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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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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커스- 손가락 빨며 찍으라굽쇼?

등록 2004-04-23 00:00 수정 2020-05-03 04:23

평균연봉 640만원 받는 ‘관객 1천만 시대’ 영화 스태프들… ‘합리적 고용’위한 조직적 움직임 보여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1100만명이 넘는 관객을 50여년 전의 참혹한 전쟁 속으로 데려간 영화 는 지난해 2월부터 10월까지 9개월 동안 전주·대관령·경주·양구·곡성·전주·태백·합천 등 전국 18개 지역을 돌며 촬영됐다. 그 ‘대장정’에 참여한 스태프 수는 200여명. 그들은 바로 옆에서 화약이 터지고 연기가 자욱한 ‘전쟁터’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이 영화를 만들어냈다. 가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세우고 해외 시장으로 향하고 있으며 감독이나 촬영감독, 주연 배우들에게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는 지금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스태프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의 한 스태프는 요즘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면서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촬영이 끝나고 다음 작품을 시작하기까지 8~9개월 동안은 아무런 수입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영화나 광고일이라도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한 감독 밑에서 한 팀으로 움직여야 하니까 감독님이 다음 작품을 고르고 준비하는 동안은 일을 못한다. 요즘은 광고도 프로덕션 단위로만 찍기 때문에 잠깐 끼어서 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 주변 동료와 후배들도 세차장, 편의점 등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다.”

의 조명과 촬영팀은 이 작품 전체에 대한 계약을 맺고 팀별로 돈을 받았다. 제작에 참여했던 한 팀 3~4명이 8개월 동안 받은 돈은 5500만원, 이 돈을 다시 퍼스트(제1조수)가 3천만원, 세컨드(제2조수)가 1500만원, 서드(제3조수)와 ‘막내’(말단 조수)가 500만원씩 나눠 받았다. 그나마 는 1급의 영화이고 촬영기간과 회수가 다른 영화의 2~3배여서 평균 급여에 비해 훨씬 많은 돈을 받은 편이다. “8개월 동안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평균 한국영화 촬영회수의 3배 정도인 136회의 촬영을 했고, 촬영 장소가 가파른 깊은 산속이어서 차가 갈 수가 없어 장비나 짐을 모두 손으로 지고 날랐다. 화약에 마른 잎사귀 같은 것을 섞어서 계속 터뜨리는 가운데 일을 해야 해서 위험부담도 컸다.” 그는 또 “의 스태프이었다니까 주변에서는 1억~2억원씩 벌었냐고 하는데 정말 괴롭다. 영화사에서는 정산이 끝나면 50~100% 정도 보너스를 준다고 하는데, 줄지 안 줄지도 모르겠다. 계약서에 정식으로 써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제작자 마음에 달렸다. 주면 고맙고 안 줘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씁쓸하게 이야기했다.

인터뷰에 응한 스태프들은 한사코 이름을 밝히면 절대 안 된다고 여러 번 당부했다. 영화판이 좁고 여전히 한 감독 밑에서 한 팀으로 움직이는 도제 시스템이 여전한 영화촬영의 특성상 제작사에게 쓴소리를 했다가는 영원히 영화를 찍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연출과 제작부는 도제 시스템이 많이 무너져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많지만, 촬영·조명 등 기술적인 부분은 여전히 촬영(조명)감독 밑에 4~5명의 조수팀이 퍼스트·세컨드·서드·막내식의 도제 시스템으로 활동한다.

최근 와 가 1천만 관객 시대를 열었고 스크린 점유율도 70%가 넘게 치솟은 한국영화는 ‘전성시대’라는 수식어로도 부족한 듯보인다. 바야흐로 ‘영상시대’라며 영화학과 입시에는 학생들이 몰리고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젊은이들도 영화판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 전부터다. 그러나 현장 스태프들의 처우는 여전히 열악하고 비합리적이다.

지난해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540만명 이상의 관객을 만난 의 한 스태프도 “계약서는 구경도 못했고, 감독이 조수들에게 돈을 분배해주었다. 전국을 돌며 103회 촬영을 했고 6개월이 걸렸는데 우리 팀은 3천만원을 받아 100만~1200만원씩 나눠 가졌다. 나중에 영화가 잘됐지만 보너스가 계약서에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제작사의 전 작품인 가 손해를 많이 봐서 못 준다고 하니 그냥 다들 ‘양해’하고 끝났다”고 했다.

나 처럼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둔 예외적인 경우에도 스태프들이 제대로 처우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스태프 전체의 평균 급여나 노동조건은 가혹한 수준이다. 지난달 말 한국영화조감독협회와 한국영화제작부협회, 촬영조수협의회, 조명조수협의회가 소속된 ‘4부 조수연합’이 156명의 현장스태프를 대상으로 조사한 ‘영화현장 스태프의 근로조건 개선과 전문성 향상을 위한 연구’ 자료를 보면 작품당 평균수입은 약 540만원에 불과하고, 연간 평균 참여편수와 작품당 평균수입을 곱해 환산한 평균연봉은 640만원이다.

가혹한 추가촬영에 밀려오는 자괴감

또 영화 인력의 고용은 90%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대부분 작품별 계약, 도급 계약을 맺는다. 작품별 또는 팀별 계약이 많은 것은 제작사가 똑같이 돈을 주고 훨씬 오랫동안 더 많은 사람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월급으로 주면 한달에 100만원씩은 줘야 하지만 한 작품당 한 팀에 3천만원식으로 계약하면 4~5명의 인원을 1년 이상 걸리는 준비·촬영·후반 작업까지 내내 고용할 수 있다. 실업상태 기간이 1년에 평균 6개월 이상이고, 조사 대상자의 54.8%가 어떤 보험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임금 체불 등 피해를 경험한 비율도 72%나 됐다.

하루 13~16시간 촬영이 39.4%, 16시간 이상인 경우도 34.8%이고, 잠을 자지 않고 25시간 이상 계속 촬영한 적이 있는 스태프가 88%에 이를 정도로 노동 강도가 가혹하지만, 정확한 노동시간과 기간에 따른 계약이 아니라 대부분 작품별 계약을 하기 때문에 초과임금도 요구할 수 없다. 최세규 촬영조수협회 회장은 “임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촬영시간과 기간 초과 문제”라며 “40회 촬영한다고 계약해놓고 70회를 찍는 영화들도 있다. 새벽 5~6시에 집에서 나가 밤 10시, 11시까지 촬영을 하고 있으면 너무 힘들어 뭘 찍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다. 심지어 계속 이틀 밤을 새며 촬영을 한 적도 있다. 영화가 돈 못 벌고 배고픈 직업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들어왔지만 영화 잘 만들고 싶어서 버티는 이들이 많은데 이런 현실에서 영화를 찍다보면 자괴감이 든다. 개별 계약을 하면서 정확하게 촬영시간, 횟수, 기간 등을 명시해 이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 스태프들의 노동조건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1년 영화 스태프들이 다음카페에 온라인 모임인 ‘비둘기 둥지’를 열고 대종상 시상식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3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의 요구로 임금은 약간 올랐지만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처우와 불합리한 노동환경은 여전한 셈이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영화가 화려한 겉보기에 비해 산업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여전히 영세한 영화사들의 난립과 예산 부족 등의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나 등을 만든 시네마서비스나 사이더스, MK버팔로(강제규필름과 명필름이 거래소 상장을 위해 세신버팔로와 합병한 회사) 등 빅3 제작사나 봄, 마술피리 등 몇몇 중견 영화사를 제외하면 아직은 영세한 상태에서 영화를 준비하다 자금을 끌어오지 못해 포기하고 사라지는 영화사들이 너무 많다. 한해에 준비되는 영화는 200~300편 정도지만 그 중에서 완성되는 영화는 70여편뿐이다. 나머지 영화들은 기획·준비 단계에서 스태프들만 모아놓았다가 중간에 ‘엎어지고’ 그때까지 3~4개월, 길면 1년씩 일했던 스태프들은 아무런 임금도 받지 못하고 나와야 한다.

‘영화계 지망생’ 과잉이 저임금 부른다?

제작부 스태프들의 모임인 제작부협회의 곽종훈 회장은 “나만 해도 지난 5년 동안 2편의 작품을 준비하다 ‘엎어졌다’. 1년6개월은 그냥 날린 셈이고, 그동안의 급여는 하나도 못 받았다. 그렇지만 근로계약서를 쓰지도 않았고 영화판의 그런 위험부담을 다 알고 있는 현실에서 그냥 포기해버렸다. 지난해 의 라인 프로듀서로 일하며 14개월 동안 1300만원을 받았다. 4대 보험 혜택도 없다. 그전에 엎어진 작품까지 하면 2년 넘게 번 돈이 그게 전부다. 그나마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버티지 결혼하면 못한다. 주변에 결혼한 스태프가 거의 없다”고 했다. 청년필름의 김광수 대표는 “돈 없어도 돈 안 주고 사람들을 고용해서 일 시킬 수 있는 곳이 영화판이다. 한국 영화산업이 커지고는 있지만 시스템이 확실히 정착되지 않았다. 미국·일본·유럽이라면 산별노조 형식의 노조나 동업자조합이 있어서 확실한 예산이 없으면 일을 거부하지만, 한국영화 노동자들은 아직 그러한 조직화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완성돼 극장에 걸리는 70여편의 영화 중에서도 대박 또는 흑자라도 낸 영화는 25% 정도고, 나머지 75%는 적자다. 영화가 완성됐다고 하더라도 촬영이나 조명 등 한 팀에 속한 5~7명이 2500만~4천만원 정도의 돈을 받는데, ‘막내’로 불리는 말단 스태프의 경우 1년 또는 1년6개월씩 걸리는 한 작품 전체에 대해 300만~400만원씩 받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각 대학의 영상 관련학과나 영화아카데미 졸업생, 그냥 영화가 너무 하고 싶어서 무조건 찾아오는 사람 등 수많은 경로로 매년 많은 인원이 영화계로 들어온다. 이런 노동력 과잉은 저임금 일용직을 양산하고 전문성을 축적할 기회를 가로막는다.

영화 스태프들이 자신을 노동자라기보다는 예술가로만 여기는 것도 노동조건의 개선을 가로막는 한 요인이다. 영화 의 제작부였던 한 스태프는 “다들 ‘나는 곧 강우석, 박찬욱, 차승제, 홍경표처럼 될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한국 영화 제작편수를 고려하면 한해에 감독, 프로듀서로 데뷔할 수 있는 인원은 매우 제한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스태프으로 있는 기간에도 기본생활을 할 수 있는 합당한 임금과 노동조건을 요구해야 하는데, 대부분 곧 각광받는 감독이나 제작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버티다보니 단합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대안으로 최근 영화 스태프들의 모임인 ‘4부 조수협회’는 노조 설립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알아보고 있다. 지난달 연구조사와 법률적 검토를 통해 이들은 “노조법상의 근로자는 임금생활자이거나 임금에 준하는 수입에 의존해 생활하는 자를 말하기 때문에 영화산업 종사자들은 노조법의 적용을 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얻고 장기적으로 노조 결성 움직임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장 영화 스태프 노조가 등장할 가능성은 낮다.

제작부협회 곽종훈 회장은 “이제는 조금씩 방향을 잡아가고 있는 단계지만 단기간에 노조가 결성되기는 힘들다. 사용자들도 관심이 없지만 스태프들 스스로도 노동자라는 인식이 없다. 궁극적으로 노동조합 또는 미국식 동업자조합(길드) 형태로 노동자들이 단결된 목소리를 내야겠지만, 아직은 지금의 조수연합 형태에서 재교육 등을 통해 전문성을 강화하면서 그에 맞는 대우를 요구해야 한다는 게 스태프들의 생각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 노동자로 인식하고 요구하지 않는다면 100년이 지나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노조 형태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말한다.

스태프들, 예술가냐 노동자냐

청년필름의 김광수 대표는 “지금 한국영화는 산업화로 가는 과도기 단계에 있다”며 2~3년 이후에는 시스템이 안착하면서 스태프들의 처지도 나아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지난해부터 한국영화의 화두가 ‘웰 메이드’(잘 만든 영화)다. 2~3년 전만 해도 투자사에서 작품의 질을 안 보고 ‘묻지마 투자’를 하기도 했고 잘 못 만든 코미디 영화에도 많은 관객들이 몰렸지만 이제는 영화를 잘 만들어야 관객들이 본다. 관객들이 계속 그런 영화를 원한다면 좋은 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스태프들에 대한 대우도 나아질 것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스태프들이 스스로 노동자로 여기고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영화사와 합리적인 계약을 하고, 노조를 통해 노동자들의 요구를 반영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스태프 처우 개선이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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