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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승계 바라고 말 세 마리 사줬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겁박당한 총수’라는 가면을 사정없이 벗긴 대법…

뇌물로 인정된 금액은 86억8081만원
등록 2019-08-31 14:03 수정 2020-05-07 10:06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7년 12월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7년 12월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국정 농단’ 사건 재판에서 롤러코스터를 탔다. “정치권력에 부도덕하게 밀착한 경제권력”(1심)에서 “최고 권력자에게 겁박당한 재벌 총수”(2심)로 신분이 180도 바뀌었다. 8월29일 대법원 판결은 그를 다시 ‘정경유착’의 주범으로 돌려놨다. 항소심(2심) 재판부의 ‘봐주기 판결’로 석방된 뒤, 반도체 경기 침체와 일본의 수출규제라는 악재 속에 존재감을 뽐냈던 이 부회장은 또다시 지리한 법정 공방을 치르게 됐다.

“대통령 직무와 대가관계 충분”

대법원은 이날 이 부회장의 ‘겁박당한 총수’라는 가면을 사정없이 벗겼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줬다고 판결했다. 박 전 대통령의 비선 실세 최순실(개명 최서원)씨 쪽에 삼성이 준 말 3마리는 뇌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앞서 이 부회장의 항소심에서는 말 3마리의 소유권이 최씨에게 이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뇌물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양쪽(최씨와 이 부회장) 사이에 말을 반환할 필요가 없고 실질적인 사용·처분 권한을 이전한다는 의사의 합치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며 “이 부회장 등이 최씨에게 제공한 뇌물은 말들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항소심은 뇌물 부분이 “말들에 관한 액수 미상의 사용이익”이라고 한정했지만, 대법원은 항소심의 이런 판단이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반하고 일반 상식에도 반한다”고 지적했다.

이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부가 “없었다”고 했던 ‘경영권 승계 작업’도 대법원은 “있었다”고 인정했다. 이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부는 승계 작업이 아예 없다고 봐, 청탁도 없었다고 했다. 덕분에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이 부회장이 준 16억2800만원은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둔갑했다.

대법원은 “최소 비용으로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인 삼성전자·삼성생명에 대한 이 부회장의 지배권 강화라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미래전략실을 중심으로 삼성그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승계 작업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또 “승계 작업은 그에 관한 박 전 대통령의 직무 행위와 제공되는 이익 사이에 대가관계를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특정되었고 부정한 청탁의 내용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부정한 청탁은 묵시적 의사표시로도 가능하고 청탁의 대상인 직무 행위의 내용이 구체적일 필요도 없다”며 “청탁의 내용도 박 전 대통령의 직무와 이 부회장 등의 영재센터에 대한 자금 지원 사이에 대가관계를 인정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해, 지원금은 대통령 직무와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못 박았다.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집행유예 선고는 어려울 것”

이날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이 부회장의 뇌물공여(회삿돈을 건넸으므로 횡령) 액수는, 항소심에서도 뇌물로 인정한 승마 지원 관련 용역 대금 36억8484만원까지 합쳐, 86억8081만원이 된다. 액수는 향후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이 부회장의 형량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고려 요소다. 액수가 늘어난 만큼 이 부회장의 실형 선고 가능성도 커졌다. 이 부회장의 혐의에 적용받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특경법)은 횡령액이 50억원 이상일 경우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형을 선고하도록 한다. 대법원 양형 기준 역시 횡령액이 50억~300억원인 경우 기본 4~7년(감경 2년6개월~5년, 가중 5~8년)으로 형량을 권고하고 있다. 뇌물 공여는 1억원 이상이 2년6개월~3년6개월(감경 2~3년, 가중 3~5년)이다.

물론 판사가 재량에 따라 절반까지 형량을 줄일 수 있는 ‘작량감경’이 가능하고, 징역 3년 이하일 경우 집행유예도 선고될 수 있다. 대표 사례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다. 신 회장은 면세점 특허 관련 청탁과 함께 K스포츠재단에 70억여원을 건넨 제3자 뇌물공여 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혐의는 그대로 인정된 채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신 회장에게도 이 부회장 항소심처럼 “강요된 뇌물”이라는 논리와 “피해액(횡령액) 변제”와 “반성”이 감형과 집행유예 논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경우는 신 회장과 달리 봐야 한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신 회장의 청탁 목적은 면세점 특허 정도였지만 이 부회장의 청탁 목적은 경영권 승계로,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이득 규모가 이 부회장이 훨씬 많다”며 “대법원이 경영권 승계 목적을 인정한 이상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의 경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박근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 찬성하도록 지시해 국민 노후자금에 손해를 끼친 사건이기도 하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 혐의로 항소심까지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비록 묵시적 청탁일지라도 결과적으로 국민에게 손해를 끼치게 한 뇌물공여인 셈이다.

삼성은 이 부회장의 실형 선고를 막기 위해 법정에서는 ‘설령 묵시적 청탁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강요된 뇌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법정 밖에서는 그동안 재벌 총수의 집행유예 사유가 됐던 ‘국가 경제에 기여한 기업인’ 이미지를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이 2018년 2월5일 항소심에서 석방된 뒤 보였던 행보도 유사하다. 국내 최대 기업집단의 투자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그 결정 주체로서 총수의 필요성을 부각하는 데 집중했다. 2018년 8월, 삼성은 앞으로 3년 동안 180조원을 투자하고 4만 명을 채용하겠다고 발표했다. 2019년 4월엔 삼성전자가 “2030년까지 비메모리 반도체에 133조원을 투자하겠다”는 발표도 잇따랐다. 6월16일엔 ‘이재용 부회장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전략 행보 가속화’라는 보도자료를 내어, “미래에 대비하기 위한 부문별 경영 전략 및 투자 현황을 ‘직접’ 챙기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해외 수출 효자 노릇을 하고 삼성전자가 사상 최고 실적을 가능하게 했던 반도체 경기가 나빠지고, 일본이 7월부터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에서 배제해 반도체 생산 핵심 소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일련의 경제 상황은 이 부회장의 존재감을 뽐내는 좋은 환경이 됐다. 삼성은 이 부회장이 수출규제 대책을 마련하느라 사장단 회의와 일본 출장, 계열사 방문 등을 했다며 그의 동정을 부지런히 언론에 알렸다. 이 부회장 선고가 임박한 8월에만 계열사 방문 관련 보도자료가 4건이 나왔으며, 자료에 첨부된 사진 속 이 부회장은 셔츠를 걷어붙이고 있거나, 제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경영계와 보수 언론에선 이런 이 부회장을 이순신 장군에 빗대기도 했다.

8월2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디스플레이 아산공장을 찾아 제품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8월2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디스플레이 아산공장을 찾아 제품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항소심 뒤 서버 숨긴 일 드러나기도

이 부회장의 자신감 있는 행보의 배경엔 문재인 정부가 국정 농단 피고인에게 한 적극적인 ‘구애’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부회장은 2018년 7월 삼성전자 인도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문 대통령을 만났고, 두 달 뒤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도 경제사절단 자격으로 동행했다. 그는 올 1월 대기업 총수 등을 대상으로 열린 청와대 ‘기업인과의 대화’에도 참석했다. 이 부회장은 문 대통령에게 “우리 공장이나 연구소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석 달 뒤 정부가 ‘시스템 반도체 비전 선포식’을 삼성전자 화성공장에서 열었다. 선포식에 문 대통령도 참석했다. 이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이런 공장 짓는 돈이 인천공항의 3배”라는 말을 하면서 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대법원 선고 직후 삼성전자가 낸 입장문에도 드러난다. 삼성전자는 “이번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저희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삼성은 최근 수년간, 대내외 환경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왔으며, 미래산업을 선도하기 위한 준비에도 집중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라며 “갈수록 불확실성이 커지는 경제 상황 속에서 삼성이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과 성원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항소심의 집행유예 선고 직후 서울구치소를 나서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앞으로 더 세심히 살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사기에 대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 핵심 증거가 담긴 서버를 공장 바닥에 숨기는 등 수사를 방해하는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준법 경영을 다시 다짐했다.

삼성은 애초 대법원이 이 부회장의 집행유예 판결을 확정할 경우, 11월1일 삼성 창립 50주년을 맞아 삼성의 새로운 비전을 발표할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 총수로 등판하면서 그동안 보여준 적 없던 비전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 1월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에게 반도체 경기에 관한 질문을 받자 “좋지는 않지만, 이제 진짜 실력이 나오는 것”이라 말하는 여유를 보였다. 대법원 판결이 끝난 지금 이 부회장이 다시 이런 여유를 보일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창립 50주년, 비전 선포의 날…

국정 농단 수사를 재벌로 확대한 박영수 특별검사는 이날 대법원 판결 직후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 대한 청탁을 인정하고 말이 뇌물로 명확히 인정된 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밝혔다. 삼성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특검팀의 여유가 묻어나는 소감이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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