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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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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또 하나의 가족?

등록 2003-07-17 00:00 수정 2020-05-02 04:23

부부의 신화 깨지면서 새로운 자아찾기 몸부림… 주체적 성적취향 내세우는 기혼남녀가 사는 법

‘일부종사’와 ‘조강지처’로 표현되는 일부일처제가 흔들리고 있다. 기혼남녀들이 은밀한 사랑을 찾아 가정 밖으로 떠나는 것이다. 때론 외도가 가정을 지키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부부의 성(性)은 지금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영화 (감독 임상수, 8월14일 개봉)은 온 가족이 ‘바람 피우는’ 이야기다.

30대 인권변호사인 남편 영작(황정민)은 한참 나이 어린 애인과의 관계가 삶의 보람이고, 아내 호정(문소리) 역시 남편의 외도에 울며불며 매달리지 않고 “찐한 연애 한번 해보자”고 쫓아다니는 옆집 ‘고삐리’와 맞바람이 난다. 영작과 호정은 부부간 섹스에서는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잘 되지도 않는다. 평생 술병을 달고 살다가 이제는 간암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남편과는 평생 오르가슴 한번 못 느꼈고 15년 동안 섹스 없이 살아온 시어머니 병한(윤여정)은 나이 예순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 ‘진짜 인생’을 살겠다며 떠난다. 이 영화에서 남편과 아내는 껍데기만 남은 결혼의 신화에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콩가루 가족’은 “‘바람’이 지루한 결혼생활을 견디게 하고 때로는 그 일상을 벗어나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뻔뻔하게’ 선언한다.

지루한 결혼생활 견딜 힘을 찾아서…

지금 한국의 부부는 이들과 얼마나 닮았고 얼마나 다른가 특히 부부간의 소통을 상징하는 성생활에 대해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을까? 한국의 부부는 어디 있는가?

은 을 제작한 명필름과 함께 여론조사 전문기관 엔아이코리아에 의뢰해 지난 7월7~9일 전국의 기혼 남녀 3857명(남자 2175명, 여자 1682명)을 대상으로 ‘부부의 성생활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남성의 42.2%, 여성의 19.9%가 배우자 이외의 ‘애인’을 사귀어본 적이 있었다. 연령별로는 특히 50대 이상 남성의 50.9%, 40대 이상 여성의 23.4%가 애인을 사귀었다고 답했다. 또 ‘혼외 성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남성의 67.7%, 여성의 12.3%가 있다고 응답했다. 혼외 성경험은 남녀간 차이가 뚜렷했는데, 남성의 상대자로는 유흥업소 여성이 36.6%로 가장 많았고 지속적인 애인(22.4%), 인터넷이나 나이트클럽에서 일시적으로 만난 사람(11.5%) 순이었지만, 여성의 상대자는 60%가 지속적인 애인이었고, 인터넷·나이트에서 만난 사람(13%)이 그 다음이었으며 유흥업소에서 만난 사람(0.5%)은 거의 없었다.

기묘한 것은 부부의 성생활이 즐겁다는 응답이 남성 39.5%, 여성 36.4%나 됐지만, 배우자 이외의 이성과 관계를 갖고 싶다는 응답도 남성의 83.8%, 여성의 49.4%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부부생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대부분의 남성과 절반 정도의 여성이 ‘혼외관계’에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묘한 부조화가 결혼의 ‘균열’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배우자가 외도를 한다면 이혼을 하겠느냐는 응답에 대해서는 여성들이 이혼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반드시 이혼할 것이라는 응답은 남성이 29.2%, 여성은 35.4%였다.

텔레비전 일일 연속극에 등장하는, 식탁에선 많은 대화가 오가고 예쁘게 단장한 아내와 남편이 다정하게 잠드는 ‘모범 가정’은 사라지고 있다. ‘외도’의 폭발적 분출을 통해서 사회적 일부일처제와 성적 일부일처제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4년 동안 몇번의 ‘연애’를 해봤고, 지금도 꾸준히 만나는 파트너가 있다는 기혼 여성 김은정(38·회사원·가명)씨는 “연애 안 하는 사람이 있나? 내 주위에 있는 30~40대 남녀들에게 1~2번 이상 연애 경험은 다 있다”고 말한다. 그는 “남편이 첫사랑, 첫 남자이고 결혼생활 14년 중 10년 동안 남편밖에 모르고 살았던 적도 있다. 어느 순간 결혼에 대해 기대했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남편과는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숙제를 해치우듯 외도를 했다. 애인과는 마음이 잘 맞았고, 같이 잠을 자지 않고 손 한번만 잡아도 솜털이 바르르 떨리는 열정이 되살아났다. 남편과도 거리를 두니 좀더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한다. “꼭 성에만 탐닉해서 애인을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모르는 남자와 하룻밤 잘 수 있어도 남편과는 정말 못하겠다. 남편에게 맺힌 것, 상처받은 것이 너무 많다. 그런 감정은 회복불능이 아닌가 고통스럽다”는 그는 2년 전부터 남편과 각방을 쓰지만 이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남편이 아이들 아빠로서나 인간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고 애인과 결혼할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는 머릿속의 당위 명제

결혼 6년째인 박아무개(33)씨는 동갑내기 아내와 딸 1명과 살고 있으며, 유부녀 애인과 만나온 지 3년 정도 됐다. “대학 친구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지금 연인을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에게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몇번 만나면서 무뚝뚝한 아내에게서 찾지 못했던 따뜻함을 느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은 이미 식어 있었고, 애인 역시 가부장적인 남편과 멀어질 대로 멀어져 있는 상태였다. 만난 지 5개월 만에 잠자리를 했고, 이후로는 애인하고만 잔다. 아주 가끔씩 아내가 성관계를 요구하지만 이제는 아내와 자는 것은 불가능해져버렸다.” 그렇지만 박씨 역시 이혼은 꿈도 못 꾼다. “집안이나 직장에 줄 충격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없다. 부모님들께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 같다.”

‘배우자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애인 때문에 이혼하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서구와 달리 한국에서는 어떤 면에서 외도가 결혼생활의 외로움과 권태를 견뎌내고 가정을 유지시키는 ‘감정의 도피처이자 충전소’, ‘가정이란 깨진 그릇을 겨우 붙여주는 접착제’ 구실까지 하는 듯하다. ‘연애’는 하지만 가족은 깨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태도는, 역설적으로 한국에서 결혼 제도에 대한 환상이 얼마나 철저하게 깨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번이면 됐지 두번은 싫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는 박아무개(44)씨는 그런 전형적 사례다. 그는 3년 전 룸살롱에서 만난 아가씨(27)와 일주일에 한번 정도 만나 저녁 먹고 여관에 가는 섹스 파트너 관계다. 성적 욕구가 생길 때 전화를 걸어 만나지만 대화도 별로 없고 사랑도 없다. 가끔씩 용돈도 주고 옷도 사주지만,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에서 한다. 박씨는 ‘여자’를 만나는 가장 큰 이유가 성적 욕구 때문이라고 했다. “전문직 여성인 아내는 매일 밤늦게 퇴근하고 섹스를 하려면 ‘피곤하다’며 돌아눕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자’ 때문에 가정에 피해를 줄 생각은 전혀 없다”며 “저녁 먹고 여관에 가더라도 무조건 12시 전에 끝내고 평일에만 만나지 일요일에는 전적으로 가정에 봉사한다. 아내는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가끔 ‘바람 피워도 들키지는 말아라’고 말한다”고 했다. 그의 원칙은 가정과 일에 치명적인 ‘진짜 연애’는 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요동치는 사랑도 있었지만 포기했다. 여자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 사랑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가 술집 여자만 만나는 것도 그런 자기방어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연애는 하더라도 가족은 깨지 않으련다”

여전히 남성들의 외도가 여성보다 훨씬 많지만 성매매나 외도가 남성에게는 수천년 동안 제도적으로 보장돼온 점을 고려하면 분명 ‘결혼에 대한 반란’은 특히 여성들에게서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여성학자 정희진(경희대 강사)씨는 이렇게 진단한다. “인류 역사상 실질적인 일부일처제는 별로 없었다. 남성에게는 축첩, 외도, 성매매 등을 통해서 사실상 일부다처제가 허용됐다. 부계(父系, 夫系) 가족의 유지를 위해 여성에게만 일부일처제가 강요된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붕괴하고 있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가족 이데올로기’다. 가장, 주부, 아이들의 단란한 가정이라는 이데올로기와는 달리 서로의 소통과 관심이 없는 가족 안에서 참고 살던 개인들의 욕망이 분명해지면서, 결혼 ‘제도’의 이상과 현실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사회학자 다이애너 기틴스도 (일신사 펴냄)에서 “가장과 주부, 아이들로 정의되는 가부장적 핵가족은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래 부르주아와 숙련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발명된 역사적이고 계급적인 이데올로기”라고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귀족 여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은 항상 생계노동도 부담하면서 육아와 가사노동까지 떠맡는 이중노동을 해왔지만 산업혁명 이후 ‘집 안에만 있으면서 부차적이고 급여를 받을 수 없는 보살핌의 노동을 하는 주부’라는 여성상이 강제됐다는 것이다. 여성의 경제력이나 개인의 권리가 확대되고 있는 지금, 이제 그 여성들이 더 이상 그 역할에 안주하지 않으며, ‘가부장적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들은 남편과 달리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는 애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재발견한다고 말한다.

출판 관련 직종의 여성 프리랜서로 결혼 10년째에 딸이 하나 있는 김아무개(40)씨는 28살인 연하의 애인과 사귄 지 1년째다. 남자는 컴퓨터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미혼이다. “애인은 내가 남편한테서 얻을 수 없는 ‘특별한’ 것을 준다. 남편은 집안일에 관심이 없는 ‘마초’ 남편이다. 그런데 애인은 여성이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요리와 빨래도 잘한다. 한마디로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없다. 애인과는 평일 서울 근교 러브호텔에서 가끔 성관계를 하는데 남편과의 ‘의무방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는 섹스’를 한다.”

이처럼 여성들은 남편이 채워주지 못한 부분을 애인이 채워준다는 점을 연애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한다. 여성들이 섹스를 위해서만 남자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웃을 수 있는 파트너, 자신을 칭찬해줄 사람, 자신을 위해 노력을 기울일 사람을 찾는다. 여성들은 익숙한 배우자와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신선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원한다.

남녀 사이의 권력·위계… 40대 여성의 고민

결혼 7년차에 아이는 없는 김아무개(34)씨는 결혼한 뒤 지금까지 깊게 만난 남성이 4~5명 정도 된다. 남편은 그 사실을 모르고 부부 사이에 큰 문제도 없다. “강요된 제도로서의 일부일처제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런 폭력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싶었다. 물론 연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성이기는 하지만 남녀 관계를 성적으로만 생각하는 데는 반대다. 그동안 만나왔던 남자들은 헤어진 뒤에도 남자친구처럼 만날 수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김씨는 “우리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외도나 불륜의 문제는 일정한 사회적 맥락과 남녀 사이의 권력과 위계가 있다. 남자는 40~50대가 되더라도 성적 욕망을 지닌 남성으로 인정받지만 여성은 40대가 되면 사회적 의미에서 ‘여성’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20~30대 여성들은 나에게 다시 열정적 사랑이 찾아올까 하는 조바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인류학자인 조옥라 서강대 교수가 (또하나의문화 펴냄)에 쓴 ‘주부들을 위한 사랑의 부적’에는 점집에 찾아가는 기혼 여성들이 등장한다. 이전에는 바람난 남편 때문에 하소연과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왔던 기혼 여성들은 이제 ‘애인과 얼마나 더 계속 만날 수 있으며, 그 사람이 정말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찾아온다. 인천의 한 무속인에 따르면 “10년 전까지는 여자 손님이 오면 볼 것도 없이 ‘남편이 어디 딴 데 정신파는 곳이 있구나’ 하면 반은 맞았는데, 최근 몇년 동안은 ‘일부 종사 못할 팔자다’, ‘따르는 인간이 있다’고 하면 반은 맞는다”는 것이다. 조옥라 교수는 ‘주부들의 연애’의 원인이 “어머니 세대를 옭아맸던 신비화된 모성과 가족 이데올로기가 서서히 붕괴되면서 기혼 여성들이 성적 존재로서의 개인적 자아에 더욱 충실하려는 의식을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남편은 옛날처럼 아내들이 당연히 집에서 살림을 하고(직업을 갖고 있더라도) 애들을 잘 키울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아내 개인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소통도 하지 않는 가운데, 여성들은 주부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회의하면서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다는 공허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애’는 자신도 인간이고 자신의 인생을 갖고 싶다는 욕구의 돌파구인 셈이다.

한편, ‘가족의 위기’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가족 통합의 책임은 여성에게 있으며, 그 실패는 여성의 잘못’으로 덮어씌워 기존의 가족틀을 그대로 유지시키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기틴스는 근대 가족제도가 도입된 지난 200년 동안 가족 윤리가 위기라는 담론은 주기적으로 등장했으며(집을 나간 로라에 쏟아진 20세기 초의 비난을 보라!), 이런 ‘여성의 외도에 대한 개탄과 비난’ 뒤에는 기존 제도를 유지하려는 (남성) 지배층의 욕망이 있다고 말한다.

지금 가족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여라

여성학자 정희진씨는 “잠자리의 해방이 사회적 해방으로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성과 사랑에서 여성의 변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담론은 남성에게 역차별 정서를 일으키고, 여성이 해방됐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사회·경제적 약자로서 여성에게 이혼은 여전히 공포이며, 성별 권력 관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현재 여성의 지위를 당대 남성의 지위와 비교하지 않고, 조선시대 여성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차별적 시각이다”라고 강조한다.

사람들이 가족을 맺어 살아가고 상호작용하는 일상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짊어진 권위적인 가장과 여기에 복종하는 주부와 아이로 구성된 가족만을 ‘정상 가족’으로 보는 이데올로기에는 이미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있다. 외도의 ‘유행’도, 3쌍이 결혼하면 1쌍이 이혼한다는 통계도, 그 안에서 행복하지 않다는 함성이다. 그들은 좀더 개인적인 소통과 감정의 교류, 평등이 필요하다며 집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다. 가족은 이제 새로운 틀을 요구하며 아우성치고 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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