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 미혼 여성의 성장드라마 … 끈끈한 우정 · 발랄한 이혼녀 묘사로 고정관념 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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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돌이켜보면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세월이었다.
나이 들어 용돈 타쓰는 게 자존심 상해 취직했고, 적어도 남들만큼은 해야 자존심이 덜 상할 것 같아 죽어라 일했다. 이쁘고 돈 많은 여자 좋다고 뒤돌아가는 남자 붙드는 게 자존심 상해서 잡지 않았고, 여성이라고 무시당하기 싫어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어느덧 나이 앞에는 ‘3’이라는 숫자가 얹혀 있고, 거울을 보면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직장에서는 팔팔한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고, 동료들은 “결혼 언제하냐”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집에서는 ‘치워야 할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견디다 못해 혹은 외로워서 눈을 돌려도 주위에 쓸 만한 남자는 다른 여자들이 이미 채갔다. 그나마 ‘매물’이 있어도 “어리고 이쁘고 돈 많은” 여자에 침흘리는 속물들뿐이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나를 ‘던지기엔’ 그동안 노력하고 쌓아온 시간이 아깝다.
겉으로는 당당하고 독립적이고 ‘드세’ 보이지만, 속으로는 아직 구 가치관과 신 가치관 사이에서 고민하는 나이. 아직 꿈을 꿔야 하는 건지,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 건지 헷갈리는 나이. 생각 많고 사연 많은 30대 초반 ‘언니’들에게 TV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비루함 · 돌쇠정신… 그래도 열정은 넘친다
지난 4월 시작해, 20~30대 여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문화방송 드라마 는 ‘아무도 봐주지 않는’ 나이가 된 30대 초반 여성들의 성장 드라마다.
시집 못 가서 환장한 노처녀, 아니면 연애에 관심 없는 ‘성공한’ 여성으로 이분되던 전형적인 캐릭터와는 달리, 의 세 주인공은 일과 사랑에 모두 성공하고 싶은 ‘평범한’ 여성들이다.
드라마는 첫 회부터 이른바 성공한 여성의 ‘신화’를 무참히 박살낸다. 32살 동갑내기인 세명의 주인공은 각각 방송사 기자(이신영·명세빈 역), 스튜어디스(진순애·이태란 역), 재벌가 며느리(장승리·변정수 역)다. 적어도 겉으로는 ‘때깔’난다. 하지만 신영은 보도국에서 ‘가장 안 나가는’ 기자에다 “나이 많고 똑똑하다”는 이유로 남자친구에게 차인다. 병든 아버지와 철없는 고모·사촌동생까지 부양하는 소녀가장 순애는 바람 피우는 남자친구를 패다가 곧바로 해고당한다. 시집 잘 가서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던 승리는 바람둥이 남편에 대항해 맞바람을 피우다가, 실수(?)로 “아시아권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아이를 낳고 시댁과 친정에서 내쳐진다. ‘화려함 뒤의 비루함’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고단한 처지를 슬퍼하거나 비관하지 않는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체념하지도 않는다. 의 주인공들은 주체적으로 욕망하는 ‘나쁜 여자’들이다. 비록 “인생이 내 맘대로 가주지는 않지만” 사랑과 일에서 모두 성공하는 것은 삶의 목표다 . 그동안 미디어는 여성들에게 신사임당과 같은 여자가 되라고 요구해왔다.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능력 있는 여성을 숭배한다. 예쁘고 조신하고 현명하며 돈도 잘 버는 여성은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이런 온갖 사회적·문화적 기대들은 미디어를 통해 급속히 재생산돼왔고, 이런 ‘좋은 여자’들은 절대 욕망하지 않는다. 은 그동안 미디어가 사랑했던 ‘좋은 여자’들을 비웃는, ‘나쁜 여자’들의 이야기다.
만날 헛다리 짚고 대형 방송사고까지 내는 어리버리한 신영이지만, 일에 대한 열정만큼은 남부럽지 않다. 취재하다 산에서 굴러떨어지고, 투견장에서 개에게 물려도 신영의 ‘돌쇠정신’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욕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동안 여성들의 성공 스토리가 주입시켰던 ‘일과 사랑 중 택일’이라는 저주받은 공식을 가볍게 넘어선다. 물론 ‘한국적인 정서에 맞게’, 이들의 지상과제는 결혼이다. 가끔 결혼이 전부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다가도, 죽은 지 보름 만에 발견된 독신여성과 집에 든 강도에 놀라 마음을 고쳐먹는다. 왕자님은커녕 대한민국 대표 속물이 되어 돌아온 첫사랑과 ‘사고’ 한번 치기 위해 물을 뒤집어쓰고 눈을 깜빡대는 모습에서는 서글픔마저 느껴진다. 과 비교되는 미국 드라마 의 주인공 네명이 결혼보다는 새로운 관계를 실험하고, 성을 ‘탐구’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홍수같은 내 인생, 니들이 건졌어”
우리의 ‘빅토리 장’, 장승리는 다년간에 걸친 수많은 연애와 결혼까지 두루 경험한, 연애에서는 ‘초월적인 존재’다. 결혼과 사랑에 목매는 친구들에게 “결혼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면 행복해진다”고 타이르지만, 친구들의 ‘작업’에는 두 손 들어 지지하고 온갖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결혼을 한번 ‘물렀지만’, 사랑에 대한 욕망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 발랄한 이혼녀는 과외받는 ‘영계’에게 작업을 걸고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유혹의 눈길을 던지며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까발린다. 항상 우울한 피해자로 그려지던 이혼녀는 적어도 이 드라마에는 없다.
“나이 32살, 무직, 통장 잔고 11만원, 병든 아버지 부양”. 돈 없고 남자 없고 직장도 없는 순애는 가족도 책임져야 하고 재밌게 살고 싶기도 한, 평범한 노처녀들의 자화상이다. 서른 넘은 나이 때문에 사촌동생의 이름으로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집적거리는 남자라고는 액면가 쉰살은 되어 보이는 홀아비뿐이다. 하지만 ‘30년 또순이 인생’ 순애는 꾸준히 사업 구상을 하며 멋진 남자와의 ‘봄날’을 꿈꾼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미덕은 ‘언니들의 관계’를 담백하게 그려낸 점이다. 그동안 여성들의 우정이란, 남자 하나 때문에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하찮은 것’이거나 그저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을 뿐, 그 아래의 개성들은 이해받지 못했다.
하지만 의 서른두살 여성들은 내 감정에 솔직한 만큼, 상대방의 감정도 인정한다. 순애는 신영이 눈독 들이는 초등학교 동창에게 마음을 두고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폭력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또 친구들은 승리의 시누이들과 한바탕 싸우고 나서, 승리가 혼자 눈물을 훔칠 수 있도록 조용히 자리를 피해준다. “내 인생은 장마”라고 한탄하는 순애에게, 승리는 “내 인생은 홍수였는데, 니들이 노아의 방주야” 하며 다독인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진정한 자매애가 드러난다.
획일적인 여성상 버린 정치적 올바름
권김현영 국민대 강사는 “여성들이 직장에서 어떤 고민을 안고 어떻게 일하는지 등 그동안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던 여성의 노동에 대한 부분이 드러났고, 획일화됐던 캐릭터를 벗어나 발랄한 이혼녀, 여성들의 연대 등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요소를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며 “비교적 정치적으로 올바른 드라마”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드라마 곳곳에는 30대 초반 여성들의 일상적인 모습도 쏠쏠히 드러나 있다. 이리저리 치이는 피곤한 인생이지만, 자기계발은 빼놓지 않는다. 요가와 태보 등 운동에도 열심이고, 안 되는 연애에 “중국어 공부나 하겠다”며 대안을 찾는다. 이에 경제력 있는 싱글, 30대 여성들의 주머니를 탐내는 ‘바깥 세상’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임경선 두산잡지 마케팅팀장은 “30대 초반 여성들은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가졌고, 워낙 힘든 세상을 살다보니 ‘내가 나를 안 챙기면 누가 챙기리’ 하며 스스로에게 투자한다. 또 애인이 없으면 ‘뭐라도’ 해야 하는데, 뭐라도 하려면 돈이 들어간다. 30대 미혼여성군이 이제 명확한 마케팅 타깃그룹이 되었다. 결혼율이 떨어지면서 과거 ‘미씨족’에 대한 포커스가 ‘30대 싱글즈’군으로 옮겨간 듯한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20대의 전율과 40대의 안정 사이에서 요동치고, 결혼 못한 ‘하자 있는 인간’으로 취급받는 데 분노하지만, 남몰래 밤마다 “허벅지에 십자수를 놓는” 안쓰러운 30대 초반의 여성들. 일과 사랑 중 하나라도 포기하기에는 피가 아직 너무 뜨겁고, “서른 넘어 내가 이렇게 살 줄 몰랐어” 하며 혼자 눈물짓지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하며 한손으로 눈물을 쓱 훔쳐내는 씩씩한 ‘언니’들의 전성시대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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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중한 건 떠나고 기다리는 건 오지 않고 바라지 않던 일은 내게 찾아옵니다. 겨울이 가면 이렇게 봄이 오는데 사랑이 떠난 자리에는 어찌하여 또 다른 사랑이 오기도 하고 영영 슬픔으로만 가득하기도 한 것일까요. 누군가 내게 인생의 해법을 건네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쓸쓸한 봄날의 이신영입니다.
- 실연은 배부른 슬픔이었네요. 내 인생은 여기서 끝인 것 같습니다. 인생이 끝나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일 아침 일어나 두 다리로 걸어갈 곳이 없고. 걷고 보고 들을 수 있으니 끝은 아닌가요? 보이는 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행복한 웃음. 내가 지금 22살이라면 다리가 이렇게 후들거리지는 않을 텐데. 42살이 아니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요.
- 순애: 멀쩡한 남자들은 다 어디 갔냐고./ 신영: 애초에 그런 남자들은 태어나지도 않았어.
- 승리: 살다보면 개인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고…./ 순애: 내 인생은 장마야./ 승리: 내 인생은 홍수였는데. 나한테는 니들이 노아의 방주야.
- 승리: 남자들은 여자에게 별로 기대 안 해. 한두 가지 말곤./ 순애: 그 한두 가지가 뭔데?/ 승리: 같이 자주는 거랑 밥해주는 거. 돈을 좀 대주거나./ 순애: 안 그런 남자도 있음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아./ 승리: 그러니까 니들이 남자 없는 거야. 그런 남자가 어디 있나 백날을 찾으니 생길 게 뭐야. 지구상에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