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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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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물류를 쓸어담는 TSR

등록 2004-06-03 00:00 수정 2020-05-03 04:23

[기획연재 | 지금은 남북경협시대 5회]

한반도종단철도와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연결된다면… 극동지역 개발 · 한-유럽 교역 크게 늘 듯

블라디보스토크= 글 · 사진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동방을 점령하라.”

러시아 극동의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의 뜻을 풀면 이렇다.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은 옛 발해의 도읍지이면서 지금도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우수리스크 등 조상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이곳이 요즈음 동북아 물류 중심지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이제는 동방의 물류를 모두 쓸어담으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엄청난 시장으로 떠오르는 모스크바

지난 이라크 전쟁 때 미국이 수에즈 운하를 통제하는 바람에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통한 화물수송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러시아가 반사이익을 톡톡히 본 셈이다. 바로 TSR의 극동지역 발착역이자 종착역이 블라디보스토크다. 러시아 동쪽 끄트머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럽의 관문인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9938km를 달리는 TSR가 나르는 물동량은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 특히 지난 2000년부터 3년간 외국 화물의 운송량이 꾸준한 증가세를 보여왔다. 블라디보스토크역의 한 관계자는 “현재 TSR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20만개를 포함해 모두 1억t 이상의 화물을 실어나를 수 있다”면서 “TSR는 지난 몇년간 운송시간이나 안정성 등 질적인 측면에서 크게 나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또 “독일, 이탈리아, 핀란드, 일본 등이 남북한종단철도(TKR)의 건설 및 철도의 이용에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며 “TKR가 이용되면 당장 15만개의 컨테이너가 운송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연해주 극동 철도당국은 지난해 100여명의 기술진을 국경지역인 핫산과 북한의 나진에 파견해 한-러 철도 연결 현황과 기술적인 문제점 등을 조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TKR와 TSR가 이어지면 한국과 러시아 및 유럽지역과의 교역이 크게 확대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 한국이 배로 모스크바로 화물을 보내면 약 40일이 걸린다. 하지만 연해주나 인근의 나홋카 항구를 이용해 화물을 TSR로 보낼 경우 20일로 줄어든다. TKR-TSR를 이용하면 화물 운송 시간은 다시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다. 현재 관광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8일이 걸려야 모스크바에 닿는다. 이런 이동 시간은 물론 앞으로 철도 설비 현대화 정도에 따라 더 줄어들 수 있다. 운송업자인 세르게이 예브게니예비치씨는 “최근 연해주에서 모스크바까지 TSR를 통한 냉동 컨테이너 서비스를 개시했고, TSR 중간기지인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추진 중인 물류기지 건설 등은 TSR 이용의 증가를 예고한다”면서 “앞으로 TSR 기능이 얼마나 나아지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TSR가 시급히 개선해야 할 과제로는 낙후된 전산 시스템이나, 선진화물 운송기법의 도입 지연에 따라 적기 화물 운송과 안전보장이 확보되지 않는 점이 있다. 또 화차의 노후화, 부족한 야적장 및 컨테이너 등이 꼽힌다. 현재도 한국 기업들은 TSR를 통해 유럽에 화물을 꾸준히 실어나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전체 화물량의 5%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문제점들이 개선되면 TSR를 이용한 화물량이 증가하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고지찬 블라디보스토크 무역관장은 “향후 어떻게 TSR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서부 러시아 및 유럽 수출의 규모가 크게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세르게이 다르킨 연해주 주지사는 5월24일 모스크바에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을 만나 “외국인 투자유치 촉진을 위한 입법조치를 구상하고 있다”며 “앞으로 TSR와 TKR가 연결되면 연해주를 지나가게 되고, 이르쿠츠크 가스전도 연해주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아 한-연해주간 경제협력 잠재력이 크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시장은 지금 엄청난 소비시장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전세계 기업들의 구미를 당기고 있다. 이들은 앞다투어 모스크바 소비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물량공세를 퍼붓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전문가들에 따르면 러시아의 물류기반은 발전속도가 소비의 빠른 성장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 연방정부는 러시아 물류의 대동맥인 TSR의 운송능력 개선에 적잖은 돈을 쏟아부을 태세다. 이들은 특히 TSR 노선의 매력을 높이기 위해 화물 발송지에서 도착지까지 화물의 안전한 운송을 책임지고 떠맡는 단일 통과화물 관리회사의 설립까지 추진하고 있다. TSR의 화물 운송 거리가 워낙 긴 탓에 중간에 화물이 분실되는 일이 잦은 데 따른 외국 기업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대응책인 셈이다.

사회문화적 교류도 촉진

러시아 연방정부는 TKR-TSR 연결이 상대적으로 낙후된 극동지역 개발의 기폭제가 되리라 기대한다. 과거 러시아가 1903년 처음 TSR를 건설할 당시는 극동지역에 대한 정치·군사적 영향력 확대가 우선 목표였다면 지금은 경제 회생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관련국 가운데 러시아가 TKR-TSR 연결에 가장 공을 들이고 있다. 블라디미르 쿠릴로프 극동국립대 총장은 “TKR-TSR 연결은 남북, 한-러, 북-러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며 “동북아 경제협력의 진전은 물론 사회문화적 교류도 촉진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동북아 냉전질서의 해체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한과 러시아 세 나라는 지난 4월 말 모스크바에서 처음 만나 철도 연결을 위한 실무회의를 열었다. 이 회담에서 3국간 철도 연결에 필요한 재원 마련, 한반도 내 연결 노선 결정, 철도 실태에 대한 공동 연구, 컨테이너 시범 운행 등을 폭넓게 논의한 바 있다. 후속 회담은 6월 중에 다시 열릴 것으로 알려진다. 핵 문제를 비롯해 재원 마련 등을 해결하는 게 쉽지 않아 낙관하기에는 이른 감도 있다.

당장은 동해선 연결도 과제다. 개성공단을 거쳐 중국 대륙까지 이어질 경의선 연결은 연내 마무리돼 시범 운행이 가능하지만, 동해선은 비무장지대 남쪽 지역 대부분에 철로를 아예 새로 깔아야 하는 상황이라 본격 개통은 올 안에 어렵다. 하지만 우선 도로는 곧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반도 문제에 정통한 블라디미르 베르홀야크 국립극동대 한국학 연구소장이 던진 한마디가 귀에 솔깃하다. “당장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들이 많지만 TKR-TSR가 연결되면 세상은 확 달라질 것이다. 남북한은 대륙으로 뻗어나가 살 길을 찾아야 한다. 길을 뚫어 철로와 도로를 잇고, 동서로, 남북으로 소통돼야 모두가 공동 번영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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