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너무 멀리 와버린 비정규직 문제, 금융계의 고민
지난 3월 현재 취업 임금노동자 수는 1349만명이다. 1년 전에 비해 52만3천명가량 늘어났다. 그러나 그 중 정규직은 얼마 되지 않는다. 늘어난 취업자 중 정규직(상용직)은 전체의 22.8%에 불과하다. 임시직이 34.6%, 일용직이 42.6%로 비정규직이 대부분이다. 정규직으로 취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계약직 재고용 ‘급여 절반’

비정규직의 급증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은 은행이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현재 은행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2만8천여명으로 전체의 28.76%에 이른다. 부산은행·경남은행·옛 주택은행 직원 중에는 비정규직 비율이 무려 40%를 넘는다. 종업원 300인 이상 사업장의 비정규직 비율이 평균 5.6%인 것과 비교하면, 은행의 비정규직 비율은 엄청나게 높다.
왜 은행에서 비정규직 고용이 이처럼 급격하게 늘어난 것일까? 노동비용을 줄이고, 앞으로 있을지 모를 고용조정에 대비해 정규직 채용을 기피하고 있는 것이 주요 원인이다. 특히 기업의 임시직 고용에 거의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점이 비정규직의 급증을 부추겼다. 외환위기로 여러 은행이 문을 닫으면서 은행에서는 많은 실직자가 발생했다. 언제든 데려다 쓸 수 있는 취업 대기자가 넘쳐난 것이다. 은행 창구직원들의 임시직 전환은 이런 조건을 바탕으로 신속하게 진행됐다. 한 시중은행의 인사담당 임원은 “새로 문을 여는 콜센터 등에도 거의 모든 직원을 비정규직으로 뽑고 있다”며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이들이 정규직에 비해 엄청난 차별을 받는다는 데 있다. 한 시중은행의 창구 여직원인 박아무개(35)씨의 월급여는 실수령액 기준으로 100만원이 조금 넘는다. 그도 한때는 정규직이었지만, 다른 은행에서 퇴직한 뒤 이 은행에 계약직으로 재고용되면서 급여가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은행 쪽에서 보면 박씨 같은 창구 직원들은 항상 일정한 인원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은행은 일정기간 뒤 계약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이들에게 정규직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주지 않고 있다.
사실 제도적인 해법은 명확하다. 임시근로 남용을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부소장은 우리나라 임금노동자의 30%가량은 이른바 ‘장기 임시근로자’”라며, “이들이 비정규직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외국에도 비정규직이 있지만, 그 비율은 대체로 10∼20% 수준이다. 정규직과의 임금 차이도 그리 크지 않다. 임시직 취업이 어쩔 수 없어서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사정에 따른 자발적인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임시직 채용은 매우 엄격한 제한을 가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계약근로에 관한 기본협약’을 노사 간에 체결해, 이 협약에 따라 회원국들에게 올해 말까지 임시근로를 엄격히 제한하는 내용으로 법을 고치도록 했다.
비정규직 완전 철폐는 위선적 논리?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또 다른 통로는 근로자 파견제도이다. 은행 노동자중 운전기사·청원경찰·보일러공·청소원 등 기능직원은 대부분 정규직에서 계약직을 거쳐 다시 용역업체 직원 신분으로 바뀌었다. 일은 전과 달라진 것이 없지만, 이들의 급여도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한 은행의 보일러공은 “회사에서는 용역업체에 180만원이 나간다는데, 내 실수령액은 100만원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근로자 파견업체들은 파견근로자들의 임금 중 30%가량을 챙기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의 경우 고용불안도 문제지만 이른바 ‘이중착취’가 이뤄지는 것이 더욱 힘들게 하는 요소다.
차별받는 비정규직의 지속적인 증가는 금융노조에는 큰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무엇보다 교섭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노조에 가입한다는 것은 먼저 해고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주택은행지부 이민숙 부위원장은 “비정규직이 절반 가까이에 이르고, 특히 창구 직원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인 상황에서 어떻게 파업이 가능하겠느냐”고 말했다. 또 다른 간부는 “이렇게 가다가는 일본의 노조처럼 허울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내비쳤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정규직도 언제든 비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
금융노조 간부들 가운데는 비정규직의 확산을 막지 못한 주요 원인으로 정규직이 기득권에 집착했다는 점을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동안 정규직 중심으로 이뤄진 노조가 비정규직 문제에 대응해온 논리는 “비정규직 완전 철폐”였다. 금융노조 이주상 정책부장은 이에 대해 “그것은 비정규직을 위하는 척하지만 실현 불가능한 위선적 논리”라고 잘라 말한다. 한 시중은행 노조간부의 말은 훨씬 직설적이다.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바꾸자고 주장하면, 집행부가 그날로 무너져버릴 것이다.” 파이는 변한 게 없는데 비정규직에게 동등한 처우를 하라는 것은 정규직의 것을 떼주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비정규직 차별에 대한 은행원들의 생각은 아주 복잡하다. 창구 직원들처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금이 절반 수준에 불과한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불편한 마음을 갖는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규직이 할 일과 비정규직이 할 일이 따로 있고, 그로 인한 임금격차는 당연하다는 생각도 폭넓게 존재한다.
회사 쪽의 논리에도 정규직으로서는 무시해버리기 어려운 무게가 실려 있다. 한 은행의 인사담당자는 “비정규직이 정규직에 비해 너무 적은 임금을 받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는 공감하지만, 먼저 직무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창구업무는 높은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 과거와 같은 급여지급 체계로는 정규직으로 고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또 “정규직은 해고가 어려워 그냥 쓰지만, 비정규직은 유휴인력이 얼마든지 있다”며 “이를 고려하지 않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면 그 비용을 정규직이 분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한 노조 간부는 “그런 말을 들으면 솔직히 별로 대응할 말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전북·부산은행의 의미 있는 실험
전북은행·부산은행의 창구직원 정규직전환 시험제도는 그런 점에서 눈길을 끈다. 전북은행은 지난 4월14일 2년 이상 근무한 시간제(파트타임) 창구직원과 3년 이상 근무한 계약직 창구직원을 대상으로 계약직 및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시험을 실시했다. 시험을 치른 계약직 1명은 정규직으로, 60여명의 시간제 노동자 중 17명은 계약직으로 전환됐다. 이런 제도는 지난 2000년 노조가 회사 쪽에 강력히 요구해 지난해부터 실시한 것이다. 물론 회사 쪽으로서도 비정규직의 잦은 이직이 업무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고려도 있었다. 전북은행지부 신승운 부위원장은 “정규직의 상여금을 낮추고 비정규직은 높여 노동절 특별상여금을 모두 똑같이 받는 등 일체감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만으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완전히 해소하기는 어렵겠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간극을 메우려는 의미 있는 시도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규직 중심인 현재의 노조가 다른 사안들을 제쳐두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전력을 쏟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금융노조의 한 간부는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는 능력이나 성과에 따라 보수가 결정되는 완전연봉제를 원하는 이들도 많다”며 “규모가 큰 은행은 직무가 세분화되면서 정규직 내부의 결속력까지 약화되고 있어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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