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혈맹’에 살다 ‘용병’은 갔다

등록 2003-09-18 00:00 수정 2020-05-02 04:23

베트남전에서 걸프전, 이라크전 등으로 이어져온 국군의 해외 파병 소사

“박정희 이놈아, 내 아들 살려내라.” “돈 없고 빽 없어 죽었다.”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파병됐을 때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소복 차림의 아낙네들이 억울하다며 땅을 쳤다. 몇몇은 사진과 유골함을 껴안고 울부짖다 구급차에 실려갔다. 매달 30구에서 50구까지 숨진 장병 유골이 베트남에서 봉송되면 한달에 한번꼴로 이같은 장례식이 열렸다.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파병 명분으로 △민족은 달라도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공동반공전선 참여 △한국전쟁 때 미국 등 자유세계에 진 빚 갚기 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런 공식 설명은 당시 국민과 장병들에게 별 설득력이 없었다.

파병의 혹독한 대가는 누구도 몰라

창군 이후 국군의 첫 해외 파병은 베트남 파병이었다. 베트남 파병은 1964년 7월 의무요원과 태권도 교관 파견, 65년 3월 공병대인 비둘기부대 파견, 65년 10월 전투부대인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 파견, 66년 9월 백마부대 파견 등으로 이어졌다. 8년8개월 동안 모두 합쳐 31만2853명의 국군이 베트남 땅을 밟았다. 국군 피해는 전사자 4960명, 부상자 1만962명, 고엽제 피해 호소자 6만6천명 등이다. 이런 엄청난 희생은 이후 해외 파병에 매우 부정적인 국민정서를 낳았다.

하지만 파병 당시 국내 언론이나 지식인들 사이에는 베트남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드물었다. 파병을 반대하던 야당 당수 박순천씨는 66년 베트남 방문 뒤 “결과적으로 파병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 많은 우리 장병을 베트남에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박씨는 비행기 위에서 풍요의 대지를 내려다본 뒤 너무도 황홀한 나머지 베트남 땅에 입을 맞추며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남의 나라에 군대를 보내고 민족의 위력을 발휘한 이 감격, 이 비옥하고 광활한 땅이 우리의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라는 글을 에 기고하기도 했다. 70년대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을 지낸 오원철씨도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베트남 파병은 연인원 30만명이 넘는 젊은이들의 해외연수였고 한국인의 국제화 출발점”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은 베트남에 31만명이 넘는 병력을 보내 피를 흘렸지만 미국은 ‘혈맹’ 한국을 무시했다. 파병 기간 중 미국은 미-중 국교 정상화에 대한 사전 통보를 하지 않았고 미 7사단을 한국의 동의 없이 철수시켰다. 애초 애그뉴 미국 부통령은 미 7사단의 철수 시기는 71년 6월 말이라고 했지만 미군은 계획보다 3개월을 앞당겨 71년 3월27일 한국을 떠났다. 뒤에 안 일이지만 닉슨 미국 대통령은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온 신경을 쓴 나머지 7사단 철수 시기를 앞당긴 것이었다.

적극적 군사외교로 인정받으려면…

2번째 해외 파병은 91년 1월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걸프전 파병이었으며, 90년대 들어 유엔회원국 자격으로 국제평화유지활동(PKO·Peace Keeping Operation)을 활발히 하고 있다. 91년 9월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이후, 한국은 신장된 국력에 걸맞게 국제사회에 공헌하는 차원에서 소말리아, 앙골라, 서부 사하라 지역에 국군의료지원단과 공병부대 등 지원부대를 보냈다. 한국은 99년 10월 유엔의 요청에 따라 국제평화유지군(PKF·Peace Keeping Forces)으로서 처음으로 동티모르 지역에 전투병력을 파병했다. 군 당국은 PKO 참여가 유엔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한 우리가 유사시 국제사회의 지원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군사외교라고 설명한다. 또 분쟁 현장에서 얻는 체험은 평시 부대훈련에서 얻는 감각보다 전장 적응력을 향상시키고, 분쟁 종료 뒤 복구 현장에 우리 기업이 진출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한겨레 저널리즘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