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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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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포주인가

등록 2003-03-13 00:00 수정 2020-05-02 04:23

결혼 뒤에도 불행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 매매혼과 성매매의 닮은 논리

국제결혼을 무사히 했다고 해서 곧바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도 관습도 나이도 다른 이들이 넘어야 할 장벽은 많다. 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이 낳은 불행은 남자와 여자의 ‘목적’이 다르다는 데서 시작한다.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권아무개(39)씨는 날로 거듭되는 아내 쉘라(22·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4세)의 투정에 요즘 집에 들어가기가 겁난다. 고 예쁜 아내는 한국에 온 지 한달이 지난 뒤부터 “이것 사달라, 저것 사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결혼한 지 반년도 안 돼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떼를 썼다. 권씨는 “편견일 수 있지만 조선족 여성은 너무 드세고, 베트남 여성은 너무 의존적이라 우즈베크쪽이 좋다고 해서 고민 끝에 선택한 사람인데 정말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내 쉘라의 주장은 다르다. “현지 소개자가 한국에 들어가면 뭐든지 다 해준다, 설사 마음에 안 들어도 이혼하면 된다고 했다. 남편도 나에게 한국에 오면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약속과 다르다. 나는 속았다.”

남편 잘못으로 이혼하면 불법체류

문화와 생활방식이 비슷한 조선족이나 베트남·필리핀 출신의 ‘신부’들도 저마다 크고작은 고민거리를 안고 산다. 업체를 통해 ‘팔려오지’ 않고 친지 소개로 중매결혼을 한 사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가장 큰 갈등은 남편의 구속과 시댁식구들과의 불화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살고 있는 박이화(가명·31)씨는 유치원 교사 출신의 조선족 동포다. 그는 한국 남성과 결혼한 언니의 중매로 2년 전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종묘상에서 배달일을 하는 남편은 과묵하고 성실한 편이다. 이화씨는 일을 하고 싶지만 반대에 부딪혀 있다. 어렵게 아내를 얻은 남편은 이화씨를 집에만 두고 싶어 하고, 트집잡기 좋아하는 시어머니는 “아들을 낳으라”고 강요한다. 이화씨는 “요즘 한국 여성들은 결혼하고도 일하고, 아들만 원하는 풍조도 사라졌다는데 나는 온 집안 식구들이 물건 대하듯 한다. 남편은 둘째인데 시어머니는 나보고 모시라 하고, 다른 한국인 동서들도 나를 무시한다”도 하소연한다. 이화씨는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에 왔으나, 남편과 시댁식구들은 이화씨 꿈을 알아주지 않는다.

국제결혼 증가속도에 비해 우리 사회는 아무런 준비를 해놓지 못한 상황이다.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 여성은 가족 내에서든 사회에서든 다른 ‘신분’이다. 한국 남성과 사실혼 관계가 2년 이상 이어져야 국적취득을 위한 귀화절차를 거칠 수 있고, 비자를 갱신할 때는 남편의 동의가 꼭 있어야 한다. 이런 가운데 중국·조선족이나 옛 소련, 동남아시아 출신자들에게 남편은 ‘왕’이다. 사회적 편견과 불안한 체류구조 탓이다.

얼마 전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 위치한 이주여성인권센터의 문을 두드린 20대 중반의 조선족 여성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돼 있다. 그는 한국 남성과 결혼한 지 석달 만에 이혼했다. 신혼 첫날부터 발생한 남편의 폭력이 원인이었으나, ‘성격 차이로 인한 합의이혼’에 도장을 찍었다. 법정다툼까지 가봤자 외국인이라는 신분상 불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단기비자로 들어온 그의 체류기간도 함께 끝난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도 별다르게 뾰족한 수가 없고, 부모가 있는 한국에 살자니 불법체류자 신세다. 이주여성인권센터 최진영 사무국장은 “남편의 귀책으로 이혼하거나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이주 여성들에게는 사실상 아무런 사회적 보호대책이 없다”고 말한다. “국적취득 전에 이혼한 이주 여성에게 만약 아이가 있다면, 여성은 아이의 양육권을 갖기 힘들다. 만약 남편이 아이를 포기한다 해도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아이를 기를 방법이 없다. 아이를 데리고 손쉽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진퇴양난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생존권을 위협받는다.”

해마다 증가하는 외국 여성 혼인신고

지난해 11월 광주여성발전센터와 광주기독교방송이 광주전남지역에 사는 국제결혼 외국인 여성 100명을 가정방문해 조사한 결과, 10명 가운데 3명이 상습적인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 여성 가운데 64%는 “그냥 참는다”고 답했고, 26%는 “가출한다”고 응답했다. 여성단체나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남편의 보복이 두려워서”(43%), “특별히 도움을 받을 것 같지 않아서”(38%)라고 응답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찾는 외국인 아내들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대부분 남편의 폭력을 못 이겨 가출한 상태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다. 한국인 남편들 역시 아내가 집을 나갔을 때에야 상담소 문을 두드린다. 남편의 주장에 따르면 의도적 가출도 있지만, 가정불화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상담소로서는 도와줄 방법이 없다. 박소현 상담위원은 “아는 사람을 통해 중매로 만난 이들이라면 비빌 언덕이라도 있다. 설득하고 화해하거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볼 여지라도 있다. 하지만 업체를 통해 매매혼으로 이뤄진 결혼에서는 한쪽의 일방적 결정이나 결함으로 파경에 이를 위험이 크다. 한쪽이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거나, 둘 사이에 말이 안 통하면 문제해결이 더욱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 여성들의 혼인신고 건수는 중국·조선족 동포의 위장결혼이 사회문제가 된 1999년 전후로 잠깐 주춤했으나 그 뒤 해마다 30%씩 증가하고 있다. 특히 옛 소련과 동남아시아 출신 여성들의 수는 계속 늘고 있다(표 참조). 일본과 미국 출신 여성들이 종교단체를 통해 합동결혼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감안하면, 2003년 2월 말 현재 국민배우자비자(F2-1)로 장기체류 중인 등록 외국인 여성의 절대 다수는 중국·조선족(58%)과 옛 소련·동남아시아 출신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다(그래프 참조).

과거에는 방문동거비자(F1) 발급에 결혼을 목적으로 한 입국이 포함됐으나, 2002년 4월부터 기존 거주비자(F2)를 결혼비자 명목으로 내주고 있다.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입국하는 이들이 늘어나서다. 그러나 결혼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여성들의 수와 국민배우자비자로 체류 중인 여성의 수만으로 국제결혼 수치를 파악할 수는 없다. 상당수 국제결혼 여성들이 단기 방문비자나 관광비자로 ‘일단’ 한국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또한 혼인신고를 미루거나,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결혼중매업체에서는 대략 한해 1만5천쌍의 국제결혼 커플이 탄생한다고 보고 있다.

결혼 못하는 남성은 어떻게 하느냐고?

국민배우자비자 집계수치만 볼 때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남녀비율은 많게는 70배(조선족)까지 차이난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이주여성인권센터 최 사무국장은 “개별적으로 연애결혼한 사이가 아니면, 국제결혼은 자체가 매매혼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옛 소련과 아시아권 여성들은 신분상승·신분탈출 수단으로 한국행을 택한다.

한국 남성이 결혼하기 위해, 아이를 낳기 위해, 혼자 늙어가기 싫어서, 한국보다 ‘국부’가 낮은 나라의 어린 여성들을 돈을 주고 데려온다. 어린 외국 여성은 희망 없는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펑펑 쓰기 위해 자신의 나라보다 ‘국부’가 높은 한국의 나이든 남성을 따라온다. 많은 업체들은 “매매혼이라고 비난해도 좋다. 하지만 결혼하고 싶어도 결혼 못하는 남성은 어떻게 하는가”라는 논리를 편다. 성매매에 관해 “결혼 안 한 남성은 어디서 욕구를 푸는가”라는 논리와 꼭 닮아 있다. 국제결혼중매업체는 글로벌 시대에 합법적으로 ‘국경 없는 포주’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는 게 아닐까. 분명한 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인생이 걸려 있는 중요한 선택인 결혼이 포주의 횡포로 인해 망가뜨려지고 상처입는다는 것이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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