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영화- 만철아 돌아와라!

등록 2004-04-30 00:00 수정 2020-05-03 04:23

‘영화배우 장선우’에게 옛 친구 김학민이 보내는 편지… “그 장만철의 리얼리즘으로 돌아오란 말이다”

김학민/ 학민사 대표

장선우 감독! 비록 최근에는 활동이 좀 뜸하지만 과거 풍자 단막극 작가로서, 시대의 아픔과 서민의 건강한 삶을 그린 영화감독으로서, 그리고 한국영화가 지향해야 할 숱한 담론을 생산해낸 영화 이론가로서 영화판에서는 드물게 탄탄한 영화력을 지닌 장 감독에게 영화를 주제로 편지를 보내려니 좀 멋쩍군.

“만철이는 만주철도냐”며 놀렸지

난 당신을 그냥 장만철이라고 부르겠네. 80년대 중반이던가? 김지하 형 그리고 당신 등 몇몇 문화패들과 ‘탑골’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중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지하 형이 불쑥 던진 말이 생각나는지. “만철아, 내 이름도 ‘지하’이니 지하실, 땅속 같아 더럽지만, 너도 좀 그렇다. ‘만철’, 만주철도가 뭐냐?” 물론 ‘장선우’라는 예명은 지하 형이 ‘만철’이라는 이름에 대해 우스개를 던진 그 훨씬 전부터 써왔지. 내가 알기로는 당신이 감옥에서 나와 등에 마당극 평론이나 한국영화에 관한 글을 발표할 때부터 장선우라는 이름을 썼던 것 같고, 80년대 중반 풍자의 비수로 광기의 시대를 조롱한 문화방송 베스트셀러 극장의 작가로서 장선우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지.

왜 갑자기 이름 타령을 하는 것일까? 몇해 전 DJ정권하에서 옷로비 사건이 터져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렸을 때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증인으로 출석했던 것 기억나는가. 지금은 누구인지 이름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때 한나라당 의원이 신문한답시고 불쑥 앙드레 김에게 물었지. “본명이 김봉남씨 맞습니까?” 나는 그때의 앙드레 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 ‘김봉남’이 그의 본명임을 시인도 부인도 못하고 잠시 우물쭈물 당황해하던 앙드레 김의 그 모습 말이야. 서구적 화려함과 세련된 패션 그리고 부르주아지의 우아한 삶의 한켠을 상징해서 붙인 예명이 앙드레 김이었겠지. 그런데 그 우아한 ‘앙드레 김’의 뒤안에 ‘엽전’들의 투박함, 촌스러움 그리고 전라도 어느 농촌의 그러저러한 농투성이, 아니면 날마다 저녁 도시락통을 달그락거리며 처진 어깨로 시내버스에 오르는 구로공단 노동자의 이름격인 김봉남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앙드레 김의 낭패감과 열패감이 어떠했을지는 이해하고도 남지.

공연히 앙드레 김과 김봉남의 ‘관계’를 우스개 삼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이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은 나와 당신과의 짧지 않은 관계 속에서 보아오고 겪어온 ‘장만철의 삶’과 ‘장선우의 활동’에 대한 것이야. 내가 기억하는 장만철의 삶은 치열하면서도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에서의 유쾌함이야. 70년대 초 3선개헌, 교련, 유신헌법 반대투쟁으로 대학이 소용돌이칠 때, 채희완·임진택·김민기 등이 벌인 마당극·탈춤 운동에 당신도 주도적으로 참여했지.

대학에서 민중문화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이 반독재 운동과 흐름을 같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미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이 땅의 민중의 삶과 공동체 문화를 말살·획일화해갈 때, 반봉건 반압제의 함의를 슬기롭게 문화적 코드로 발산했던 탈춤·마당극 등 우리 민중문화를 계승해보려던 운동과의 갈등과 충돌은 필연적인 일이었지. 이것이 70년대 중반부터 운동가 중심의 학생운동에 이른바 ‘딴따라’들이 적극 참여하게 된 계기라고 생각하는데, 이때부터 대학가의 반독재 운동이 학생 대중들에게도 급속히 퍼져나갔어. 곧 존재론적 자기결단을 할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딴따라들의 기발한 문화적 기제들이 효과를 발휘한 셈이지.

이러한 구체적 상황이 1975년 5월22일 김상진 열사의 장례식 사건이야. ‘오둘둘’로 불리는 이 사건에 서울대 ‘딴따라들이 총동원된 것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학생운동가들이 싹쓸이 투옥됐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70년대 이후 민중문화 운동으로 성숙해온 대학가 문화일꾼들의 정의와 자유에 대한 열정과 저항정신의 발로로 보는 것이 정확한 분석이겠지.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은 1976년쯤일 거야.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의 공동 ‘체험’과 사물을 문화 코드로 바라보는 ‘눈’이 서로 통해 우리는 쉽게 친하게 되었지. 당신과 나, 정문화, 문국주, 박계동 등이 공동대표가 되어 제적 학생들을 모아 민주청년학생운동협의회를 조직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직사도록 얻어맞은 것도 그 즈음이었어. 우리 만남의 하이라이트는 80년 광주항쟁 때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였어. 우리 둘은 모두 나잇살이나 먹은 죄로 서울대·연세대 시위의 배후 조종자로 끌려와 무진장 얻어맞았지. 그러나 그 무지막지하던 ‘고문의 추억’도 이제는 머리 한쪽에 어렴풋이 흔적으로만 남아 있고, 그것보다는 수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수사관들이 약간 풀어줬을 때 5반에 수감된 당신, 나 그리고 유시민 등과 날마다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합수부의 추억을 잊지는 않고 계신가?

학생운동, 연극, 영화, 문학, 음식 이야기 등 끝이 없었지. 그 중에서도 제3세계 영화운동이 어떻게 민중을 각성시켜 자기 정체성을 갖게 했는지 들려준 당신의 이야기는 참으로 재미있었고, 같이 갇혀 있던 후배들도 문화운동 또는 민중운동에서 문화적 코드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지. 그때 내가 한 말 기억나는지 모르겠군. “만철아, 너 다음에 영화 만들게 되면 이 합동수사본부에서 있었던 수사과정도 다뤄봐라.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들처럼….” 문외한인 내가 툭 던진 말 같지만, 나는 당신에게 한국 현대사의 모순과 질곡 속에서 야기된 모든 민중사적 사건들을 카메라로 담아내는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를 요구한 것이었지.

이러한 이야기들은 80년대 중반 각 부문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투쟁이 불타오를 때, 황석영, 김종철, 채광석, 채희완, 임진택, 나 그리고 당신 등이 참여해 만든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서 그 활동 방향으로 더욱 심화됐지. 그때는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 정권에 대한 ‘투쟁적’ 리얼리즘이 최고의 선이었어. 그 즈음 당신은 마당극에서 영화로 옮겨갈 준비를 했지. 남미의 ‘우카마우 집단’ 등 제3세계 영화운동, 장 뤼크 고다르의 누벨바그 운동,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에 천착하며 ‘새로운 한국영화’를 모색하고 있었어.

이러한 선상에서 당신이 현실풍자의 블랙 코미디로 흐른 것은 너무도 당연했고, 우리는 모두 이를 이해하며 환호했지. 문화방송 베스트셀러 극장의 극본들, 영화 등이 그 탄탄한 성과였어. 그러나 영화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제작 여건,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영화 검열이 극에 달했던 그 시절 저항적 리얼리즘을 숨겨두고 풍자로 우회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신이 너무 거기에 매몰되어 있는 것도 같았어.

80년대 중반 당신과 나 그리고 극작가 안종관 선배와 소주 한잔 하는 자리에서, 2차대전 때 이탈리아의 침략에 저항하는 베두윈족의 참상을 그린 을 당신이 비판했다가 나와 안 선배에게 호되게 야단맞았던 것 기억하는가. 우리 영화가 저항적 리얼리즘으로 표현되지 못한다면 다른 나라의 영화라도 테마에 따라 우리 민중의 각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본 거야. 그것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이 우리나라에서 큰 감동의 물결을 이룬 것에서도 이해할 수 있지.

당신 영화를 맘 편하게 볼 수 없었다네

세월이 흘러 90년대가 됐어. 사회는 많이 변했지.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지만, 세상이 지난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지. 우리 사회가 6월항쟁을 겪었으니 말이야. 유화 국면에서 ‘민중’ 자 붙은 문화일꾼들이 TV 등 언론매체에 등장하는 것도 그리 낯설지 않던 시기였어. 한국영화도 아직까지는 낙후한 산업구조, 외화의 횡포 속에서 헤매고 있었지만, 전보다는 소재가 다양해지고 검열이 완화된 것도 사실이지.

당신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었어. 70, 80년대를 당신과 함께했던 우리는 모두 장만철만의 체험, 장만철만의 세계를 진정으로 확립한, 시적 서정성과 비판적 리얼리즘이 물씬 배어나는 영화를 기대했어. 당신의 영화들에 대해 언론매체에서는 찬란한 평을 쏟아냈지만 나는 그 영화들을 편한 마음으로 보지 못했어. 만 빼고는 말이야. 을 보면서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했던지. 그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좋다고 하면 나는 그냥 웃으며 동조하는 척했지. 음악회에서 난해한 서양 현대음악의 연주가 끝나고 모두가 박수칠 때, 나도 따라 치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될까봐 조바심하는 심정으로 말이야.

내가 본 당신의 영화는 끝없는 실험이야. 표현주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왜 이렇게 가야 하나, 그것이 답답하단 말이야. 당신이 직접 또는 숱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체험한 우리 현대사의 모순, 투쟁, 화해, 상생의 사건들을 영화적 문법으로, 서정적 리얼리즘으로 풀어내야 하는데, 아니 풀어내야 할 ‘의무’가 있는데, 만날 실험은 무슨 실험이람?

당신은 어떤 책에 실린 좌담기사에서 마당극에서 영화로 전향하게 된 동기를 밝힌 적이 있지. 당신은 80년 초 합수부에서 겪은 고초를 이야기하며 “탈춤이나 마당극을 가지고 정치적 동원이라는 형태로까지 몰아붙였던 일”의 한계에 대한 일종의 ‘기능적 패배주의’와 함께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합법성 자체에 대한 패배주의”를 느꼈기 때문에 영화판으로 향했다고 했지. 이것을 풀어보면, 탈춤이나 마당극이라는 일종의 소규모 대항매체는 폭넓은 대중과 접촉하는 데 한계가 있는데 영화는 잘 활용하면 합법적으로 엄청난 관객에게 자기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

영화를 그렇게 이해한다면 대중의 눈높이와 정서, 대중이 갈구하는 소재를 대중이 쉽게 이해하는 표현법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천박한 대중 추수주의도 아니고, 한국영화가 모두 사회적 리얼리즘 일색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야. 오직 당신만은 그에 복무해야 한다는 뜻이지. 에서 보듯 그것은 당신에게 맞는 옷이 아니야. 창비아동문고가 현실과 당당히 맞선 창비의 비판적 사회과학 서적들의 탄탄한 입지에서 나온 성과물이듯, 당신의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 세계가 우뚝 설 때 그 표현적 실험들도 성공하지 않을까.

를 보고나서 당신이 생각나…

가끔 마포 최대포집에서 돼지껍데기 구워놓고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 나는 영화 이야기, 당신은 출판 이야기 하면서 아이디어도 많이 나왔지. 등이 최대포집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만든 책이고. 요즘 아이디어를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 한번 만나자. 잘 생각해보면 우리 현대사 속에서도 영화화하기에 적합한 소재를 몇편은 끄집어낼 수 있어. 처럼 블록버스터 생각 말고 저예산으로 만들 수 있는 영화 말이야.

며칠 전 집에 오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남아 를 보고 나서 감동 반 질투 반의 심정으로 당신이 생각나 이 편지를 썼어. 만철아, 돌아와라! 아니 만철로 돌아와라! 표현적 실험으로 고뇌하던 장선우의 흔적을 버리고, 70, 80년대 무수히 얻어맞으면서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두 눈 부릅뜨고 시대와 맞장뜨던 그 장만철의 리얼리즘으로 돌아와라! 루카치의 말처럼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