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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두 햄릿, 정통이냐 실험이냐

등록 2004-04-23 00:00 수정 2020-05-03 04:23

원전의 맛을 밀도있게 살린 과 소리 · 몸짓으로 언어의 경계를 허문

글 · 사진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은 연극의 기본으로 통한다. 연극계에 입문한 사람치고 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의 무대를 러시아로 옮겨 4시간이라는 장대한 스케일에 담아내기도 했다. 이 시대를 초월해 연극에서 뮤지컬·오페라·영화 등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재해석될 수 있었던 것은 구성과 인물 성격 묘사가 탁월했기 때문이리라. 권력을 향한 인간의 탐욕과 사악함, 그리고 복수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나약한 심리가 그토록 실감나게 묘사된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은 작가의 해석에 따라 메시지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확연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세파에 휩쓸리는 미소년,

우리는 얼마나 다른 을 만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한 하나의 답을 얻을 수 있는 연극 두편을 4월23일 동시에 만날 수 있다. 악어컴퍼니가 제작한 연극열전 여섯 번째 작품 (5월30일까지 서울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은 원작의 맛을 제대로 살려냈다. 3시간40분에 이르는 원작을 2시간으로 압축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구성으로 밀도를 높였다. 인간 심리의 정곡을 찌르는 대사 속에 가끔 삽입된 위트로 극적 재미도 더했다. 연출을 맡은 이성열씨는 “은 지난해 6개월 동안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보고 싶은 연극으로 꼽혔을 정도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는 햄릿의 복합적 성격에 관객들이 매료된 때문일 것이다. 햄릿과 클로디어스의 대결 구도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2기로 연출 수업을 받은 이성열씨는 대학로에 실험무대를 일궈왔다. 그동안 장정일의 시를 바탕으로 시와 영상·연극의 만남을 시도한 (1996)을 시작으로 (1997), (1998), (2000) 등에서 실험적 무대 연출과 시적 언어를 선보였다. 1999년에는 젊은 연기자들과 함께 의식과 삶을 공유하는 연극 공동체를 지향하며 극단 ‘백수광부’를 창단하기도 했다. 형식적인 자유로움을 추구하면서도 세련된 연출력을 인정받고 있다. 물론 ‘연극적 장치’가 전혀 없는 체홉주의(Chekhovian) 연극 (2001) 같은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소집단 문화운동의 맥을 이어온 이씨가 해석한 ‘햄릿’은 어떤 모습일까.

“그동안 김동원·유인촌·김석훈씨 등이 연기한 햄릿은 귀족적인 외모에 사변적 내면을 간직한 영웅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김영민씨가 연기하는 이번 햄릿은 거대한 세파에 휩쓸려가는 여린 이미지이다. 그렇게 연약한 인물이 정치놀음 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담았다.” 그가 해석한 ‘미소년 햄릿’을 연기하는 김영민씨는 연극 , 영화 과 등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씨는 막이 오르자마자 숙부와 어머니의 결혼에 대해 ‘태양신(선왕)과 쥐새끼(숙부)의 차이!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가슴이 터져버리고 머리통이 빠개질 것만 같다’는 섬세한 외모에 야성을 품은 절규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이성열씨의 햄릿은 원작의 아이러니를 살리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어머니를 애증의 눈으로 바라보는 인간적 갈등(햄릿), 아버지를 살해한 연인 때문에 절망하는 여인(오필리어-장영남), 권력을 위해 형을 죽이는 인간의 탐욕(클로디어스-장두이) 등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번 에서는 아이러니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이뤄진다. 예컨대 A4지 한장 분량이 넘는 독백이 이어지는 클로디어스의 기도 장면은 예전에 미처 몰랐던 그의 인간적 고뇌를 엿보게 한다. 클로디어스는 엘시노 궁정의 어두운 방에서 초에 불을 붙이며 ‘이 작은 빛이 나의 참담한 마음을 위로하는구나. 이 작은 빛이 영혼을 밝혀주는구나’라며 용서받고 싶은 간절한 ‘희망’을 토로한다. 원작과 다르게 해석한 인물도 있다. 귀족의 친구였던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이 국경 수비대의 병사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번 공연에서는 배우가 사라지고 땅이 갈라지는 파격적인 무대 연출을 즐길 수 있다. 햄릿과 레어티즈의 검투 장면에서 무대 바닥이 팽팽해지며 ‘링’을 만들고 햄릿의 죽음과 함께 입체적으로 구성된 경사 무대의 네 귀퉁이가 갈라질 때 그 틈에서 강렬한 조명이 비춰 비장함을 고조시킨다. 대학로의 대표적 무대디자이너 손호성씨의 작품이다. 이렇게 원작을 압축한 에서 화려한 무대와 조명, 의상 그리고 간결한 극의 흐름을 만끽했다면 다음에는 야외극의 진수를 모아놓은 ‘셰익스피어 난장’으로 발길을 옮겨볼 만하다. 그곳에서 우리가 아는 햄릿을 얼마나 다르게 풀어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놀라운 전환을 확인하는 연극 (5월1일까지 서울 국립극장 하늘극장)을 만날 수 있다.

극단 ‘노뜰’의 대표적 레퍼토리인 은 수많은 재창작 햄릿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어느 작품과도 구별된다. 죽음 앞에 놓인 한 인간에 대한 동양적 성찰이 이뤄지는 것이다. 이 작품은 노뜰이 지향하는 무대언어를 오롯이 보여준다. 언어의 경계를 허물고 모두가 교감하는 소리와 움직임, 춤, 타악기 등으로 ‘말’하는 것이다. 은 원작의 시적인 언어가 몸짓과 소리 등 비언어적 요소로 거듭난다. 극단 대표로 연출을 맡은 원영호씨는 “새로운 세기의 햄릿을 동시대적 코드로 그려내고 싶었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라고 여기는 동양적 정서를 통해 죽은 자가 전하는 깨달음의 힘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원작의 키워드가 ‘복수’였다면 의 키워드는 ‘깨달음’인 셈이다.

에는 귀에 익은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대사는 물론이고 오필리어 같은 원작의 주요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어린 햄릿과 네명의 선왕(사실은 한명이 선왕이고 나머지는 선왕의 그림자이다)이 나온다. 대본이라고 해봐야 A4지 10장도 되지 않는다. 그것도 대부분은 극의 흐름을 서술한 것이고 대사는 몇 마디일 뿐이다. 특별한 무대 장치도 없다. 해외 공연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만들면서 화물 운송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테고 특유의 무대언어만으로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일 것이다. 등장하는 8명의 배우는 대부분 초연(1998) 때부터 출연했다. 이 초등학교 1학년이던 어린 햄릿 역의 채우태(13)군이 중학생으로 성장한 만큼의 나이를 먹은 셈이다.

깨달음의 힘을 느껴라,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폐교에 자리잡은 ‘후용리 공연예술센터 극단 노뜰’의 연습실은 마음의 수련 같은 느낌을 풍긴다. 담배연기가 무대에 흐르면서 시작된 공연은 미국의 록그룹 도어스의 의 음악 속에서 입체적 신체언어로 햄릿을 연기한 뒤 다시 담배연기로 마무리된다. 어쩌면 ‘인생은 담배연기와 같다’는 아랍의 속담을 햄릿을 통해 풀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눈치 있는 관객이라면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하늘을 날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동작으로 망령이 꿈으로 인도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배우들이 무대에서 구르는 모습은 대지의 바람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텅 빈 무대에 흑백톤의 배경만 놓여 있는 , 거기에서 관객은 햄릿을 사유하며 삶을 채워넣어야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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