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7일 독일 베를린의 한 초등학교 점심시간. 6학년 학생들이 점심으로 나온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갈아 만든 햄버거스테이크를 먹을 때 옆 급식 창구에서 미아 루이즈(11)는 감자와 콩으로 만든 스테이크를 집어들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두 음식은 겉으론 큰 차이가 없다. 3개월 전 미아는 동물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는 채식주의자로 살기로 결심했다. 미아의 부모는 채식주의자가 아니지만 미아의 결심을 윤리적인 생각이라 여겨 좋은 채식 식단을 마련해주면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미아는 “학교에서 가끔 고기를 흉내낸 맛없는 급식이 나온다는 것 빼고는 채식 때문에 불편하거나 차별받는다고 느낀 적이 없다”고 했다.
군대·감옥에서도 ‘채식할 권리’미아는 지금 독일에서 늘어나는 채식을 선택하는 아이들 중 하나다. 독일의 대표 영양조사인 에스키모(EsKiMo· Ernährungs Studie als KiGGS Modul)의 2006년 기본 조사에선 채식하는 3~17살 독일 아동·청소년의 비율은 2.4%였는데 2017년 조사에선 3.3%로 늘었다.
채식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20대의 증가세는 폭발적이다. 베를린 학생복지회가 최근 베를린 20개 대학 17만2천 명을 조사해보니 대학생 가운데 31%가 채식, 13.6%는 완전한 채식(비건)이라고 답했다. 채식 학생이 늘어난 것에 힘입어 지난 4월 베를린공과대학에는 비건 전문 학생식당인 ‘베기2.0’이 문을 열였다. 비건 메뉴 360가지를 시험하고 보급할 목적으로 연 이 식당에는 많게는 하루 1천 명의 손님이 북적인다고 한다.
10~20대 젊은이들이 왜 채식을 선택하는지, 그들의 동기를 짐작할 만한 조사가 있다. 논문 ‘독일 아동, 청소년 채식주의 비율 조사 연구(2019)’에선 청소년들이 “부모의 생활태도에 영향받아서, 아니면 이와는 정반대로 부모와 다른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채식을 선택한다고 했다. 독일 시장조사기관 스코포스 통계에선 비건의 61%가 “동물복지를 위해 먹거리를 바꿨다”고 했다. 건강을 목적으로 한 사람은 8%밖에 되지 않았다.
채식을 기본권으로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는 채식주의를 선택한 젊은 채식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든든한 근거가 된다. 를 쓴 변호사 랄프 뮐러아메니치는 과 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이제 독일에서 논점은 채식이 아니라 비건이다. 2016년부터 비건 학생과 부모를 대신해 유치원과 학교를 상대로 수많은 소송을 진행했지만 그중 아예 채식 식단이 갖춰지지 않았던 곳은 유치원 1곳밖에 없었다. 동물보호단체인 페타(PETA)와 채식 단체들의 노력으로 이제는 학교는 물론 군대와 경찰, 심지어 감옥에서도 채식을 선택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고 했다.
채식 인구 1%인 포르투갈에서 시작된 ‘채식 공공화’매주 바뀌는 독일연방군 식단(vpflabw.de/menueplan)을 보면 병사들은 고기나 생선이 든 요리, 채식 음식, 돼지고기가 없는 요리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채소 뷔페는 항상 마련된다. 훈련 때 야외에서 먹는 전투식량에도 채식주의자용이 따로 있다. 또 감옥에 있는 죄수들도 채식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수감자에게 채식 급식을 마련해주는 자원봉사자와 단체가 있다.
1993년 유럽인권재판소는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는 유럽인권협약 제9조에 비건과 채식 또한 포함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코셔식품(유대교 율법 인증을 받은 식품)을 먹는 유대인, 할랄식(이슬람 율법에서 허용한 제품)을 지키는 무슬림 등 여러 종교와 인종이 섞여 사는 유럽에선 고기를 먹지 않는 결정을 종교나 개인의 윤리로 존중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하기 쉬웠다. 그런데 지금 유럽에선 채식을 보편적 급식으로, 집단 윤리로 삼는 과정에서 진통 중이다.
채식주의자들이 모범으로 꼽는 예는 포르투갈이다. 2015년 포르투갈에서는 모든 학교, 대학, 병원에 채식 선택권을 갖게 해달라는 청원운동이 시작됐다. 그 결과 “모든 공공기관의 식당 시설은 최소한 하루 한 가지 채식 메뉴를 제공해야 한다”는 법이 통과됐을 때, 포르투갈에서 채식 인구는 포르투갈 인구의 1%인 12만 명이었다. 채식 인구가 540만 명인 영국이나 독일의 800만 명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의 채식인이 사는 나라에서 처음 채식인 차별을 방지할 법을 만들면서 ‘채식 공공화’ 역사가 시작됐다.
채식권 역사에서 그다음을 기록할 나라는 프랑스다. 11월부터 프랑스의 모든 학교에선 주 1회 채식 급식을 하는 ‘의무적 채식’이 시작됐다. 프랑스에선 2018년 10월 식품법(EGalim법, 농업·식품 부문의 상업 균형과 모든 사람을 위한 건강하고 지속·접근 가능한 식생활에 대한 법률)이 통과됐다. 이 법은 채식 급식으로 비만 아동 비율을 줄이고 음식쓰레기를 줄이며 고기를 살 돈으로 지역 유기농산물을 사도록 해야 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법안 통과 운동에 나섰던 프랑스 채식협회, 그린피스 프랑스, 학생연맹 등은 채식 밥상으로 환경과 지역경제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부풀어 있다.
‘모두를 위한 식탁’에 어떤 음식을 올릴까독일에서는 비건 급식이 논쟁 중이다. 2016년 베를린 지방법원은 9살 비건 어린이의 아버지가 학교에서 비건 식단을 제공해달라고 낸 소송을 기각했다. 하루 한 끼 달걀과 유제품을 포함한 채식을 권하는 독일영양협회(DGE)의 건강 기준은 비건 관련 소송에서 늘 논란이 된다. 비건 자녀를 둔 부모들은 급식비를 내지 않거나 급식 대신 직접 식사를 마련하는 방법으로 저항하고 있다. “공동체에서는 공동의 식사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비건 급식 소송 때 독일영양협회의 한 영양사는 언론에 이렇게 말했다. 반면 비건들은 “서로 다른 종교와 인종, 육식하는 이와 채식주의자가 함께 앉을 수 있는 밥상은 채식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자료 제공: 한국 녹색당 유럽 모임베를린(독일)=남은주 전 한겨레 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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