 만날 때는 일부러 허름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연다는 식의 구체적인 정황 증거까지 그에게 쏟아지는 비판은 다양하다.
그러나 지금 활동하는 다큐멘터리 감독들 가운데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광범위하게 전파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이는 거의 유일하게 마이클 무어뿐이다. 그는 영상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영리하게 계산하는 선동가다. 무어는 을 만들기 직전 이 성공하고 난 뒤 반전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전세계 60여개국의 동시다발적 반전시위를 기록하고 있는 이 작품은 각국의 비디오 액티비스트들이 보내온 시위 장면들을 편집해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광기인가를 고발했다. 1980년대부터 지속돼온 미국과 전세계 진보 진영, 비디오 액티비스트들의 새로운 인터내셔널리즘을 과시한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한 이라크 소년이 자전거를 타면서 카메라를 향해 보내는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곧 이어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발언을 인용하는 자막이 뜬다. “전쟁은 끝난다. 만약 우리가 원한다면.”
무어는 비판의 ‘볼륨’을 높였을 뿐?
바로 그 얘기다. 복잡하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무어는 말이 되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는데도 미국민의 절반이 여전히 그 전쟁을 지지하는 초현실적인 상황에 대해 나머지 절반의 인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종식시키자. 그걸 위해 부시를 뽑지 말자. 의 선동적인 설득력은 보편적인 위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통계적으로 부시의 비판자들이 이 영화를 적극적으로 관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건 선동적인 영상물이 지닌 한계지만 애초에 이것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 말고는 없었다. 마이클 무어는 그저 재미있게, 더 공세적으로 반전의 목소리와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을 비난하는 목소리의 앰프 볼륨을 크게 틀어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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