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자동차 공장 아닌 데서 스무일곱 살

특성화고-1992년생-중산층 이하 스무 명, 삶의 다양한 모습들
등록 2019-09-11 10:31 수정 2020-05-07 13:38
2011년 2월 D공고 졸업식을 마친 뒤, 이 학교 자동차과(3학년 1반) 학생들이 교실에 모여 졸업 앨범을 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2011년 2월 D공고 졸업식을 마친 뒤, 이 학교 자동차과(3학년 1반) 학생들이 교실에 모여 졸업 앨범을 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2011년 2월 <한겨레21> 제849호에 6쪽짜리 기사가 실렸다. ‘어느 전문계고 졸업생 32명의 폐기된 꿈’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2019년 8월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종만(가명)이 기사를 넘겨본다. “폐기, 폐기라…” 읊조리며 웃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자동차 전문가의 꿈을 안고 2008년 D공고 자동차과에 32명이 입학했다. 학과 정원이 딱 한 반 규모라, 3년 내내 한 교실에서 정을 보태며 지냈다. 기사가 나왔던 졸업 즈음, 자동차과(3학년 1반) 32명은 다른 진로를 찾거나 자동차 정비업체 직원 정도로 꿈을 낮췄다. 가명으로 기사에 적힌 한 사람, 한 사람을 추측해보며 즐거워하던 종만이 묻는다. “그런데, 다들 잘 살고 있겠죠?”
다들 잘 살고 있을까? 졸업식이 끝나고, 서로의 안부는 아스라이 소문을 타고 친구들 사이를 띄엄띄엄 번질 뿐이었다. 갈린 채, 세상에 나와 2010년대를 20대로 버티는 동안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은 점점 줄었다. 그렇게 8년이 흘렀다.
그사이, 전문계고는 특성화고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정부는 ‘고졸 취업’의 성공 사례를 전파하느라 분주했다. 한쪽에서는 특성화고를 졸업한 후배들의 죽음이 전해졌다. 준비 안 된 현장 실습에 무리하게 내몰렸다고 했다. 고졸 취업 활성화 대책을 뜯어볼 여유도, 후배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할 여유도 D공고 졸업생들에게는 없었다. 그저 흘러흘러, 때와 상황에 맞춰 일감을 찾아 떠돌거나, 도저히 버티기 힘들 때 쉬었다. 그렇게 청년과 청춘을 향한 우려, 찬양, 주장, 대책의 수혜자였고 때로 피해자였다. 고맙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애초 세상이 말하는 ‘청년’이라는 단어에 자신들이 포함되는지도 알기 어려웠다.
D공고 졸업생 서른두 명 가운데 스무 명을 다시 만났다. 대화는 때로 2시간 가까이 이어졌지만 질문은 사실 별게 없었다. ‘잘 살고 있었나요?’
세상이 좀처럼 해주지 않던 질문을 받아들고, 졸업생들은 조심조심 말을 골랐다. 첫 일자리를 거쳐, 전문대를 거쳐, 군대 시절을 지나, 다시 새 일자리, 그리고 또다시 새 일자리, 그 사이사이 아르바이트, 책임을 떠안아야 했던 가족의 불행… 8년을 채우는 사건의 목록은 막상 말해놓고 보니 끝없이 길었다. 특성화고를 졸업해서, 90년대생이라서, 부모님이 부유하지 못해서 겪은 일인 것 같기도 했고, 그냥 내 운명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긴 시간 나누지 못했던 2011년 D공고 졸업생 스무 명의 안부를 전한다.
하어영·방준호 기자 haha@hani.co.kr
8년의 시간을 건너, 그렇게 2011년 D공고 자동차과 졸업생 서른두 명은 27살 청년이 됐다. 누군가 곡절을 겪었고 누군가 비교적 평탄했지만, 어쨌든 모두가 공평하게 한 살씩 쌓아 20대 후반을 맞았다. 나이만큼 자라난 고민을 짊어지고 2019년을 난다.
<한겨레21>은 이 가운데 스무 명을 8년 만에 다시 만났다. 소득과 자산 같은 경제적 조건을 비롯해, 일·가족·미래·관계에 대한 생각을 듣고 기록했다. 20대, 그 가운데서도 그동안 크게 조명받지 못했던 특성화고등학교 졸업생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특성화고 졸업생’ ‘1992년(또는 1993년)생’ ‘중산층 이하의 가정환경’ 같은 스무 명의 공통된 조건은 개개인마다 배합과 정도를 달리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개인에게는 예민한 정보를 담고 있어 인터뷰는 모두 익명을 전제로 진행했다.
특성화고 졸업생이 모두 생산 현장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석영, 인규, 홍철처럼 전문대학교 자동차 보상학과를 선택했던 아이들은 “힘들게 살아온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양복 입는 일’”(홍철)을 하게 됐다. 대기업(보험회사) 정규직으로 일한다. 4년제 대학을 나오지 않은 탓에 임금이나 승진 기회 면에서 차별을 경험한 적도 있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보다 과도한 업무와 사람들 틈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크다. 그럴 때면 접어둔 자동차 기술자의 꿈을 공연히 만지작거린다. 삶과 일의 균형을 갈망한다. 흔히 생각해볼 수 있는 사회 초년생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철, 봉주, 영남, 원용은 현장에서 일하는 기술직으로 진로를 정했다. 상당수가 그사이 산업 전체에서 비중이 크게 늘어난 반도체 산업 언저리에 일자리를 구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다만 이들이 일하는 곳은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대기업은 아니다. 반도체 공장 배관을 설치하거나 시스템을 관리해주는 영세 협력업체, 공장 건설 장비를 관리해주는 작은 중장비업체에서 일한다. 이런 회사가 ‘10년 뒤까지 머물 만한 직장’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좀더 나은 일자리로 나아가려고 마음을 다잡고 자격증 시험 대비서를 뒤적이다가도, 노곤한 몸에 의지는 자주 흩어진다.
종만과 현수, 정수, 용래는 배우, 자영업, 골프 캐디처럼 다른 반 친구들과는 상당히 다른 자리에서 20대 후반을 맞았다. 전문성을 키워 이 일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다만 생계나 일의 안정성 같은 현실의 벽에 부닥칠 때 “이 꿈을 접을 수도 있다”(종만)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졸업 때 학생들 스스로 짐작한 대로, 대기업 자동차 생산공장에서 스물일곱 살을 맞이한 청년은 한 명도 없다. 그나마 성준과 상덕, 범수 정도가 대기업에 딸린 자동차정비센터에서 일한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지금 자기 삶을 표현하는 단어는 때로 격렬하고 때로 남 얘기처럼 아득하다. 결혼도 걱정이고 나이 들어가는 부모님도 걱정이지만, 거기 대비하기 위한 저축은 별로 하지 않는다. 미래를 염려하는 말들에는 ‘욜로 스타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며 웃어넘긴다.(경진) 자신에게 해준 것도 없이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해버리는 가족이 꼴도 보기 싫지만, 그래도 막상 가족 누군가에게 ‘사고’가 생기면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 덤덤히 짐을 받아들인다.(영남) 깊이 생각하면 무너져버릴 것 같아 애써 눈앞의 일들만 바라보려 한다. 그러다 생각 없이 사는 하루하루가 문득 불안하다.(봉주) 이직을 생각하고 보니 고졸 학력의 한계를 느끼지만 “내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자책해버린다.(보경)
일은 ‘불안-버틴다’, 가족은 ‘밑-시간’, 미래는 ‘걱정-욜로’, 관계는 ‘외로움-분리’ 같은 단어와 뒤섞인다. 이런 상황을 딛고, 버티고, 헤쳐가며 이루어야만 할 꿈은 대체로 ‘평범해지는 것’으로 모였다. 스쳐 보면 종잡을 수 없지만, 이들의 삶과 함께 들여다보면 수긍 가는 지점이 적지 않은 단어들이다.
[%%IMAGE2%%]

“내일 당장 잘릴 수도 있는 거예요”
① 일: 불안 - 버틴다

“회사랑 계약한 건물이 두세 군데만 줄어도 사람을 감축해야 하니까요. 이러고 있다가 저도 내일 갑자기 잘릴 수도 있는 거예요.”(봉주)

봉주는 ‘지금’ 충남 천안에 있는 건물 시설관리업체를 다닌다. 계약직이고, 네 번째 직장이다. 아파트, 공장, 상가 가리지 않고 회사와 계약 맺은 건물에 가서 수도나 난방, 환풍기 같은 시설에 문제가 생기는지 살피고 관리한다. 번번이 바뀌는 일터(건물)에 있는 당직실에서 눈 붙이며 24시간 맞교대로 일한다. 한 달 300여만원을 받는다. 야간 근무를 해야 하는데다 근무시간이 길지만, “연봉도 괜찮고 근무환경도 괜찮다”고 봉주는 스스로의 일을 평가한다. 그렇게 말하는 봉주의 팔에는 며칠 전 일하다가 생긴 상처가 선명하다. “제가 잘못해서 타일 벽에 찢겨서, 다섯 바늘인가 꿰맸어요. 뭐 이런 건 그냥 무덤덤해요.” 봉주는 웬만한 상처에는 무덤덤한 청년이 됐다.

일하는 19명, 놀라운 취업률
다만 그런 봉주도 앞일을 생각하면 무덤덤할 수 없다. 일자리 세 곳을 건너 찾은 이곳도 결국 ‘잠깐 스쳐가는 일자리’다. 일 앞에 ‘지금’을 붙여야만 하는 이유다. “만약 당장 회사가 지금 다른 업체랑 계약을 못했어요. 그럼 누군가 그만둬야 하거든요. 그게 저일 수도 있죠. 재계약이 안 될 수도 있고. 그럼 끝이죠.”

일 자체가 안정성을 보장하지 않는 면도 있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이런 직장에 애착을 보이지 않는다. 이 직장을 다닌 1년 동안 같이 일했던 파트너 5명이 일을 관뒀다. “10만원 더 준다고 하면 옮겨요. 기술은 거기서 거기고, 배우는 건 얼마 안 걸리고.” 봉주의 일은 그런 일이다. 나름 기술직이라고는 해도, 기술 하나를 손에 쥐고 평생 밑천으로 삼을 만한 직업은 아니다. 봉주도 이런 분위기 속에 곧 일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다. “운전직 공무원에 관심이 있어요. 임금을 낮추더라도 좀더 안정적인 일을 하고 싶어요.”

1년 6개월째 반도체 배관 업체에서 일하는 경진도 “아직 제대로 된 일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경진네 회사 직원은 30명 정도 된다. 작은 회사다. 경기도 평택에 있다. 기술자-보조-안전관리자가 짝을 이뤄 반도체 공장에 들어가 배관을 설치한다. 경진은 아직 보조 역할을 맡는다. 3년 정도 지나면 기술자가 되고, 많으면 “월 400만원까지도 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달콤한 말이지만, 경진은 이 회사에서 기술자로 서기를 포기했다.

그럴싸해 보이는 반도체 업계라 해도, 영세 협력업체의 처지는 별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회사 다닌 지 1년 반 만에 깨달았다. “전적으로 회사 일감이 반도체 기업들에 달려 있는데, 일감이 없어서 4개월을 연속 3주만 일한 때도 있어요. 일주일은 완전 무급휴가예요. 그럴 때면 월급이 40만원 정도 줄어서 160만원 정도밖에 안 돼요. 내가 얼마 받을지가 한달 한달 너무 불확실한 거죠.”

스무 명 가운데 주영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일하고 있다. 취업준비생 같은 잠재적 실업자를 포함한 청년층(15~29살) 확장 실업률(고용 보조지표3)이 22.8%(2018년)에 이르는 것과 비교해보면 놀라운 취업 상황이다. “일을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 안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현수)이 이들 대부분에게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패스트푸드점이며 쇼핑몰 주차장을 돌며 아르바이트를 해왔다. “가족에게 손 벌릴 수 없는”(홍철) 현실 때문이기도 했고,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또래에 견줘 공부 압박에서 자유롭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사회가 이들에게 일을 강요했다. 이명박 정부 이후 나온 정부의 청년 대책은 대개 고졸 취업 활성화, 일·학습 병행, 국외 취업, 중소기업 미스매치(구인·구직 불일치) 해소 등을 앞세웠다. ‘대학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서둘러 일을 찾아 공백 상태인 중소기업 생산을 메워줄 것’을 청년들에게 요구했다. 특성화고를 졸업한 이들 스무 명은 그 한가운데 있었다.

체계적 이직 어려워
남들보다 빨리 일을 시작한 덕에 스무 명의 소득수준은 20대 후반(25~29살) 임금노동자 평균(229만원, 통계청, 2017년 기준 일자리 행정통계)보다 높은 편이다. 스무 명 중 10명의 소득이 300만원을 넘는다. 다만 준비 기간이나 고민 없이 그때그때 찾은 일자리는 대개 불안했다. 큰 만족감을 주지도 않았다. ‘일은 하면서 배우는 것’이라는 말을 믿었지만, 지식이나 숙련이 낮은 상태로 갈 수 있는 일자리에서 안정성까지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이들이 깨친 일의 본질은 ‘불안한 것이고, 불안을 딛고 버티다 어느 순간 자의로든 타의로든 떠나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이직이 개인에게는 일자리의 질을 높여가는 방법일 수도 있었다. 상덕, 성준 등 주로 자동차정비업계에 있던 친구들이 택한 방식이다. 하지만 체계적 이직이 쉬운 일은 아니다. 막상 이직을 하자니 “고졸 학력이 문제”(보경)가 되거나, “경력을 쌓고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봉주)

봉주나 보경처럼 일터와 고용조건이 불안정한 이들만 불안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전문대를 거쳐 대기업 정규직으로 입사한 친구들은, 이들과는 좀 다른 결로 ‘지금 직장을 10년 뒤에도 다니고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내가 이 업무 강도를 버텨낼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해서다.

홍철·석영·인규는 마침 처음으로 전문대에 자동차 보상학과가 생겼을 때 입학했고, 그 과를 나오면 “70% 정도는 보험업계로 취업이 가능했던” 시점에 대기업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인규는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다. 우리 후배들은 이제 보험회사 들어올 문이 좁아졌다”고 안도한다. 그러나 대기업 취직은 시작일 뿐이었다. 관건은 과도한 업무를 버텨낼 수 있는가다.

“빛 좋은 개살구거든요, 이 일이.” 홍철은 보험회사에 2015년 입사했으니 벌써 5년차 직장인이다. 적응될 만도 한데, 이 회사에서 일하는 10년 뒤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솔직히 막막하다.” 사고 처리하며 고객에게 상처받는 일이 잦다. 사정이 나아졌다 해도 회사가 그런 상처까지 일일이 보듬지는 않는다. “욕설이나 인권 모독, 성희롱 이런 건 기본인데요, 일단 고객 민원 받으면 회사에서 사람 취급 못 받으니까 제대로 항변도 못했어요. 스트레스가 너무 커요.” 사람에게 호되게 당한 날이면, 몸은 힘들지 몰라도 좋아하는 기계만 바라보고 일해도 될 것 같은 ‘자동차 기술자’의 길을 포기한 것이 못내 아쉽다.

다만 작은 희망이 생겼다.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석영은 주 52시간제가 도입된 이후 “조금 숨통이 트였다”고 했다. 작년부터 회사는 개인 컴퓨터를 강제로 끄는 식으로 업무 시간을 하루 8시간으로 제한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출근은 7시 반, 퇴근은 늦으면 밤 10시, 업무용 폰으로 새벽에도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제 삶이 없었어요. 근데 지금은 저녁 6시면 퇴근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래도 내가 참아내면 할 만은 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나마 괜찮은 대기업에 다녀 받을 수 있는 혜택이다. 파견 나가 설비 관리 일을 하는 봉주는 감시·단속적 특성을 갖는 업무 성격을 고려해도 일주일, 길면 96시간 가까이 일하고, 골프장 캐디 일을 하는 용래도 새벽 4시 출근해 저녁 8시 넘어서야 퇴근한다.

52시간제, 홍철은 숨통 트여도 봉주는 여전히 96시간 노동
일터의 안정성을 걱정하거나 벅찬 업무 앞에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이, 이들 대부분에게 일에서 느끼는 자부심, 보람, 성취감은 낯간지러운 단어가 됐다. 당장 임금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중요해졌다.

“보람을 느껴본 적은 없어요. 그냥 하루하루 한건 한건 해결하면, 오늘도 지나갔구나 하면서 안도하는 거지. 굳이 따지면 그런 안도감이 보람일 수 있는 걸까요?”(인규)

“일하는 데 뭐. 제일 현실적인 건 월급 받을 때죠.”(범수)

물론 예외도 있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거나 “언젠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청년들도, 적지만 있다. 임금수준만 보면 높다고 할 수 없지만 일에서 보람이나 행복감을 찾는다. 이들에게는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 헤맬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풍족하진 않았어도 사회에 첫발을 딛기까지 뒤를 받쳐줄 가족이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성용과 현수는 그런 시간을 가질 정도로는 운이 좋았다. 같은 시간 봉주와 영남은 가족을 위해 일단 돈을 벌어야 했다.

가족이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나
② 가족: 시간-밑

자동차에서 인테리어 설계로 진로를 바꾸기까지 성용에게는 1년의 시간이 있었다. 자동차 기술자가 되는 꿈은 군대에서 완전히 접었다. 새로운 출발점에서, 어린 시절부터 집 근처 가구거리를 지날 때마다 정신없이 진열장을 바라봤던 자신을 떠올렸다. 2014년 학원에 다니며 인테리어 회사 취업을 준비했다. 캐드(CAD·컴퓨터지원설계)를 배우고 실내 건축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그 시간, 돌아보면 20대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건축기능사 시험을 4시간 가까이 봤는데, 제가 좀 잘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고 집에 돌아오던 길이 아마 내 20대에서 가장 기뻤던 때인 것 같아요.”

가족이 집 소유 5명, 그것도 5억원 이하 빌라
성용 가족은 아직 전셋집에 산다. 풍족한 환경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도 최소한 앞이 보이지 않는 직업 탐색 기간에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다. 급하게 일로 내몰리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최악은 아니었어요. 대학 학비 대주실 정도는 됐고.” 그렇게 길을 돌아 지금 성용은 ‘제대로 된 일’을 찾았다고 느낀다. “내가 설계한 대로 현장에서 실물이 나타나거나 마감재나 가구를 하나하나 고를 때 무척 재밌고 신기해요. 계속 이 일 하면서 살고 싶어요.”

스무 명의 가정환경은 여유롭지 않다. 2017년 기준 특성화고 학생 가구의 저소득층 비율은 28%로 일반 고등학교(13%)의 두 배 정도다(고졸 취업 활성화 방안, 2019). D공고 자동차과의 경우 정도가 더 심했다. 고등학교 시절을 기준으로 32명 가운데 생계 문제로 교육비 지원을 받은 기초생활수급 가정은 5명, 차상위계층은 15명에 이르렀다. 8년이 지난 지금 이들 중 인터뷰에 응한 스무 명 가운데 가족이 집 한 채라도 소유한 경우는 5명이었다. 그마저 5억원 이하 빌라인 경우가 많다. 모두 중산층으로 보기는 어려운 가정이다.

계층 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가족의 경제적 지원은 애초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남은 건 스스로의 힘으로 딛고 일어서는 일이다. 여전히 20대 후반일 뿐인 이들 가운데 누가 주어진 환경을 뛰어넘어 중산층의 삶에 가닿을지 알 수 없다. 다만 소득수준을 떠나 최소한 일에서 행복을 느끼고, 지금 일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이는 스무 명 가운데서도 소수에 그친다. 올해 친구와 문을 연 맥줏집 얘기만 나오면 눈을 빛내는 현수도 그렇다.

현수는 군 제대 뒤 치킨집, 주꾸미식당에서 길게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당장 돈이 급해서 한 적은 없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6천만원은 올해 4월 친구와 함께 프랜차이즈 맥줏집을 차리는 데 오롯이 쓸 수 있었다. 결국 현수의 아르바이트 목적은 생계 유지보다 자기 일을 찾고 기반을 닦기 위한 탐색에 가까웠다. 지금 하는 저축도 더 큰 가게를 차리기 위해서다. 지나온 20대를 느릿하게 풀어놓던 현수는 가게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숨이 가빠졌다. “프랜차이즈 말고 저만의 가게를 여는 것인데요, 가게 스타일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사진 찍기에 예쁘게 꾸며놓고. 지금은 친구랑 동업하지만 각자 가게를 차려서 ‘따로 또 같이’ 같은 형태로 해보면 어떨까 해요.”

부모가 자녀에게 의존하는 세상
부모와 함께 살며, 생활비 일부를 스스로 버는 정도의 경제적 부담만 지고 있던 성용이나 현수의 20대는 한국 사회에서 그리 특별한 자리는 아니다. 20~34살 청년 가운데 부모에게 일부라도 경제적 의존을 하는 경우가 56.4%(2016년 기준, 오호영 한국직업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캥거루족 실태 분석과 과제’)에 이른다. 이 유예의 시간 청년들은 자신의 진로와 미래를 생각한다. 다만 이런 평범한 20대의 자리가 봉주와 영남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자리였다. 같은 20대, 이들이 놓인 세상은 ‘부모에게 의존할 수 없었던 세상’일 뿐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의존하는 세상’이었다. 봉주는 이런 자신의 세상을 ‘밑’이라고 표현했다.

“남들이 10에서 잘 풀리는 거랑 제가 1에서 잘 풀리는 거랑은 다르죠. 저는 밑에 있다 보니까요.” 봉주는 군을 제대하자마자 1년 동안 아버지 병간호를 했다. 아버지는 끝내 2017년 세상을 떠났다. 병시중 비용은 모두 봉주가 댔다. “큰형은 구조조정을 당해서 퇴직한 상태라 여유가 없고, 둘째 형은 일하지 않아서 돈이 없었어요. 상대적으로 제가 여유가 있었던 편”이라고 봉주는 말했다. “정신없이 일하고 체력이 바닥나 그냥 자고, 다시 출근하며” 20대를 보냈다고 회상한다. “어떻게 그렇게 사나 싶을 정도로” 최소한의 소비만 했는데도 가족에게 쓰느라, 지금까지 모은 돈은 많지 않다.

영남이 가족에게 느끼는 감정도 복잡하다. 당뇨가 있는데도 술을 마시는 아버지와 딱히 직업이 없는 채로 1억원 가까이 사기를 당해 빚이 쌓인 누나가 집에 있다. 이들을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만 받는다.” 경기도 이천에서 타워크레인 정비 일을 하면서 기숙사에 머물고, 주말에 서울에 와도 가족이 있는 집에 가기보다 여자친구 집에 더 많이 머무는 이유다.

그래도 아버지 병원비와 보험료를 전부 영남이 떠안았다. 사기 빚에 허덕이는 누나 대출도 대신 갚아줬다. “어이없게도 군대 갈 때 엄마한테 휴대전화 정지를 해달라고 했는데 그것마저 안 해주셔서 요금이 연체되고 신용이 나빠진 거죠. 제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아야 해서 이자가 9%나 됐어요.” 정작 정신없는 삶 사이에 자신에게 깃든 우울증은 병원비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가족들의 무관심 탓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자동차 수리 업체→술집 아르바이트→모터 부품 업체→타워크레인 수리 기술자로 영남의 직업이 변하는 동안, 직업 선택의 기준은 ‘내가 좋아하는 일’보다 ‘그때그때 임금 수준과 상황’이 됐다. “한번은 부모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고 막 화낸 적도 있기는 해요.” 그때를 되짚는 영남의 목소리에 오히려 미안함과 머뭇거림이 묻어난다. “빨리 결혼해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서도, “지금 결혼하면 아버지와 누나에게 보내줄 돈이 없어질 것 같다”고 걱정한다.

가족의 사고 수습을 제 몫으로
27살까지 가족은 스무 명에게 서로 다른 의미였다. 한쪽에 진로를 찾기 위해 헤매고 고민하는 시간을 버텨줄 가족을 가진 성용과 현수 등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 가족에게 벌어진 불행을 오롯이 제 몫으로 짊어져야 했던 봉주와 영남 등이 있다. 그 사이에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빨리 일하고 싶어서 20대 초반 모든 결정을 취업에 맞춰”야 했던 인규, 홍철 같은 친구들이 있다. 가족을 위해 눈에 띄는 희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가난을 의식하며 취업 전까지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가늠해볼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다만 중산층이 아닌 부모를 가진 스무 명 모두는 10년 뒤 미래에 대한 걱정만큼은 공유한다. 당장 가족 부양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도, 봉주와 영남이 지금 겪는 부양 의무가 자신에게도 언젠가 닥칠 일이라고 막연히 알고 있다. 이들이 보기에 부모는 “고용이 불안정해 연금이나 퇴직금도 없고 노후를 보장하기에 충분한 자산을 모으지도 못했다.”(인규) 부양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당연히 부모로부터 증여를 기대하기 어려워 결혼, 내 집 마련 같은 꿈의 바탕이 될 자산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아득한 바람과 걱정이 뒤섞인 미래 앞에 이들은 일단 현재에 집중하기로 한다.

‘탕진잼’ 혹은 ‘카르페디엠’
③ 미래: 걱정-욜로

스무 명이 떠올리는 미래에는 바람과 걱정, 두 감정이 모두 담겨 있다.

바람은 20대 후반 나이에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부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좋은 가정을 꾸리길 바란다. ‘결혼해야 한다’는 인식이 절반 이하(48.1%, 통계청, 2018년 사회조사)로 떨어진 사회 분위기에서 의외로 결혼을 꿈으로 꼽는 목소리가 컸다.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돼서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것이 꿈이에요.”(석영) “집이 있고 방은 두 개 정도, 친가·외가 가족끼리 다 같이 놀러 갈 수 있게 차는 카니발 정도였으면 좋겠어요.”(범수)

걱정은 주로 노후를 책임질 변변한 자산을 아직 마련하지 못한 부모를 향한다. “부모님에게 무슨 큰 병이 있는 건 아닌데 잔병이 많아지셔서. 제가 언젠가 책임지긴 해야 할 텐데.”(경진) “어머니 부양을 늘 생각해요. 아직 건강하게 일하고 계시지만 일용직이라 연금이나 퇴직금 같은 건 없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끝까지 모시고 살고 싶어요.”(인규)

소득 저축한 적 없이
바람을 이루고 걱정에 대비하기 위한 저축은 거의 하고 있지 않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저축은 단순히 금융활동을 넘어 현재와 미래에 대한 태도와 연결된다. 걱정되거나 바라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이 스무 명에게서 비슷하게 나타난다.

대기업 다니는 인규도 월급은 350만원 정도이지만 저축은 한 달 50만원 정도만 한다. “집을 살 수 있을까, 길게 보면 이게 가장 큰 걱정거리이긴 한데요, 월급을 한 푼씩 모은다고 집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셋집이긴 하지만 사는 곳이 있으니까 아직 구체적으로 고민하거나 알아보지는 못했어요.” 대신 인규는 소비한다. 캠핑을 좋아해서 장비 사는 데 돈을 쓰고, 여름에는 서핑을, 겨울에는 스노보드를 타러 간다. 새로운 놀거리를 발견하며 사람 관계를 넓히는 ‘삶의 낙’을 좇는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누나 세 가족이 함께 살아왔다. 어머니는 도배 일로 자식을 키웠다. 어머니가 일을 놓아야 할 10년 뒤를 생각하면 무언가 준비해야 할 것 같지만 쉽지 않다. “적금액을 늘리려고 생각은 하는데 한번 씀씀이가 커지니 감당이 안 되네요. 노력은 해보는데, 잘 안 돼요.”

이런 모습은 경진의 입에서 ‘욜로’(You Only Live Once·현재 자신의 행복을 중시하고 소비하는 태도)라는 단어로 정리됐다. 경진 역시 지금 버는 월 200만원 남짓한 돈을 저축한 기억은 없다. “집 사고 가족 꾸리고 이런 꿈도 있는데, 세상이 쉽지 않더라고요. 그런 건 너무 멀기도 하고. 그냥 하루하루를 재밌게 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욜로 스타일로.” 경진은 주로 술을 마시거나 옷을 사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는 데 돈을 쓴다. 탈북가정 출신으로 가정환경이 간단치 않은 우철 역시 이전 직장에서 받은 돈을 “나를 위해 잘 썼다”고 했다. “쇼핑을 걱정 없이 마음 놓고 한다든가, 비싼 것 한번 먹어보자 해서 서울타워 가서 스테이크도 먹어보고, 여행도 다녔어요.”

이유를 물으면 ‘꿈과 현실의 거리감’을 말한다. 차곡차곡 한 푼씩 모아 자산을 이루는 꿈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이뤄질 리 없는’ 무언가다. 적금을 부어봐야 금리는 당연히 낮고, 고금리 시대의 수혜를 누린 것은 한참 윗세대뿐이다. 어차피 가망 없는 집 대신 맛있는 것과 여행, 자동차나 오토바이에 집중한다. 이런 모습은 성향으로 포장된다. “제 성향 자체가 바로 앞만 보자는 것, 즐기자는 거예요.”(성준)

저축보다 대출·재테크
그리하여 그나마 자산 형성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저축보다 대출·재테크에 쏠린다. “요즘 같은 시대에 월급 모아서 돈 모은다는 것은 어려운 얘기고, 그래서 재테크 쪽으로 관심을 가져보려고 해요.”(석영) 그렇다고 주식투자 등에 당장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한다. “관심은 많은데 막상 정보를 얻거나 할 사람이 많지 않아서 주저하고 있어요.”(경진)

물론 이룰 수 없는 꿈의 항목에 눈감는 대신 현재를 택하는 ‘욜로 스타일’만이 미래를 준비하기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니다. 좀처럼 미래를 생각할 수 없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 범수는 300만원 월급을 받지만 정작 손에 쥐는 돈은 80만원 정도다. 동생이 1억원 넘는 대출을 끌어다 쓰는 ‘사고’를 쳤고, 그 돈을 범수가 갚고 있다. “아직도 1년 반은 더 갚아야 해요. 어머니가 저보다 더 많이 일하시는데 그런 상황에 눈감을 수는 없으니까요. 제 월급에서 80만원 빼고 나머지는 다 어머니께 드려서 빚을 갚는데, 저축은 안 되는 거죠.”

봉주는 겉보기에 이들과 정반대의 경우다. 저축 비중이 스무 명 가운데 단연 높다. 300만원을 벌고 100만원을 대출이자로 내면서, 남은 200만원 가운데 140만원을 저축한다. 봉주의 저축 역시 미래를 위한 것은 아니다. 중소기업에 다녀 비교적 저리(1.4%)로 대출받아 전세금을 구했는데, 문제는 이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만약 회사에서 갑자기 재계약이 안 되면 대출 지원이 끊기고, 저는 갑자기 대출금을 한꺼번에 갚아야 하는 상황이 돼요. 그러니까 지금 대출금 갚는 것 말고도 추가로 많이 저축해둘 수밖에 없어요.” 봉주는 미래를 꿈꿀 새 없이 눈앞의 위험을 막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맨다. “깊게 생각하면 스스로 제가 무너져요. 무너지면 어떻게 할 줄 모르고, 그러면 다 싫어지고 그만둬버리고 싶고. 그러면 너무 최악이고. 그래서 자꾸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완전한 혼자, 지독한 외로움
④ 관계: 외로움-분리

일 바깥의 삶은 여느 20대처럼 스무 명에게도 중요했다. 경기도 평택 반도체 장비업체에서 일하는 우철은 주말만 되면 서울로 온다. 가장 친한 중학교 시절 친구를 만나 술이라도 마셔야 또 일주일을 버틸 수 있다. 평택에는 인간관계랄 게 없다. 회사 사람과는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탈북가정 출신인 것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우고 싶은 정체성이기도 하지만, 회사에서 그런 이야기를 터놓을 만큼 ‘정 가는 사람’도 없었다. 20대 들어 휴대전화 기판 업체에서 에어컨 설치 업체를 거쳐 지금 회사에 오기까지, 회사에는 “별의별 이상한 사람이 많다”는 점을 깨우쳤다. “군대식으로 하려는 사람도 있고, 괜히 텃세 부리는 사람도 있고. 별의별 사람이 다 있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를 만나지 않는 평일, 일 바깥의 삶에는 별다른 낙이 없다. 퇴근하고, 기숙사에 들어와 자고, 출근하는 일상을 반복한다. 혼자서 ‘라면을 무제한으로 주는’ 회사 식당에 가거나, 헬스장을 이용하며 “회사 복지 시설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 정도가 행복이라면 행복이다. 그래도 늘 사람은 아쉽다. “조언이나 이런 걸 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혼자 늘 결정해야 해서 힘들어요.”

졸업생 스무 명 가운데 절반이 고향인 서울을 떠났다. 일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9명)이다. 생산직 비중이 높은 특성화고 졸업생이 생산 현장을 따라 지역 곳곳으로 흩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문제는 ‘외로움’이다. 일 바깥에서 삶과 고민을 공유할 만한 사람이 지역에는 없다. 동네 친구, 학교 친구를 중심으로 꾸려질 수밖에 없는 특성화고 졸업생의 20대 후반 관계는 일을 찾아 지역을 향하는 순간 단절된다.

친해지면 손해 보는 게 많더라
가장 오래, 가까이 마주치는 회사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은 기피한다. 일과 삶의 분리에 엄격하다. “공과 사 사이의 선을 제가 딱 긋는 편이에요. 그쪽에서 먼저 다가와도 그렇게 해요. 회사에서 만난 사람이랑 끈끈해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석영) 이런 태도가 유리하다는 걸 일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친해지면 손해 보는 게 많더라고요. 바라는 게 많아져요. 일도 더 대신해달라 하고, 내 일 다 하고 쉬는데 도와달라 하고.”(봉주) 정작 힘들 때 선배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기억도 이런 생각을 거든다. “처음에는 일에서 스트레스 받을 때 선배들과도 상의해봤는데 그분들은 세대가 다르고, 우리처럼 업무 압박이 심하거나 그랬던 시절을 보낸 것도 아니라서 ‘그 정도는 견뎌야지’ 하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니까 못 견디고 자주 회사를 나가게 되고.”(홍철)

흔히 1990년대생의 특징으로 일컫는 ‘끈끈한 직장 관계를 거부’하는 특성과 ‘지역 근무 가능성이 큰’ 특성화고 졸업생의 특성이 예기치 않게 맞붙는다. 고립감과 외로움을 낳는다. 경기도 평택에서 일하는 경진은 이런 외로움 때문에 일을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다. “불안정한 임금도 있지만, 사실 지역적으로 서울에서 떨어져 있다는 게 저한테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없게 하는 큰 이유예요. 퇴근해도 딱히 뭘 할 게 없고 만날 사람이 없으니까.” 퇴근하고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그저 유튜브를 뒤적인다. 그때그때 재밌는 것을 보다 잠드는 정도가 일 바깥의 삶이다. “노래 부르는 영상을 보다가, 웃기는 1인 방송도 좀 보다가. 원래 제가 친구들이랑 술 먹는 걸 되게 좋아하는데.” 주말에 서울 방문을 마치고 비닐 가방을 하나 든 채, 고속터미널로 향하는 경진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냥 부자, 하는 만큼도 안 되는 세상에서의 꿈
⑤ 꿈: 노력-평범

스무 명이 8년 전 2월9일, 졸업식이 있던 그날을 떠올린다. 졸업식을 마치고 3년을 한 반에서 보냈던 D공고 자동차과 32명이 모두 모여 서울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제가 우리 집 가까운 술집으로 가자고 졸랐던 것 같아요.”(현수)

그날 영남은 “그냥 부자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경진은 “스무 살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유 없이 좋았다.” 병주는 “사회 나가면 500만원 정도는 다 버는 건 줄 알았다.” 물론 “왠지 모르게 허탈하고 공허한 마음”(종만)도 있었다. 그때 품었던 자신과 세상에 대한 생각과 희망을 지금까지 품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비슷한 업종에서 일하거나 비슷한 삶의 수준을 유지하는 친구들끼리는 여전히 관계를 이어가지만, 자동차과 전체가 모인 자리는 그날 이후 없었다. 이제는 서로 얼굴조차 흐릿해진 친구들, 연락조차 닿지 않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서로를 잊어가며, 청년들은 세상 곳곳에 흩뿌려져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힘든 현실 앞에 “제가 노력을 많이 안 했다”는 자책이 앞선다. 그리하여 무언가 이루기 위해 “그냥 있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제가 노력을 해야 한다”(영남)고 말한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는 한계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노력해서 극복할 수 있다”(경진)고 믿는다. 임금이나 승진 기회 면에서 엄연한 전문대 출신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도 “어차피 몇 년 더 일하면 쫓아갈 수 있는 것”(인규)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한다.

다만 세상이 노력한 만큼 공정한 대가를 주는지 물으면 또다시 머뭇거린다. “느낌이 좀 그래요. 노력은커녕 그냥 하는 만큼도 안 주는 것 같아요.”(영남) 오스트레일리아에 나가 일하고 공부하는 주영의 평가는 좀더 냉정하다. “여기서는 노력한 만큼 돈이 들어오는 것 같은데, 한국에선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도 아파트도 못 사고 고생해도 돈은 모이지 않고 그런 것 같아요.”

세상 가장 어려운 ‘평범’
그렇다고 노력의 대가를 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큰 것은 아니다. <한겨레21>과 만난 스무 명 대부분은 “정치나 사회 이슈에 큰 관심이 없다”고 했다. 대기업 직장인 경력이 긴 홍철이나 아직 학생 신분인 종만 정도가 조금씩 관심을 가져볼 뿐이다. “관심이 정말 없고요. 그냥 인터넷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오는 기사 토막들 보면서, 한국 망해가는구나 하는 정도죠.”(석영) 20대라면 관심 둘 법한 최근 이슈인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자녀의 입시 공정성 논란도 딴 세상 얘기다. “관심 둘 여유가 없다”고 경진은 선을 긋는다.

다시 시간은 흐르고, 그렇게 스무 명은 13년 뒤 마흔 살이 될 것이다. 자신이 꿈꾸는 마흔 살을 상상하는 말들은 끝내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향한다. 일, 가족, 미래에 대한 고민, 인간관계 사이에서 정신없이 분주한 현실과, 앞으로 더 해야만 하는 노력이 향하는 곳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평범한 삶이다. 8년 전 “막연하게, 모든 게 막연하게 다 잘될 줄 알았던”(범수) 열아홉 살 꿈을 씁쓸하게 돌아보고, ‘남들만큼’을 꿈의 자리에 채우는 어른이 됐다.

“어릴 때 집이 힘들었던 게 있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만 생각하게 돼요. 점점 꿈이 뭐였지, 하고 싶은 일이 뭐였지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것도 희미해지고.”(인규)

“튀지 않고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남들처럼 중산층으로. 아파트에 살고 집은 30평 정도? 여자친구가 아이를 별로 안 좋아해서 강아지를 많이 키우자고 했어요.”(영남)

“평범하게 살자. 저한테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 같기는 한데. 내 집 있고, 내가 일을 그만두더라도 바로 금전적으로 힘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지금처럼 숨만 쉬어도 100만원씩 나가는 게 아니라, 보험료만 나가고 나머지는 나가지 않을 정도면 좋겠어요.”(봉주)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인포그래픽 장광석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