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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포크가수가 연기에 빠진 날

등록 2004-06-24 00:00 수정 2020-05-03 04:23

뮤지컬 에서 마음껏 ‘끼’ 발산하는 이정열을 만나다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노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20대 청년이 있었다. 그는 가수가 되기보다는 노래 일꾼이고 싶었다. 노래모임 ‘노래마을’에서 을 부르면서도 그를 찾는 무대가 있다면 ‘솔로’ 활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포크가수’가 아니었다. 그는 풋풋한 감성을 힘있는 목소리에 얹어 집회의 열기를 북돋워내는 구실을 했다. 그의 20대는 ‘현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30대 중반에 접어드는 지금도 현장을 외면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전과 다른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요즘 뮤지컬 연습실에서 스스로를 재발견하는 재미에 푹 빠진 가수 겸 뮤지컬 배우 이정열을 만났다.

에서 선보인 ‘마지막 절창’

가수 이정열의 무대는 갈수록 넓어졌다. 그는 1집 (1997)를 발표한 뒤 등의 음반을 꾸준히 선보였다. 그의 노래는 삶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포크록에 담아 우리가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들을 새롭게 느끼도록 했다. 가수로서 10년 이상을 무대에 올랐으면서도 그에게서 처음과 다른 면모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노래를 부를 때나 방송 진행자로 다가오는 그의 이미지는 한결같다. 순수한 열정, 그것이 유전자 속에 새겨진 듯하다. 열정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절감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20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힘든 나날이 적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잘 통과했어요. 사랑과 배신, 사기 등도 남의 일이 아니었던 시절에 스스로를 놓는 것을 배웠지요.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뜬’ 가수들이 지금 어디에 있지요.” 대중에게 다가서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만큼 그는 대중 곁에 오래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사회적 발언에도 힘이 실린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런 꿈이 있기에 작은 무대라도 어디든 달려갔고, 탄핵 정국에서 타오른 촛불집회의 사회자로 나설 수 있었다. 자신의 것을 여럿을 위해 써야 한다는 것은 그의 오래된 신념이다.

이제 ‘가수 이정열’이라는 말은 절반쯤만 맞다. 그가 가수가 아닌 배우로 처음 무대에 오른 게 꼭 10년 전의 일이다. 1994년 여름 그는 고 문호근씨가 연출을 맡은 동학 100주년 기념 가극 에서 남자 주인공 하늬 역을 맡았다. 그는 작품의 백미로 꼽히는 마지막 절창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배우로서 무르익지 않은 연기였지만 대중적인 가극 배우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 것이다. “제가 얼떨결에 캐스팅되는 바람에 지금은 돌아가신 문호근 선생이 고생을 많이 하셨죠. 연기자로서의 이정열을 위해 헌신적으로 지도하셨으니까요. 가극은 음악적으로도 관심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는 등 저에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연기 경험, 나의 노래 찾게 해줘”

가극 에서 배우로서의 이정열을 발견한 그는 이듬해 10월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한 김민기씨 연출의 록뮤지컬 로 자신의 일부가 된 연기에 빠져들었다. 는 국악과 록뮤직 등 노래와 춤이 결합한 총체극으로 노래만으로 극을 이끌어갔기에 다양한 무대 언어를 ‘학습’할 수 있었다. 이때는 멋모르고 무대에 오른 풋내기 배우가 아니었다.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숨겨진 ‘연기자의 끼’를 오롯이 드러낼 수 있었기에 만족할 만했다. 여럿이 함께 작업을 하면서 ‘동업자 의식’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연기 경험은 노래에도 영향을 끼쳤다. 연기를 하면서 갈고 닦은 해석력이 곡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고 그만의 소리를 찾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두편의 공연 작품을 통해 ‘노래 연기’에 눈을 뜬 이정열은, 1997년에 첫 음반을 내놓으면서 자신의 음악세계를 대중에게 선보였다. ‘방송’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차츰 아는 사람은 아는 가수, 음악적으로 인정받는 가수로 입지를 다졌다. 음반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그의 노래에 푹 빠진 사람도 늘어갔고 ‘인기’라는 것도 알게 됐다. “대중적인 활동이 개인적으로는 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중문화인으로서 끊임없는 자기 변신을 준비해야 합니다. 언제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변신 모드’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다행히 저는 배우로 무대에 오른 경험을 살릴 수 있었죠.”

가수로서 자기 변신을 꾀하고 연기에 대한 갈증을 풀고 싶었던 이정열이 찾은 것은 뮤지컬이었다. 가극단 금강이 창단 10돌 기념으로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대극장에 올린 창작 뮤지컬 이 그를 8년 만에 무대로 불렀다. 고구려의 기상을 지키는 두 고구려인이 시공간을 넘나들어 환생하는 대서사극인 이 작품에서 그는 광개토왕(호태왕)으로 분해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여줬다. 그의 연기력은 묵은 장맛처럼 되살아났다. 그제야 뮤지컬 배우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잇따라 무대에 오르려 감명 깊게 본 영화를 뮤지컬로 만든 작품의 오디션에 응모했다가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지금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당시엔 마음이 불편했던 게 사실이다.

요즘 그는 불교방송 FM ‘백팔가요’진행한 다음에 뮤지컬 배우로 변신한다. (7월3~11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공연을 앞두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서울뮤지컬 컴퍼니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 를 원작으로 삼아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뮤지컬화한 이번 작품에서 그는 충주고의 밴드 출신으로 밤무대에서 일하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보컬인 성우 역을 맡았다. “70, 8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를 주로 부르는데 다양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어요. 상대 배우로 출연하는 인희 역의 김선영씨와 함께 부르는 사랑의 테마는 현대적 뮤지컬에서 클래식한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잃어버린 꿈을 누구나 떠올릴 수도 있고요.”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그는 가수로서 잠시 배우를 하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어엿한 배우로 대접받고 싶은 것이다. 어디서든 대사를 흥얼거리고 몸을 흔들어 때론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본업이 가수로 알려진 까닭에 매스컴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도 부담스럽다. 뮤지컬 배우의 꿈을 키우며 오디션을 통해 배우수업을 탄탄하게 받은 출연자들 속에서 자신은 ‘신출내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뷰도 저녁식사 시간을 쪼개서 하고 있다. 10여년을 가수로 지낸 그이지만 따로 노래연습을 하는 것도 게을리할 수 없다. 레드 제플린의 에서부터 윤수일의 , 조용필의 , 전인권의 등을 무리없이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습벌레… 평양공연을 꿈꾼다

“뮤지컬은 가수와 배우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는 저에게 제격이죠. 새 음반을 내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가수로서 제대로 활동할 만한 에너지가 나왔을 때 음반도 낼 것입니다. 지금은 의 성우로 살아야지요.” 그가 성우 역에서 빠져나오면 또 다른 무대에 오를 수도 있다. 극단 사단법인 통일맞이(이사장 이재정)가 문호근씨의 3주기와 부친 문익환 목사의 10주기를 맞아 평양에서 가극〈금강>(연출 김석만·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을 공연하기로 한 때문이다. 초연 배우로서 와 등이 오르는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이지만 아직 캐스팅은 확정되지 않았다. 평양 공연 합류가 결정되면 초연 때의 아쉬움을 무르익은 연기로 털어낼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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